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미와 희정
“여름이 다시 온다. 그리고 그 모든 여름의 추억도.” ─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中
HEE JUNG PARK
박희정을 처음 만난 건 지난해 이맘때다. <보그> 패션 화보 촬영 하루 전, 뉴욕에서 급히 모로코로 날아오는 비행기를 예약한 뒤 그녀에게 전자 항공권을 메신저로 보냈다. 당장 캐리어에 짐을 싸서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로 날아가야 하는 긴박한 일정이었지만 박희정은 그저 고맙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모로코에 도착한 후 짐이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짜증 한번 내지 않는, 그야말로 천사표. 게다가 반나절이 지난 뒤 쓱 미소를 띠며 혈혈단신 공항에 가서 캐리어를 찾아왔다. “모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어요. 현재를 즐기고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후회하지 않도록 제대로 보여주자는 마음으로 임하면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죠.” 이런 흔들림 없는 성격이야말로 오랫동안 살인적인 해외 스케줄을 견디게 하는 에너지였다. “외국에서 주로 일하다 보면 짜증 나는 일도 생기죠. 하지만 저는 시간이 지나면 그냥 잊고 말아요. 그러고 나면 감사한 마음만 남더라고요.” 2011년 21세에 서울 패션 위크로 데뷔한 박희정의 전성기가 비로소 찾아왔다. “데뷔할 때는 잡지 촬영도 많이 없었어요. 그래서 싱가포르로 건너가 일했죠. 그러다 밀라노에서 몇 개월 활동한 뒤 스물다섯 살 때 한국에 다시 왔어요.” 그녀에게 ‘터닝 포인트’가 된 사건은 2017 F/W 루이 비통 독점 캐스팅이었다. “런웨이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쇼에 선다는 게 실감이 안 됐어요. 운이 안 좋으면 ‘익스클루시브’라도 런웨이에 못 선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으니까요. 네 도시 중 마지막인 파리, 그것도 마지막 날에 패션쇼를 여는 루이 비통 쇼에 서지 못하면 그 시즌은 어떤 쇼에도 서지 못한 셈이죠. 쇼에 성공적으로 서고 난 뒤, 다음 시즌 캐스팅을 위해 정말 열심히 준비했어요.”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봐준 니콜라가 해준 조언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박희정은 말한다. “처음 만난 캐스팅에서 워킹을 한 저에게 좋은 에너지가 있다고 말해주었죠. 해외에서 큰 일을 하기 전이라 제게도 불안감이 있었을 때였는데 그가 해준 말이 제일 힘이 되고 기억에 남아요.” 쌍꺼풀 없이 위로 치켜 올라간 담백한 눈매, 살짝 튀어나온 도톰한 입술에 연한 눈썹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다. 이런 개성 넘치는 얼굴로 지난 몇 시즌 동안 루이 비통뿐 아니라 버버리, 막스마라, 릭 오웬스, 알렉산더 왕의 쇼는 물론 지방시, 펜디, 고티에 꾸뛰르 쇼와 남성복 컬렉션까지 섭렵했다. 모델스닷컴 ‘핫리스트’에 오른 건 1년도 더 된 일이다. 게다가 베르사체, 마크 제이콥스, 리바이스 글로벌 캠페인도 촬영했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은 역시 화보에서 빛났다. 이탈리아, 일본, 영국 등 전 세계 <보그> 촬영을 하며 이름을 알린 것이다. 각 화보의 공통점을 찾자면? 포토그래퍼가 그녀의 얼굴에 집중했다는 사실. 박희정은 모델계의 ‘코리안 파워’를 이끌고 있는 선후배들과 함께 지금은 뉴욕에서 활동 중이다. “유명 브랜드나 어마어마한 잡지 촬영장에 갔을 때 한국인 모델이 많으면 ‘아, 우리가 잘하고 있구나’라고 느껴요. 한국인 모델들이 함께 잘되는 건, 단순히 국가로 묶이는 게 아니라, 각자 다른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이에요.” 한국 모델들과는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격려하며 시너지를 얻는 사이다. “지금 퀸스 서니사이드에서 지내고 있어요, 가까운 곳에 소현이, 윤영이가 있고 호연이도 멀지 않은 브루클린에 머물죠. 다 같이 모여 한국 음식을 해서 먹고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곤 해요. 오늘 함께한 보미 역시 해외에서 만나 친해진 동생이죠.” 코리안 파워의 주역 중 한 명인 박희정은 일종의 사명감도 느낀다고 고백한다. “선배 모델들이 해외에서 활동을 먼저 했기에 후배인 우리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어요. 구글 맵도 없을 때 지도를 보며 캐스팅 현장에 다녔죠. 당시 캐스팅 디렉터나 브랜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보를 얻곤 했어요.” 아울러 기회가 된다면 자신이 겪은 일을 제대로 전달하길 원한다. “그래서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통해 모델이 되고 싶은 친구들과 팬들의 질문에 답하며 소통하고 있어요.” 지난 시즌 무려 24개 런웨이에 선 박희정의 목표는 생각만큼 높지 않다. “유명인들과 촬영을 자주 하거나, 뭐 그런 일이 아니에요. 감정이 담긴 사진을 통해 모델로서 박희정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BOMI YOUN
전라북도 고창에서 자란 소녀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겨울방학에 일을 저지른다. 서울로 올라가 모델 아카데미에 등록하고 싶다며 엄마에게 조른 것이다. “서울에 가면 방도 구해야 하고 신경 쓸 게 아주 많았어요. 그래서 직접 아르바이트하며 돈을 모으기로 했죠. 베이커리, 음식점 근무는 물론, 솜사탕도 팔아보고 장어집에서도 일했어요. 고창이 장어로 유명하거든요.”
그렇게 윤보미는 부모님 설득에 성공해, 모델 아카데미를 거쳐 대학 역시 모델과에 진학하며 말 그대로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하게 되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연기 쪽에도 기웃거렸지만 자신에게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 그러자 ‘딱 할 수 있는 만큼의’ 모델 일만 하자고 다짐했다. “오늘 <보그> 표지 촬영을 위한 자료 사진을 봤어요. 그중에 호수 이미지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겁을 먹고 왔어요(웃음). 생각보다 물이 차가워서 살짝 긴장했는데 결과가 잘 나오고 또 스태프들께서 잘한다고 용기를 주셔서 즐겁게 촬영했어요.”
작고 올망졸망한 코와 입, 눈썹 위로 떨어지는 뱅헤어를 한 보미는 귀여운 시추를 떠올리는 이미지의 소녀다. “해외 스태프들이 제 앞머리를 특히 좋아하더라고요. 본인에게 맞는 헤어스타일을 찾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죠.” 지금이야 발렌티노 쇼의 오프닝 모델로 등장하거나 여러 해외 빅 쇼에 서고 있지만, 사실 해외 진출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음식도 안 맞고 친구,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걸 참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계속 해외에 진출하길 권유했어요. 그래서 우연히 뉴욕 에이전시와 미팅했죠. 일단 계약은 했는데 미국 비자 받기가 어려워서 뉴욕에 못 가는 상태가 됐어요. 그러던 중 런던 패션 위크 일주일 전 JW 앤더슨에게 연락이 왔어요. 계약할 테니 바로 오라고 말이죠.” 그리하여 보미는 부랴부랴 런던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해외에서 데뷔하게 된 거죠.”
지금은 ‘2019년 주목해야 할 신인’으로 거론되는 그녀의 가능성을 미리 알아본 건 스타 캐스팅 디렉터 애슐리 브로카우. 2019 S/S JW 앤더슨 쇼를 시작으로 시몬 로샤, 버버리, 펜디, 디올, 끌로에, 로에베까지 그야말로 첫 시즌에 ‘대박’이 터졌다. “예전부터 꿈의 무대였던 프라다 쇼에 2019 F/W 시즌에 처음 서게 됐어요. 선배들에게 듣기로는 캐스팅에 붙어도 쇼에 서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들었기에 기대 안 하고 갔죠. 그런데 프라다 쇼에 서게 되고 프라다 리조트 쇼까지 이어서 캐스팅되자, 갑자기 정신이 바짝 들더라고요.” 자신이 지금껏 어리광만 피웠던 것 같다고 보미는 덧붙였다. “해외 무대에 진출하면 당연히 뉴욕에 머물며 일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일이 있을 때만 출국했다가 돌아오곤 했어요. 다가올 2020 S/S 시즌을 마친 후에는 가을부터 뉴욕에 쭉 머물며 일하려고 해요.” 그녀가 마음을 다잡은 올 상반기 성적은 대단했다. 리한나의 코스메틱 브랜드 펜티 뷰티(Fenty Beauty) 캠페인 촬영에 이어 마이클 코어스, 몽클레르, 디올, 미우미우, 베르사체 등의 런웨이를 걸었다. 또 JW 앤더슨, 시몬 로샤, 버버리처럼 그녀에게 또 러브콜을 보내는 브랜드도 수두룩했다. 여기에 펜디×젠틀몬스터 캠페인 모델, <로피시엘> 커버와 중국과 일본 <보그> 화보까지. 보미에게 엔진이 있다면, 지금 그녀는 초고속 전력 질주 중이다.
보미는 포즈나 표정 연기, 워킹이 모델의 필수 조건은 아니라고 전한다. “일하기 위해선 기본적인 영어 회화가 필수였어요. ‘고개를 내려라(Chin Down)’ 정도의 영어는 듣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대기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묵묵히 인내하는 것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메이크업을 받지 않고 4시간 이상 기다리는 건 일상이죠. 그 시간 동안 혼자 밥 먹고 스마트폰을 보며 견뎌야 해요.” 힘들고 지칠 때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이런 마음가짐이다. “모델 일을 하고 싶어 시작했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기까진 힘든 과정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저 역시 ‘생초짜’부터 시작했으니까요.” 모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느끼는 소중함이 더 잘하고 싶은 의지와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 에디터
- 손은영, 이소민(sub)
- 포토그래퍼
- 홍장현
- 모델
- 박희정, 윤보미
- 헤어
- 김승원
- 메이크업
- 박혜령
- 세트 스타일링
-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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