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케시 익스프레스
난생처음 아프리카 대륙을 밟았던 2008년 여름의 마라케시. 파란 하늘과 테라코타 건물만 눈에 들었다. 하지만 2019년 마라케시는 최첨단 멋쟁이들의 북아프리카 패션 메카였다.
“베르베르 스타일의 테라코타 성곽 뒤로 보이는 야자수와 저 멀리 보이는 제벨 툽칼의 설경이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마라케시. 아틀라스 아래 천고의 매력을 간직한 신비의 붉은 도시에서 만난 사파리풍 서머 룩.”
11년 전 내가 마라케시에서 촬영한 패션 화보 전문이다. 공해 없이 맑은 하늘과 개발되지 않은 도시의 재래식 풍경은 마라케시만의 매력이었다. 나 같은 아시아인은 찾기 힘들 만큼 동양인 관광이 적었던 그땐 로케이션 헌팅이나 촬영을 위해 가는 곳마다 몇몇 사람이 동양인의 지갑을 노리는 통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상점이나 도로 상황은 불편하고 위험했다. 하지만 모든 게 ‘빠르고’ ‘빨리빨리’여야 좋다고 믿는 한국인 기질을 버리면 특유의 나른하고 느긋한 분위기에 빠지게 될 것이다. 2008년 이후 화보 촬영을 위해 오지를 탐방해봤지만 마라케시만큼 개발되지 않은 ‘천고의 매력’과 ‘앤티크한 멋’이 풍기는 장소는 드물었다. 그 새파란 하늘과 잔잔하게 펼쳐진 붉은 갈색 흙 건물은 꿈의 한 장면처럼 아른거렸다.
그리고 2019년. 디올 하우스의 초대로 2020년 크루즈 컬렉션을 위해 마라케시를 다시 방문하게 됐다. 그동안 마라케시는 좀더 안락한 관광지로 변해 있을 테고, 나 역시 70년대 팝송 ‘마라케시 익스프레스’ 가사의 태평스러운 히피처럼 여유롭게 도시를 즐길수 있진 않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공항에 도착한 나를 맞은 건 한국어가 제법 유창하고 K-팝과 한국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좋아하는 젊은 가이드 아가씨였다!
모로코는 특유의 분위기와 존재감 덕분에 디올뿐 아니라 패션 역사에서 늘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특히 유럽 귀족과 예술가의 휴양지로 디올과도 아주 오랜 인연이 있다. 크리스챤 디올을 계승한 디자이너들은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도시와 함께한 친밀한 관계를 자신만의 색채로 재해석해왔다. 마르크 보앙은 ‘젤라바’, 지안프랑코 페레는 ‘랑데부 아 카사블랑카’라 불리는 아이보리 실크 팬츠, 존 갈리아노는 헤나 문신(메디나의 유명한 제마 엘프나 광장에서는 검은 부르카를 입은 베르베르 여인들이 관광객에게 헤나 문신을 해준다)을 연상시키는 자수 장식 튤 보디수트를 선보인 기억이 차례로 떠올랐다. 특히 모로코에서 끊임없이 영감을 받았던 이브 생 로랑은 1960년 ‘마라케시’라 이름 붙인 아이보리 울 코트로 뉴 디올 룩을 선보이지 않았나(쇼 기간 동안 바히아 궁에 전시됐다). “길모퉁이마다 놀랄 만큼 생생한 핑크와 블루, 그린과 퍼플 카프탄 차림의 남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이 말했듯 화려한 모로코 색채와 장식은 그에게 엄청난 영감을 제공했다. 한때 아티스트 자크 마조렐 소유였던 오래된 아르데코풍 빌라와 정원에서 휴가를 보내던 그는 디자인을 통해 아프리카 대륙의 특징적 스타일을 선보였다.
이제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 시대의 디올로 돌아오자. 캘리포니아 칼라바사스(Calabasas) 사막, 파리에서 멀지 않은 샹티이(Chantilly) 영지의 마구간 등에 이은 디올의 마라케시 크루즈 쇼에서 세계 최고의 패션 유람 쇼를 발표하겠다는 디올 하우스의 의지가 명명백백히 드러났다. “마라케시는 지중해와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도시로 다양한 문화가 만나 어우러지는 이국적 장소입니다. 주제인 ‘커먼 그라운드’ 모티브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집단이 공통적으로 지닌 의견이나 관심사를 의미하죠.”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아프리카 문화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권 출신의 여러 아티스트와 장인들과 함께 컬렉션을 완성했다. 쇼가 열린 엘 바디 궁은 때 묻지 않은 테라코타 건물이 조화를 이뤘다. 소나기가 지나간 후(지난 크루즈 컬렉션의 우천을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게다가 어떤 가림막 없이 뻥 뚫린 야외 런웨이!) 석양 풍경이 끝내줬던 엘 바디 궁 광장. 16세기 이곳에 살던 왕족의 여흥을 위해 만들어진 커다란 풀장 중앙엔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풀장을 에워싼 사각형 런웨이는 베르베르 스타일의 거친 카펫이 깔려 있었고, 모로코 전통 공예로 완성한 패브릭과 쿠션 장식의 객석이 술탄 왕족의 응접실처럼 극적으로 연출됐다. 수마노(Sumano) 협회는 모로코 부족 여성의 공예 기술 보전을 목표로 하는 단체로, 쇼를 위해 그림이 그려진 세라믹 그릇을 포함한 각종 도자기와(공식 런치와 디너, 애프터 파티 같은 행사에서 크루즈 여행의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핸드메이드 패브릭 쿠션, 의상을 선보였다.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타악기와 관악기로 구성된 전통 모로칸 음악이 연주되자 모델들이 일렬로 나왔다. 한마디로 아프리카 자체가 아닌 서로 다른 여러 문화가 함께 어울려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통점을 찾는 과정처럼 보였다. 오프닝부터 무대를 압도한 왁스 프린트는 아시아와 유럽에서 탄생해 아프리카까지 퍼져 나간 패브릭이다. 아프리카는 빼어난 장인 정신과 프린트 기법을 갖췄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프리카 전역에서 통용되는 왁스 프린트는 각각의 디자인이 여러 국가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기에 주로 여자들이 비언어적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디올은 럭셔리 패션 하우스 최초로 ‘유니왁스’(100% 아프리카산 원단을 취급하는 공장)와 협력했고, 이렇게 탄생된 왁스 패브릭은 이번 컬렉션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됐다.
수개월 전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그녀의 정글 창조물, 이상한 식물, 타로 카드 암시 등 디올 아카이브를 유니왁스 원단에 적용해 각각을 새로 디자인하고 적절한 색채로 인쇄했다. 황토색, 가닛, 네이비, 혼합된 에메랄드, 또 다른 네이비에는 거대한 사자, 날개 달린 신화 속 생물, 빛나는 새, 타로와 관련된 숫자와 단어에 대한 흥미로운 언급이 포함됐다. 완성된 유니왁스 덩어리는 수트와 점프수트, 가운, 드레스와 커다란 케이프의 기초를 형성했다(100% 아프리카산 원단과 제조 기법을 활용했기에 현지 산업과 경제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모로코의 여성 장인으로 구성된 섬유 및 도자기 협회 수마노는 첫 번째 룩의 장식 무늬 코트를 포함, 많은 태피스트리 조각을 만들었다. 아프리카계 미국 예술가 미칼린 토머스(Mickalene Thomas)와 자메이카와 영국계 혼혈 디자이너 그레이스 웨일스 보너는 각각 디올 뉴 룩을 재해석했다. 넬슨 만델라의 셔츠로 유명했던 아비장의 디자이너 무슈 파테오(Monsieur Pathé’O)는 만델라의 얼굴을 유니왁스 셔츠에 장식하는가 하면 카리브해 출신 마틴 헨리(Martine Henry)와 나이지리아 출신 다니엘라 오세마데와(Daniella Osemadewa)는 스티븐 존스와 함께 모자나 터번을 완성했다. 게다가 모로코 출신 작가 타하르 벤 젤룬(Tahar Ben Jelloun)의 책에서 발췌한
문구 프린트까지. 다양한 문화권의 예술가와 협업은 100벌이라는 방대한 컬렉션을 완성했다.
자, 이 모든 것은 협업의 즐거움과 패션 산업의 순환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진짜 거래가 필요합니다”라고 키우리는 강조한다. 그녀만의 메시지이자 페미니즘을 향한 끈질긴 비전이 아닐까. 그녀는 독창적인 나라의 문화유산을 총천연색 경험과 일상의 가능성으로 바꾸어놓았다. 신화와 현실 사이에 떠 있는 요술 양탄자와도 같은 도시, 옷, 협업, 문화유산, 아카이브, 역사… 옷에 가려진 이야기마저 완벽했던 2019년 초여름. 11년 만의 나의 모로코 패션 이야기는 천일야화의 마법과 다를 게 없었다.
- 에디터
- 손은영
- 포토그래퍼
- Inès Manai, Raphaël Dautigny, Nadine Ijewere, Sophie Ca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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