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만의 외출
때는 서기 2003년 1월. 가수 민해경이 1982년에 노래했던 “서기 2000년이 오면 우리는 로케트 타고”로부터 3년씩이나 더 지난 때였습니다. 당시 ‘론 커스텀’이라는 남자 옷을 가로수길 매장에 선보이던 디자이너 정욱준, 그때 <에스콰이어> 패션 에디터였고 지금은 삼성그룹 패션 사업부의 박소영 부장, 같은 잡지 패션팀에서 일했고 현재 프리랜스 패션 전문가 민병준 그리고 <GQ>의 저. 이렇게 4인 1조를 이루어 파리 남성복 패션 위크에 입성했습니다. ‘오리지날’ 헬무트 랭이 여전히 맹활약하던 시절의 헬무트 랭 쇼(선물로 놓인 랭의 새 향수를 보며 ‘심봤다!’를 외쳤죠)부터 유리로 된 시트로엥 전시장에서 열린 루이 비통 패션쇼(전 좌석에 놓였던 캐시미어 스카프는 어제까지도 제 어깨에서 나부꼈습니다)까지. 바지 입은 남자 모델들의 피날레 행렬이 여자 모델들이 일으키는 치맛바람에 비해 더 세련됐다는 감흥을 얻으며 취재하던 시절입니다.
바야흐로 2019년 1월. 저는 2019 F/W 파리 남성복 패션 위크 출장을 떠났습니다. ‘여성 패션 전문지에서 굳이 남성복까지?’라고 시대착오적 말씀을 하는 분은 이제 없을 것으로 압니다. ‘젠더’ 이슈는 시간이 갈수록 굳건해지고 이로 인해 여성복과 남성복이 한 개의 컬렉션으로 통합되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또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 것 역시 흔한 일입니다. 남자 친구의 재킷을 걸친 듯한 여자의 보이프렌드 재킷(베트멍이 시작한), 반대로 여자 친구의 재킷을 걸친 듯한 남자의 걸프렌드 재킷(구찌로부터 촉발된)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보그> <W> <엘르> <하퍼스 바자>처럼 여자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하이패션 전문지 표지에는 한 달이 멀다 하고 남자가 얼굴을 내밀고 있죠. 발렌시아가의 경우엔 지난해 2월, 여성복 외에 남성복과 아동복까지 <보그> 표지에 실리길 원했습니다. 또 루이 비통의 버질 아블로처럼 남성복을 위한 남자 디자이너들을 <보그>는 꾸준히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패션 세상에서 성별을 나누는 행위가 크게 효력도 의미도 없어진 시기에 저는 패션 전문가 집단인 <보그>가 여성복과 남성복 패션 위크를 균형 있게 취재하는 것이 시의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16년 만에 파리 남성복 패션 위크 출장을 떠난 이유가 그것입니다. 16년 만에 취재한 파리 남성복 패션 위크는, 저만의 맹랑한 착각이지만, <보그 코리아> 편집장이 이윽고 파리에 떴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더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더군요. 하하. 런던에서 패션쇼를 발표하던 조나단 앤더슨이 파리로 건너왔고(로에베까지 두 개의 쇼를 한 도시에서 발표하는 디자이너 되시겠습니다), 여성복과 남성복을 아우르며 패션 하우스 네 번째 데뷔탕트를 선보인 셀린의 에디 슬리먼은 패션 위크 대미를 장식하는 남성복 쇼장을 콩코르드 광장에 따로 마련했으며, 프랑스 남부에 이어 파리로 돌아와 남성복을 공개한 자크무스, 밀라노에서 파리로 쇼를 선보이러 온 질 샌더… 게다가 지난 시즌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버질 아블로의 루이 비통, 킴 존스의 디올 맨, 언더커버와 협업한 발렌티노, 그리고 프레타 포르테에서 오뜨 꾸뛰르, 다시 파리 남성복 패션 위크로 메뚜기처럼 일정을 옮긴 베트멍까지. 2019 F/W 파리 남성복 패션 위크는 여성복 패션 위크만큼 전에 없이 일정이 꽉 찼습니다.
여러 패션쇼를 동행한, 저의 ‘모교’인 <GQ> 패션 디렉터 박나나 차장의 맛깔난 양념 같은 이야기와 함께 패션쇼를 취재하다 보니, 여러 흥미로운 장면과 순간이 채집됐습니다. 특히 <보그> 앵글에서 솔깃했던 것은 여성복이 여러 런웨이에서 빈번하게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사카이는 카이아 거버가 쇼의 시작을 열 정도였습니다. 62벌의 옷 중 첫 번째와 마지막 옷을 여자 모델이 입고 나왔습니다. 그 장면만으로는 여성복 컬렉션이라고 우겨도 무방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오드리 마네이를 시작으로 젠틀 우먼들이 남자들의 보조를 맞춘 아미, 역시 여자와 남자들이 함께 나온 겐조, 루이 비통의 지지 덕분에 더 풍부한 남자 옷과 여자 옷을 발표한 오프화이트 등등. 예의 <GQ> 패션 디렉터는 여성복이 이 정도로 많이 등장한 시즌은 처음이었다고 하더군요.
무엇보다 16년 전 파리 패션 위크 이후, 단 한 차례도 취재하지 못한 정욱준의 ‘준지’를 비로소 보게 됐고,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서 모델로서의 강동원이 등장하고 섬섬옥수로 자개를 장식했던 우영미 쇼는 실로 또 몇 년 만의 재회인지요. 게다가 한섬의 대표 레이블인 시스템은 팔레 드 도쿄 지하에서 남자 옷과 여자 옷의 대결이라는 기획으로 파리 데뷔를 거창하게 마쳤습니다. 루이 비통 쇼를 위해 버질 아블로가 만국기를 여러 옷에 ‘게양’하고 나서 발견된 태극기만큼 꽤 감격스러웠던 순간들이죠.
이에 못지않은 몇 가지 기쁜 소식을 더 담아왔습니다. 절대적 우아함이 무엇인지 웅변 중인 지방시는 다가올 7월엔 단독 남성복 런웨이 쇼를 발표하기로 했고, 보다 젊어진 에르메스 남자 옷은 11월 언젠가 서울 모처에서 대대적 패션쇼를 열기로 했습니다.
다가올 6월과 7월부터는 <보그> 프린트와 디지털 에디터들이 남성복과 꾸뛰르와 여성복으로 이어지는 도시별 패션 위크에 골고루 파견돼 여러분께 ‘패션 생생 정보 통신’으로서 임무를 완수하면 어떨지 고민 중입니다. 그리하여 여성복과 남성복 패션쇼장 안팎에서 일어날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를 디지털로 실시간 타전하며, 그 유명한 ‘보그 컬렉션 북’은 남성복까지 아우르는, 제대로 된 패션 위크 북으로 업그레이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여성복 패션 위크 역시 저는 폭을 넓혀 취재할 계획입니다. 파리만 고집하지 않고, 좀더 일정을 열어놓은 채 다른 패션 도시로도 출장을 떠나려고 합니다. 새로운 디자이너가 들어와 패션 에디터들을 슬슬 애태우기 시작한 보테가 베네타의 첫 컬렉션은 최근 꼭 점검해야 할 컬렉션 중 하나로 꼽히는 데다, 역시 새 디자이너를 맞아 인기를 끌고 있는 마르니, 다시 승승장구 중인 프라다, 조국으로 돌아간 구찌, 스캔들 메이커 돌체앤가바나 등이 있는 밀라노도 그리우니까요. 게다가 뉴욕과 런던의 젊음을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요.
패션쇼가 모여 한 주를 이루는 패션 위크는, 그리하여 네 개의 패션 위크가 이어져 패션의 한 달을 구성하는 것은 패션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이자 ‘일’입니다. 이제 남성복까지 균형 있게 취재해 여러분께 디지털과 프린트를 통해 타전하는, 명실상부한 패션 바이블 <보그>가 되겠습니다.
패션의 진짜가 진짜 패션을 만듭니다. 신광호의 <보그>가 바로 그것임을 여러분은 확인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어쩐지 ‘감사합니다’를 붙이고 싶은 맺음이네요. 감사합니다!
- 에디터
- 신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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