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털털한 속사정
거뭇한 겨드랑이와 털이 수북한 다리를 뷰티의 금기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깎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수영 선수들에게 눈길이 가기 시작한 것은 열한 살 무렵이었다. 동네 수영장에서 종종 마주치던 10대 소년 소녀들은 중요한 경기 전에 꼭 행하는 의식이 있었다. 바로 여자 선수들이 주 챔피언십 등 경기 전까지 온몸의 털을 기르고, 경기 전날 밤 남자 선수들과 라커 룸에 모여 서로 제모를 해주는 것이었다. 체모를 제거하면 더 빨리 헤엄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원리는 쉽게 이해되나 사실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사실은 이러한 의식으로 젠더 구분이 모호해진다는 것이었다. 타월 아래로 언뜻 보이던 털이 수북하고 튼실한 허벅지가 경기 후엔 매끈하게 변해 있고, 가슴 근육 역시 광을 낸 대리석처럼 빛나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곤 했으니까.
최근 그때 그 수영 선수들이 자주 떠오른다. 오늘날 겨드랑이 털과 다리털을 밀지 않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젠더 유동성(Gender Fluidity)을 지향하면서 남성복과 여성복 사이의 구분이 흐릿해지고 있는 데다 여성복을 입은 남성 모델, 남성복을 입은 여성 모델은 이제 런웨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유동성이 ‘털 난’ 트렌드의 부상에 촉매제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난해 9월 파리에서 열린 존 갈리아노의 메종 마르지엘라 쇼가 대표적인 예다. 봄옷을 걸친 호리호리한 모델들은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메리 제인 슈즈 위로 쭉 뻗은 날씬하고 털이 많은 종아리를 보며 소년일 거라 짐작하다가도 밀레니얼 여성들은 몸에 털이 좀 났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모델의 성별이 다시 미궁에 빠져드는 식이었다. “5년 전부터 제모를 하지 않고 있어요.” 28세 아티스트 겸 모델 알렉산드라 마르첼라(Alexandra Marzella)는 인스타그램에 ‘자연 그대로’의 셀피를 업로드하는 것외에, 에카우스 라타 쇼에 서고 캘빈 클라인 캠페인 촬영을 하는 등 바쁘게 일하고 있다. “요즘엔 아주 가끔씩 제모를 해요. 물론 제가 내킨다면 말이죠.” 이러한 자유방임주의적 태도는 패리스 잭슨(Paris Jackson), 아만들라 스텐버그(Amandla Stenberg), 루데스 레온(Lourdes Leon) 등 젊은 스타들의 공감을 샀다. 특히 루데스의 경우 오랫동안 의무적 제모를 거부해온 엄마 마돈나와 행보를 같이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녀는 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낸 채 루아르(Luar)의 화이트 미니 드레스 차림으로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 시상식에 참석했다. 온라인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여성과 체모의 관계가 이처럼 오락가락 번복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1972년 ‘체모, 최후의 전선(Body Hair: The Last Frontier)’이라는 성명서를 잡지 <Ms.>에 게재한 해리엇 라이언스(Harriet Lyons)와 레베카 로젠블랫(Rebecca Rosenblatt)은 강경한 반(反)제모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그간 ‘털털한’ 페미니스트와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여성 모두 핑크빛 플라스틱으로 무장한 제모 업계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업에선 최근 생겨난 ‘이상적 여성성’을 유지하는 데 소비자들이 시간과 돈을 투자하도록 자극해왔다. 사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스커트를 입던 시절에는 오히려 다리털을 제모하는 이가 흔치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즈음 사용하기 쉬운 양날 면도기의 대대적 광고가 이루어졌고, 뒤이어 킹 캠프 질레트(King Camp Gillette)가 벨벳과 새틴 안감을 덧댄 모조 상아 패키지에 황금색 면도기를 포장해 ‘밀라디 데콜테(Milady Décolleté)’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놓았다. 이렇게 최초의 여성용 면도기가 탄생하면서 여성의 제모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메인주 베이츠 칼리지(Bates College)의 젠더학 교수 레베카 헤르치히 (Rebecca Herzig)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도 털이 없는 매끈한 피부가 미의 기준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단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미국 TV쇼 <비버는 해결사(Leave It to Beaver)>의 배경이 된 시절, 참전했던 군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와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미국 사회에서는 다시 젠더를 뚜렷이 구분하고 여성들이 그간 대신 수행하던 일을 돌아온 남성들에게 돌려주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1964년경 설문 조사에 따르면 15세에서 44세 사이 미국 여성의 98%가 주기적으로 다리털을 제모한다고 답했다.” 헤르치히의 저서 <뽑다, 제모의 역사(Plucked: A History of Hair Removal)>의 한 구절이다.
라이언스와 로젠블랫이 일으킨 제2의 물결, 즉 기존 관행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반발은 전후 여성들에게 과도하게 여성성을 강요함으로써 촉발된 직접적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요즘 여성들이 체모를 수용키로 한 것은 브라질리언 왁싱과 관련된 모든 압제에 대항한 반란에 가깝다. 오늘날 텀블러에는 여성의 제모 거부를 지지하는 밈(Meme)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나, 이들이 내포한 질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성들은 항상 털 없이 매끈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단 말인가?
놀랍게도 새로 론칭한 여성용 제모용품 브랜드 중에도 이러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가장 화제가 된 ‘플라밍고(Flamingo)’는 남성용 그루밍용품으로 잘 알려진 ‘해리스(Harry’s)’에서 내놓은 브랜드로, 최상의 품질, 합리적 가격의 면도기와 보디용품, 왁싱 키트 등을 판매한다. 플라밍고는 ‘원치 않으면 사지 말라(Take it or leave it)’는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소비자에게 물건을 판매해야 하는 기업으로서 상당히 파격적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신생 면도기 브랜드 ‘빌리(Billie)’의 공동 창립자 조지나 굴리(Georgina Gooley)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제모하고자 하면 하고, 원치 않으면 하지 마라. 이것이 우리의 브랜드 메시지다.” 2017년 11월 처음 브랜드를 선보이기 이전부터 굴리는 텀블러 밈이나 제모하지 않는 젊은 스타들의 인스타그램에 환호가 쏟아지는 현상에 주목했다. “이러한 여성들은 그동안 금기에 힘을 싣고 여성들이 늘 완벽하게 제모 상태여야 한다고 압박을 가하던 광고에 반감을 갖고 있었어요.” 굴리가 설명했다. “이들이 자신의 몸을 가지고 뭘 하든 그건 그들의 자유죠.”
일부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정의 자체에서 근본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있다. 그녀들은 적어도 모든 순간에 스스로를 여성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뉴욕 기반 스케이트보드 겸 스트리트 웨어 브랜드 ‘브루하스(Brujas)’의 공동 창립자 아리아나 길(Arianna Gil)은 1년에 네 번 다리를 왁싱한다고 밝혔다. 그럼으로써 스스로가 가진 유동성에 상응하는 ‘다양한 외양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길은 매끈한 피부는 늘 여성스러운 것으로 해석되는 반면 ‘군데군데 털이 난’ 피부에 대한 해석은 모호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자신이 털을 완전히 기르면 갈리아노가 마르지엘라 쇼를 통해 찬사한 성적 혼동과 긴장감을 초래한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어릴 적 내가 수영 선수들을 관찰하며 느낀 짜릿함의 원천이기도 했다.
헤르치히는 “나는 내가 원할 때 제모할 거예요”라는 외침을 과거 페미니스트들의 슬로건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오히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절대 원칙’을 거부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목소리로 봐야 옳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이른바 ‘적절한’ 행동을 정의한 이가 무장한 여성 동지들인지, 여성의 자유를 되팔려는 기업인지는 중요치 않다. “현재 상황을 분명히 설명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에요.” 헤르치히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제 여성들은 브랜드로 하여금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것을 요구하고, 그 기대는 점점 더 커질 거라는 거죠.” 자, 깎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당신 몫이다.
- 에디터
- 이주현
- 글쓴이
- MAYA S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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