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여행법
유럽 국가를 팩맨처럼 쓸고 다니는 주마간산식 일주는 어느덧 가장 촌스러운 여행 방식이 됐고, 로컬 문화를 즐기자는 취지로 시작된 에어비앤비는 임대업자의 부동산 놀이터로 전락했다.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 여행의 긴장과 흥분을 되찾을 수 있을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행을 별로 즐기지 못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나도 한때는 월요일 아침마다 땡처리 항공권을 검색하는 신체 건강한 직장인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출장 기간 앞뒤로 연차휴가를 붙이거나 일부러 환승을 미뤄 스톱오버를 신청하는 등 어떻게든 꼼수를 부려 밖으로 나갈 핑계를 찾곤 했다.
지난겨울 식도락 여행차 떠난 로마에서는 내 안의 여행 세포가 거의 다 죽어버렸음을 실감했다. 요즘 유행하는 ‘사는 여행’을 컨셉으로 로마에서의 일주일을 계획한 나는 누가 관광객 아니랄까 봐 현지인 코스프레에 열을 올렸다. 로컬인이 주로 찾는 트라스테베레 지구에 숙소를 잡고, 이탈리아의 SSG라는 ‘이탈리’에서 갓 뽑은 생면을 구입하고, 로마에서 100km가량 떨어진 오르비에토에서 수제 맥주를 마시는 등 한마디로 ‘콜로세움-스페인 광장-트레비 분수’의 클래식 코스를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발품을 팔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트라스테베레는 저녁이면 한인 타운으로 변모했고, ‘이탈리’는 알고 보니 경기도 판교에도 지점이 있는 글로벌 체인이었으며, 현지인의 휴양지인 줄 알았던 오르비에토는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보고 로마를 찾은 서양 여피족의 마지막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식당 수준 또한 서울의 가로수길보다 나을 게 없었다. 거의 모든 식당이 오대양 육대주에서 모여든 관광객의 입맛을 고려해 표준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미슐랭 원스타 레스토랑부터 재래시장 근처의 후미진 노포까지 일주일 동안 스무 곳이 넘는 식당에서 마흔 접시에 가까운 음식을 맛보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테르미니 역 근처 중식당에서 먹은 새우볶음밥이었다. 로마가 속한 라치오주는 본래 미식으로 유명한 지방이라는데 그 광활한 미식의 땅에서 맛없고 불친절한 식당만 용케 찾아다닌 느낌이었다. 미슐랭 레스토랑에서는 시키지도 않은 음식값을 슬쩍 끼워 넣은 영수증을 받아 들고 분노의 사자후를 토했고, 18세기에 문을 열었다는 유서 깊은 식당에서는 싸구려 뷔페 코너에나 있을 법한 인생 최악의 오일 파스타를 맛보았다. 대체 누가 로마를 영원한 도시(La Città Eterna)라고 했나. 내게 로마는 영원히 멸망한 도시, 여전히 멸망 중인 도시였다.
최근 여행 에세이를 펴낸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집 <말하다>에는 여행에 대한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요새는 여행이 예전만큼 좋지가 않아요. 특히 주마간산식 여행은 그만하려고요.” 젊은 시절 세계 곳곳을 누비며 견문을 쌓은 작가치고는좀 시니컬한 발언이다. 이유가 뭘까? 이어지는 그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제는 여행지다운 여행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90년대 초반만 해도 발리에는 빗물을 받아 샤워하는 곳이 많았거든요. (…) 평온했던 40년 동안 미국과 서구의 여행자들이 여행 문화를 평준화했어요. 어딜 가도 하얀 침대보가 깔려 있고, 아메리칸 스타일이죠. 여행지는 비슷해졌고, 그래서 여행의 긴장과 흥분 같은 것이 빠르게 사라졌어요.” 그렇다. 항공사 광고주들이 남인도의 힌두 사원이나 케냐의 마사 이마라 초원 같은 오지와 밀림에 집착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런 장소가 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최근 영화 <비치>의 배경이 된 피피섬이 생태계 오염 으로 무기한 폐쇄된 것을 생각해보라. 영화를 개봉한 지 불과 18년 만의 일이다.
세간에 떠도는 여행에 대한 잠언 중 최근 나를 가장 웃게 만든 것은 어느 칼럼에서 발견한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 1572~1631)의 말이다. “사람이 행하기 어려운 일들 중의 하나에, 외국에 갔다 온 사람의 입 다물기가 있다.” 2000년대 중반, 그러니까 내가 잡지사 막내로 후배들의 입사 지원 서류를 추리던 시절만 해도 이력서 취미란에 ‘여행’이라고 적는 싱거운 녀석들이 넘쳐났다. 개중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우유니 사막에서 찍은 사진을 프로필이랍시고 들이미는 불가사의한 놈도 있었다. 면접 중 이들에게 여행 이야기를 꺼내면 십중팔구 눈을 반짝이며 인도에서 노숙하다 강도를 당했다는 둥, 태국에서 마리화나를 빨다 필름이 끊겼다는 둥 흔해빠진 무용담을 늘어놓곤 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그럼에도 청춘의 낭만처럼 느껴진 건 그때가 2000년대 중반이었기 때문이고,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지 20년이 채 안 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시인 이병률이 50여 개국 200여 도시를 돌며 기록한 여행 산문집 <끌림>이 출판계의 지축을 흔들고, 대학생들이 배낭여행과 어학연수를 핑계로 줄줄이 휴학계를 제출하던 시기. 닳아빠진 여권이 곧 방랑의 증표로 통하던, 모두가 마젤란이고 모두가 김찬삼이던 그때.
우유니 사막에서 찍은 사진을 프로필이랍시고 들이민 놈은 아직 용서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행의 긴장과 흥분이 살아 있던 그 시절의 공기가 조금 그립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 여행은 대수로울 것 없는 일상적 유람이기 때문이다. 유레일패스로 유럽 국가를 팩맨처럼 쓸고 다니는 주마간산식 일주는 어느덧 21세기의 가장 촌스러운 여행 방식이 됐다. 미술관 투어나 서핑 체험처럼 한 가지 프로그램에 집중하는 여행 또한 누구나 클릭 한 번으로 결제할 수 있는 흔한 여행 상품 중 하나다. 한때 노년의 버킷 리스트로 꼽히던 지중해 크루즈와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요즘 여행사 직원들이 침 튀기며 권하는 단골 효도 관광 코스이고, 현지인의 집에서 로컬 문화를 즐기자는 취지로 시작된 에어비앤비는 임대업자들의 부동산 놀이터로 전락한 지 오래다. 쿠킹 클래스나 와이너리 투어 같은 체험 프로그램 역시 뜨내기 관광객을 겨냥한 겉핥기식 기획으로 빠르게 초심을 잃어가는 중이다. 차승원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소고기미역국을 끓이고 이연복이 샌프란시스코 푸드 트럭에서 깍두기볶음밥을 파는 세상. 한편에서는 삼삼오오 짝을 지은 외국인들이 전주 한옥마을과 이태원 밤거리를 헤매는 이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에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 여행의 긴장과 흥분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한 달이 멀다 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는 남자 사람 친구 K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지자 “아메리칸 스타일을 벗어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애초에 관광객이 별로 없는 비관광지를 찾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기야, 오지도 극지도 아닌 평범한 도시에서 이름 모를 주민들의 일상을 엿보는 것이야말로 이국의 풍습과 문물을 구경하는 관광(觀光)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일 터였다. 다만 K는 이런 식의 여행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음을 덧붙였다. “얼마 전 키예프에 다녀왔는데 사람들이 안 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더라. 괜찮은 카페도, 쇼핑할 만한 가게도 없고. 게다가 밤에는 사람도 별로 없어. 나 혼자 돌아다니고 있자니 좀 외롭더라고.”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다음 여행지를 묻는 질문에 “민스크”라 답하는 그를 보며 나는 어떻게든 정형화된 여행을 벗어나고자 하는 K의 열정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름은 익명으로 하되 인스타그램 아이디는 노출해달라고 부탁한 남자 후배 Y는 후쿠오카에 갈 때면 꼭 배편을 이용한다. 로케이션을 고민하기에 앞서 이동 수단부터 차별화를 꾀한 경우다. 처음에는 경비 절감 차원이었으나, 비행기와는 사뭇 다른 재미에 이제는 일부러라도 배를 탈 정도가 됐다고. “배로 여행할 때만 느끼는 비일상적 즐거움이 있어요. 여권에 배 모양 도장을 받는다든가, 물건 떼러 가는 자영업자와 이야기를 나눈다든가 하는 것들이죠. 공항이었으면 지루하게 줄 서 있을 시간에 부산항 근처에서 반나절 놀다 갈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죠. 또 기내와 달리 선내는 반입 금지 물품이 많지 않아요. 액체류 반입도 자유로워서, 한번은 좋아하는 일본 브랜드 샴푸를 알뜰팩으로 사서 가져온 적도 있어요. 하하.” 후쿠오카까지 가서 알뜰팩 샴푸라니, Y의 인스타그램 아이디는 공개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때로는 한 도시에 오래 머무는 방식의 여행이 죽어가는 여행 세포를 살리기도 한다. 그러나 ‘한 달 살기’로 대표되는 장기 여행 트렌드 역시 대형 여행사가 관련 상품을 내놓을 정도로 상업화된 지 오래. 다만 앞서 K가 말한 ‘비관광지’에 ‘한 달 살기’ 트렌드를 묶는다면 결과는 다를 수 있다. 여행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여자 선배 J는 ‘여유와 취향이 있는 여행자를 위한 데스티네이션 매거진’을 컨셉으로 벌써 몇 년째 수익과는 거리가 먼 여행 잡지를 만들고 있다. 바타네스, 몰타 등 한 호에 한 지역, 한 도시 혹은 한 마을만 소개하는 이 잡지의 다음 데스티네이션은 제주도 부산도 아닌 경상북도 고령. 대체 고령에 뭐가 있냐는 나의 물음에 J는 대가야의 우륵 같은 얼굴로 꾸짖듯 대꾸했다. “그거 알아? 고령에 가면 가야금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어. 그 가야금을 가질 수도 있고. 문제는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을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이번에도 그녀는 ‘여행은 살아보는 것’이라는 원칙 아래 고령에 한 달가량 머물며 옛 대가야의 매력을 음미할 예정이다. 뭐랄까, J의 열정을 지피는 밑불을 새삼 확인한 기분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잡지는 별로 팔리지 않겠지만.
여름인데 나는 여전히 아무 계획이 없다. 다만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오래 머물고 싶다는 바람만은 분명하다. 나만의 민스크, 나만의 고령을 찾아야 할 때다. 신대륙을 찾는 콜럼버스의 마음으로. 가만, 근데 민스크는 대체 어디 있나요?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Lachlan Bailey
- 모델
- Fran Summers
- 글
- 강보라(칼럼니스트)
- 스타일리스트
- Clare Richardson
- 헤어
- David Harborow
- 메이크업
- Mark Carrasqui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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