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거장의 집
책 <알레산드로 멘디니: 일 벨 디자인(IL Bel Design)>의 저자인 최경원은 멘디니와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이제는 영면에 든 알레산드로 멘디니를 추억하며 그의 집을 소개한다.
2013년 봄, 알레산드로 멘디니 선생을 만나러 밀라노에 있는 그의 아틀리에를 찾았다. 그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책 출판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1년에 한 번 있는 밀라노 가구 박람회 기간이라 바쁜 상황임에도 흔쾌히 면담 시간을 잡아주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틀리에로 향했다. 4월, 밀라노의 햇살은 먼 길을 찾아온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멘디니 선생도 우리를 봄 햇살처럼 맞이했다.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갑자기 아틀리에 위쪽으로 가자고 했다. 큰 창고처럼 생긴 아틀리에 위쪽에 아파트가 있는데, 위쪽 아파트와 아틀리에는 완전히 단절된 구조였다. 아틀리에 천장으로 작은 계단만 있었다. 마치 천국으로 가는 계단 같았다. 멘디니 선생이 우리를 그 계단으로 인도해 올라가니 그가 사는 아파트 공간이 나왔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호빗의 집 같았다. 거장의 명성에 전혀 걸맞지 않은 매우 작은 집이었다.
아파트는 크게 거실과 서재, 침실, 식당으로 나뉘었다. 모든 공간이 멘디니 선생이 혼자 기거하기에 적합한 규모였다. 우르르 올라간 우리를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진짜 감동은 집 안을 구경하면서부터였다. 아래쪽 아틀리에에도 서재가 있었는데, 집에도 서재와 거실이 따로 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알레산드로 멘디니를 디자이너로만 알지만 그는 50대 후반까지 유명 잡지사의 편집장이었다. 그의 이력에 어울리게 거실에도 많은 책이 정갈하게 꽂혀 있었다. 그림과 화사한 패턴의 의자가 책에 둘러싸인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했다.
작은 소품과 그림이 소박하고 다소 허름한 거실을 화사하게 바꾸는 것이 신기했다.
거실 바닥과 그림이 점묘 이미지로 되어 있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알레산드로 멘디니를 대표하는 점묘 스타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림에 맞추어서 인테리어를 한 것 같았다. 조화를 추구할 줄 아는 디자이너의 센스가 느껴졌다.
멘디니스러운 재기 발랄한 소품과 그림도 눈길을 끌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예술적이면서 멘디니 선생이 평소 추구하는 이미지였다. 삶 속에 디자인관이 스며들어 있음을 볼 때, 그의 디자인은 억지로 꾸민 게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온 게 아닌가 싶었다.
작은 거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제법 넓은 서재가 나왔다. 거실보다 좀더 책이 많이 있었다. 책은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진열용이 아니라 계속 들춘 흔적이 역력했다.
책상은 정갈했지만 부지런히 책이 오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적인 체하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정말로 지적인 디자이너로 다가왔다. 조그마한 스탠드가 참으로 정겨웠다. 책상 뒤 창문에서 나온 빛이 서재의 핑크 벽을 비추었다. 서재 곳곳이 멘디니답게 경쾌하고 발랄했다.
시간을 두고 책을 살펴보고 싶었다. 그러면 멘디니 선생의 생각도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으로 안내한 곳은 정말 보여주기 어려운 침실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여성을 수놓은 큰 천이 걸려 있었다. 멋졌다. 멘디니는 어느 작가가 선물로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냥 그림이 아니라 천에 드로잉을 프린트한 것이라 더 특별해 보였다.
반대쪽 벽면으로 시선을 돌리니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멘디니가 1980년대에 실험적으로 디자인한 가구가 놓여 있지 않은가. 직접 보니 멘디니 특유의 색감이 눈을 휘감고 들어왔다. 가구 덕분에 방 안 분위기가 매우 밝고 즐거웠다. 가구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그가 그린 그림뿐 아니라 화가인 딸의 그림도 있었다. 아버지처럼 즐겁고 화사한 그림이었다. 딸에 대한 애정을 집 안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침실에서 반가운 디자인을 하나 더 발견했다. 침대 옆에 1980년대 중반에 실험적으로 디자인한 귀한 조명이 있지 않은가. 생산되지 않아서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작지만 아주 탄탄한 조형성을 지닌 조명. 직접 보다니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멘디니 선생이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 작은 공간에 자리한 디자인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일단 정갈하고 깨끗한 것은 기본이고, 벽면을 가득 채운 ‘100% 디자인’ 시리즈를 볼 수 있었다. 오래된 사진으로는 본 적 있지만 실물은 처음이었다. 이 100개의 병이 풀 세트로 진열되어 있으니 실로 장쾌한 풍경이었다. 그 아래에 있던 작은 소품 중 프로토타입 하나는 지금 내 진열장에 있다. 영광스럽게도 식당에 들어서자 멘디니 선생이 선물로 주셨다.
천장에 붙어 있는 샹들리에도 중요한 디자인이다. 그가 한창 활동할 시기에 실험적으로 제작한 몇 안 되는 초기 디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집기는 정말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이케아에서 구입한 듯한 의자는 정말 “대장간에 식칼이 없다”는 속담을 생각나게 했다. 프루스트 의자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러나 그런 소박함이 있기에 벽에 걸린 표현주의적인 그림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최경원(성균관대학교 디자인학과 겸임교수)
- 글
- 최경원(성균관대학교 디자인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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