탁월한 취향을 바탕으로 패션 여왕이 된 베라 왕
탁월한 취향을 바탕으로 패션 여왕이 된 베라 왕. 패션에 대한 공부를 멈추지 않는 학생이라 말하는 그녀가 한국만을 위한 브랜드 VW 베라 왕과 함께 서울을 찾았다.
“True Story!” 베라 왕이 자주 쓰는 말 중 인상적인 표현을 꼽으라면 두 단어가 될 듯하다. 미국 <보그> 패션 에디터로 일할때 사진가 어빙 펜과 있었던 촬영 에피소드를 들려주거나, 랄프 로렌 디자인 디렉터로 일할 때 경험한 놀라운 사건을 설명할 때 그녀는 진짜임을 강조하듯 “트루 스토리!”라고 말했다. 아주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하고 흥미로운 삶을 영위해온 디자이너에게 제격인 표현이었다.
베라 왕을 만난 건 10월, 방배동 CJ오쇼핑 어느 스튜디오에서였다. 한국의 쇼핑 채널을 통해 판매하는 VW 베라 왕을 위해 한국을 찾은 것이다. 베라 왕 특유의 검정 부츠컷 팬츠에 마트에서 구입한 화이트 저지 톱을 입은 그녀는 기다란 흑발을 휘날리며 스튜디오에 등장했다. 그녀와 함께 미국에서 날아온 베라 왕 군단, 자리를 마련한 CJ오쇼핑 직원들, 촬영을 위해 준비 중인 스태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부담스러울 법했지만, 이 패션 여왕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래서 한국 <보그>는 어떤가요?”
말 그대로 ‘보그 후배’인 내게 베라 왕의 스토리는 꽤 익숙하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 함께 파리에서 오뜨 꾸뛰르 고객이었고, 대학 시절에는 생 로랑 부티크에서 일했으며, 대학 졸업 후 당당히 미국 <보그> 사무실에 들어가 패션 에디터로 일한 후, 랄프 로렌이 스카우트해간 패션 엘리트라는 사실. 그리고 1990년 자기 이름을 내건 웨딩드레스 브랜드를 시작했고, 이제 레디 투 웨어, 홈 웨어, 향수 등을 거느린 거대 제국을 완성한 여왕.
요약하면 간단하지만, 위 낱말과 문장 사이에는 수많은 ‘트루 스토리’가 존재한다. 그녀 스스로 ‘패션 교육’이라고 지칭하는 삶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니까. “열여섯 살때부터 꾸뛰르 쇼에 다녔어요. 소르본에서 공부할 때도 쇼를 보러 다녔죠. 마침 저희 집안이 소유한 파리에 있는 아파트가 16구의 스퐁티니(Spontini) 거리에 있었어요. 1962년쯤? 같은 거리에 생 로랑이 꾸뛰르 메종을 열었죠. 당연히 그곳에 갈 수밖에 없었죠. 패션을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뉴욕에서 5일간 배를 타고 파리로 갔어요. 엄마가 비행기 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셔서 배를 탄 거죠. 그 당시엔 생로랑을 사고 싶거나, 디올을 사고 싶으면 파리로 가야 했어요. 쇼핑하기 위해 5일간 뱃멀미를 견디던 시절이에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들죠.”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러한 이야기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인상적인 스토리는 이어졌다.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결사 반대하셨어요. 그런 재능이 없다고 믿으셨어요. 그래서 만약 진짜 패션에서 일하고 싶다면, 우선 취업부터 해서 능력을 증명하라고 하셨죠. 그래서 뉴욕의 매디슨 거리를 거닐던 중 <보그> 사무실에 들어가 일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운 좋게도 바로 패션 에디터로 일자리를 구했어요. 그 당시 에디터 중 가장 어린 나이였죠. 그리고 17년간 <보그>의 마법을 경험했어요. 어빙 펜, 리처드 아베돈 등 거장과 일한 마지막 에디터였어요. 최고의 패션 교육이었죠. 우리가 원하는 모든 사진가, 모델, 스태프, 드레스가 전화만 걸면 가능했어요. 당시 인기 많던 로메오 질리의 드레스도 원하면 5시간 안에 우리 사무실에 도착했어요. 모든 걸 지켜보고 많은 걸 배울수밖에 없는 곳이었어요. 그리고 랄프가 저를 불렀죠.”
랄프 로렌 디자인 디렉터로 일하던 중 그녀 인생에 또 다른 스토리가 펼쳐졌다. “결혼하게 된 거죠. 결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 어떤 드레스를 입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칼이 디자인하는 샤넬 꾸뛰르 드레스를 입으려고 준비했지만, 피팅을 위해 네 번이나 파리를 오갈 엄두가 안 나더군요. 당시 생 로랑, 라크루아 같은 쇼의 마지막은 늘 웨딩드레스 차지였는데, 도통 제 취향은 없더군요. 그때 깨달았어요. ‘직접 웨딩드레스를 만들어볼 수 있겠구나’라는 걸 말이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베라 왕 웨딩드레스다. 직원 세 명과 함께 칼라일 호텔 한쪽에 매장을 낼 때만 해도 이토록 큰 성공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그녀만의 드레스는 전혀 새로운 웨딩드레스 언어를 창조했다. 레이스와 비즈로 장식한 전통적 웨딩드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은 신부들은 일종의 비밀 코드처럼 베라 왕이라는 이름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화려하진 않지만, 이것이 아주 훌륭한 비즈니스라는 걸 말이에요. 저는 다시 한번 드레스 공방에서 새로운 교육을 받기 시작했죠. 드레스를 완성하는 모든 단계를 익혔어요.”
고객을 일대일로 상대하며 일생일대에 가장 중요한 옷을 완성하는 것만큼 고도의 집중력과 세심한 시각을 필요로 하는 일도 없었다. 호기심도 많고 배우는 걸 좋아하는 그녀는 기꺼이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그동안 쌓아온 패션 교육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보그>에서는 중요한 걸 고르는 편집 능력을 배웠어요. 그리고 랄프로렌에서는 스스로 확신을 갖고 1인치도 움직이지 않는 리더의 모습을 배웠죠. 모든 것이 제게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도전은 웨딩에서 끝나지 않았다. 10년 후 레디 투 웨어를 선보였고, 이제 베라 왕이라는 이름이 탁월한 취향의 여성에게 신뢰를 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여성들에게 제 진실이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무엇을 하든 말이죠. 비록 제 옷을 살 수 없어도 제 작업을 이해하고, 동질감을 느끼길 바랍니다. 저는 아주 긴 여정과 도전을 거쳐왔습니다. 그들에게도 그 용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두 딸에게도 매일 이런 용기를 전하는 디자이너답게 진지하게 자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제 작업이 현대적이고, 도전적이며,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자기 스타일을 지키는 것의 중요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여성 디자이너라는 건 그녀에게 중요한 키워드다. “남자 디자이너는 추상적이고 지적인 단계를 거치죠. 하지만 여성 디자이너는 아주 개인적 경험과 여성만 의 정서를 옷에 담을 수 있습니다. 도나 카란, 미우치아 프라다, 질 샌더 등등 우리가 완성한 세계는 분명 남자 디자이너와 다릅니다. 저는 가터벨트조차 제가 직접 입어봅니다. 얼마나 무거운지,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등등을 직접 느끼죠. 이런 곳에서 탄생한 디자인은 남자 디자이너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요. 무엇이 더 훌륭하다곤 할 수 없죠. 다만 다를 뿐이죠.” #미투 시대를 지난 지금, 이러한 여성적 동질감은 더 중요한 이슈다. “한국 여성들도 제 작업에서 이어지는 기다란 실을 느꼈으면 합니다. 그 실 속에서 모든 것이 탄생하죠.”
2013년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한 그녀는 이제 1년 뒤면 30주년 기념 쇼를 준비하는 거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교육은 멈추지 않는다. “결코 만족하지 않아요. 아직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해요. 더 뛰어난 테크닉을 구사하고 싶고, 더 영리해지고 싶고, 더 창의적이고 싶어요.” 서울 방문 경험 역시 그녀에게 또 다른 패션 교육이 될 듯했다. “모든 것이 새로워요. 보이 밴드도 멋있고, 쇼핑도 즐거웠어요. 한국 여성들을 만나는 것도 즐거워요. 그나저나 ‘준지’ 매장은 어디에 있나요? 그의 디자인을 좀더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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