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독일인의 사랑

2019.07.29

독일인의 사랑

독일인 칼 라거펠트는 떠났고, 그가 사랑했던 샤넬과 펜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탈리아 여인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는 콜로세움 앞에서, 프랑스 여자 비르지니 비아르는 그랑 팔레에서 독자적 쇼를 열었다. 한 남자를 잃은 두 여인의 오뜨 꾸뛰르.

CHANEL in Grand Palais

대형 도서관에서 펼쳐진 가을 꾸뛰르 컬렉션엔 예술에 이어 문학적 가치도 포함됐다.

“꾸뛰르는 그 자체로 결정적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고, 각각의 작품이 서로를 좇아가면서도 결코 똑같지 않은 컬렉션을 만들어내야 한다.” “오뜨 꾸뛰르는 꿈과 환상이 뒤섞인 아주 작은 섬이며, 패션과 시대를 초월한 최고의 명품이다.” 생전의 칼 라거펠트는 샤넬 하우스의 세계와 코드를 웅장한 그랑 팔레에 구현해왔다. 방돔 광장을 재현하는가 하면, 진주 위에 발톱을 받치고 선 초대형 황금 사자를 만들고, 유리 돔 아래 집채만 한 트위드 재킷을 걸어놓는 식이다. 라거펠트의 무대장치는 생기 넘치고 진화하는 샤넬 꾸뛰르 정신을 계속 이어오며 매 시즌 진정한 꿈의 무대를 선사해왔다. 7월 초 선보인 가을 꾸뛰르 쇼는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비르지니 비아르의 꾸뛰르 데뷔탕트다.

새로운 디렉터 비르지니 비아르가 모델의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있다.

오직 꾸뛰르 의상만 작업하는 캉봉가 아틀리에. 그 바로 아래층엔 코코 샤넬의 아파트가 있다.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단정한 트위드 수트 차림의 가브리엘 샤넬이 가느다란 손가락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끼운 채 아파트 거실을 거닌다(낮엔 이곳에서, 밤엔 리츠 호텔에서 지냈다). 책상엔 펼쳐진 책과 안경이 나란히 놓여 있다. 가브리엘이 의상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퀼팅 쿠션이 놓인 옅은 황갈색 스웨이드 침대에 기대어 책을 집어 드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나? 응접실 벽면은 온통 책으로 가득하다. 그녀의 무조건적 책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N°5 향이 스민 고서, 책장 사이에 아주 특별한 대화가 속삭이듯 오가는 셰익스피어, 몽테뉴, 라 로슈푸코와 라 브뤼에르, 라신, 몰리에르, 생시몽, 루소와 볼테르, 파스칼과 보쉬에, 세비녜 후작 부인과 스탕달, 플로베르와 프루스트… 그녀의 정신을 계승한 라거펠트는 가브리엘 못지않은 애서광으로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갈리냐니 서점의 유명한 고객 중 한 명) 그의 서재와 사무실, 그가 파리에 문을 연 서점 ‘7L’의 사진 스튜디오에 있는 책을 모으면 30만 권이 넘는다.

그랑 팔레에서 열린 쇼 백스테이지 현장.

학구열이 식을 줄 모르는 박학다식한 이 책 수집가는 자신이 지닌 책과 문학을 향한 열정을 30년 가까이 비르지니 비아르와 나눴다. 마찬가지로 성실한 독서가로 소문난 비아르가 첫 꾸뛰르 무대 배경으로 책과 서재를 선택한 건 당연한 일이다. 수천 권의 책이 진열된 목재 책꽂이, 여러 개의 통로로 연결된 서가, 독서하기 좋은 응접실로 구성된 원형 도서관은 책을 향한 사랑과 창시자와 전임자에 대한 존경이 고스란히 느껴졌으니까.

“무심한 듯 멋을 풍기고 우아하면서도 자유로운 실루엣을 지닌 여성을 꿈꿨어요. 샤넬이 지닌 매력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자그마한 안경과 리본이 달린 펌프스와 블랙 가죽 로퍼 차림의 호리호리한 비아르는 문학에 푹 빠진 듯 보였다. 비아르가 이번 시즌에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가 바로 ‘지적인 파리지엔’이다.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는 도서관 한쪽에서 로브처럼 부드러운 원 버튼 장식의 트위드 롱 코트가 등장했다.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모델들은 때로 금테 안경을 썼고, 30년대 라인으로 완성된 실루엣은 현대적이었다. “나는 단지 여자가 되고 싶다”라는 가사의 포티셰드의 몽환적인 노래 ‘Glory Box’를 배경으로 70명의 모델들이 차분히 걸어 나왔다. 책 속 문장처럼 복잡한 질감의 트위드 코트로 시작된 무대는 이윽고 오렌지, 그린, 레드, 퍼플, 핑크, 블랙과 화이트 등등 세상의 모든 색깔로 채워졌다. 크롭트 재킷과 어울린 길고 날씬한 맥시 스커트, 어깨가 드러난 넓은 목선의 트위드 재킷은 드레스나 통이 좁은 스커트와 매치했다. 또 허리와 엉덩이를 강조하는 시폰 풀 스커트와 깃털을 장식한 새틴 드레스까지. 이 모든 룩은 검정 리본을 장식한 키튼 힐의 새틴 펌프스나 납작한 가죽 로퍼와 짝을 맞췄다.

그랑 팔레에서 열린 쇼 백스테이지 현장.

그런가 하면 더치스 새틴의 곧은 결과 바이어스 재단에서는 정교함이 드러났고, 트위드와 울 크레이프 소재에서 쉽게 엿볼 수 없는 유연함은 이번 컬렉션을 일관성 있게 이끌었다. 또 시폰과 오간자를 겹치고, 조젯 플리츠 디테일을 섬세하게 표현한 부분에 벨벳을 가미하거나 레이스, 멀티 컬러 자수 장식과 깃털 장식을 일일이 작업해 새로운 꽃을 표현했다. “칼의 컬렉션은 늘 드라마틱했어요. 반면 비르지니는 좀더 섬세해요. 그 자신이 여성이기에 여성의 몸을 잘 이해하거든요.” 샤넬 쇼룸에서 만난 홍보 담당자의 말처럼 이 70벌은 느슨하면서도 우아한 볼륨을 연출했다. 장인의 손끝에서 완성된 옷은 예술로서 가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웨어러블’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인지 고객의 피팅과 주문 예약으로 꾸뛰르 공방은 또다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피팅 현장에서 포착한 모델들의 모습.

가브리엘 샤넬은 언젠가 작가 폴 모랑에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책은 최고의 친구나 다름없어요.” 오바진 고아원에서 외로운 유년기를 보낸 그녀에게 책은 삶의 가장 중요한 일부였다. 샤넬이 젊은 시절 푹 빠져 있었던 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녀를 꿈의 세계로 안내한 덕분에 운명을 개척할 수 있었다. 라거펠트를 이끈 힘 역시 책과 문학이었다. 이제 비르지니 비아르만의 필력으로 새 이야기가 시작됐다.

FENDI in Palatine

웅장한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펼쳐진 펜디 오뜨 꾸뛰르 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발표된 펜디 쇼에서만큼은.
모피는 잘 팔린다. 진짜든 가짜든, 리얼 모피든 에코 퍼로 불리든. 그리고 펜디 상표를 단 진짜 모피는 세계 어디서나 인기를 끈다. 칼 라거펠트 사후, 펜디 가문을 위해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가 기획한 이번 컬렉션(정확히 말하자면, 2019 F/W 오뜨 꾸뛰르 시즌이다)은 몇 년 만에 보는 최고의 컬렉션이었고 매우 눈부셨으며 예술품 앞에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동까지 있었다.

피팅하는 날 포착한 펜디 하우스의 풍경.

그러고 보니 생전의 라거펠트만큼 패션쇼의 환상과 상업적 현실성의 조화를 잘 꾀한 인물도 드물었다. 하지만 과거 몇몇 펜디 컬렉션에서는 그의 우뇌와 좌뇌의 균형 감각이 잠시 깨져 통제력을 잃은 채 왕성한 창의력을 포기한 듯 보인 적도 있었다. 이번엔 달랐다. 실비아는 시작에서 마무리까지 통제력을 완전히 되찾았다. 아마 칼의 영혼이 로마 펜디 본사를 떠돌며, 다시 모피와 펜디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도록 부추긴 것 같다. 그리하여 실비아는 칼과 펜디 가문이 인연을 맺은 54주년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54벌을 공들여 제작했다. 이를 공개할 거국적 장소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로마의 비너스 신전이 있는 언덕, 배경은 콜로세움이었다.

컬렉션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마블 페인팅의 모피 의상을 입은 모델들.

이번 컬렉션을 품평할 때, 패션쇼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그러니까 의상과 장소는 아주 팽팽하게 맞서며 같은 비율로 언급될 만하겠다. 그럼에도 대중에게 더 익숙한 쇼장부터 보자. 펜디의 지속적인 비너스와 로마 신전 복원 프로젝트 덕분에 캣워크는 팔라티노 언덕에 대리석 느낌으로 분수가 있는 십자형 이탤리언 정원으로 완성됐다. 또한 로마의 상징인 콜로세움이 런웨이의 병풍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로 인해 몇 년 전 트레비 분수 위에 마련한 투명 런웨이 쇼만큼, 만리장성 일부를 통제해 런웨이로 사용한 쇼만큼 패션 역사에 길이 남을 결정적 순간이 됐다.

피팅하는 날 포착한 펜디 하우스의 풍경.

다음은 옷. 실비아는 먼저 옷의 부피부터 줄였다. 이를 위해 70년대풍 늘씬한 실루엣을 적용했다. 몸매에 자신 있다고 여긴다면, 이번 컬렉션은 접근하기 까다로운 작품은 아니었다. 너무 웅장하지도 너무 거창하지도 너무 이국적이지도 않았다. 그런 뒤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는 자신이 운영하는 펜디 공장의 모든 테크놀로지를 절제 있게 사용했다. 특히 고대 로마 저택의 대리석이 주된 모티브로 쓰였고, 이 공장을 통해 오뜨 꾸뛰르 의상을 정밀하게 구현했다. 대리석 프린트, 대리석 바닥처럼 다채로운 모피 패치워크, 세세한 장식 등등.

피팅하는 날 포착한 펜디 하우스의 풍경.

어떤 것은 아주 대담했고 어떤 것은 단순해 보였지만 지독할 정도로 정교한 모피 모자이크 세공 기법인 것만은 분명했다. 이에 대해 펜디 가문은 “칼리굴라 황제의 네미 호숫가 배를 장식했던 모자이크에서 도무스 티베리아나 궁전 바닥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인 ‘오푸스 세크틸레(Opus Sectile)’ 상감기법을 연상시키는 회화적 장식”이라고 자부심 넘치는 문장으로 설명했다. 꽤 역사적이고 과학적으로 들리지 않나?

피팅하는 날 포착한 펜디 하우스의 풍경.

“황수정, 제이드, 로즈 쿼츠, 칼세도니의 파스텔 색감이 유겐트 양식(Jugendstil)의 차분한 컬러 팔레트를 암시하는 가운데 골드가 점점이 박힌 미네랄 & 어스 톤과 조우한다”는 예술적 색채 표현까지 덧붙였다. 이런 의상은 여러 가공 단계를 거친 마블 페인팅의 밍크, 실크 무아레, 마블 가자르 소재로 제작했다. 뭐니 뭐니 해도 ‘로마니티의 새벽’이라는 주제 아래 최고의 작품을 꼽자면? 모피를 조각조각 이어 퍼즐처럼 팔각형으로 짜 맞춘 코트다.

피팅하는 날 포착한 펜디 하우스의 풍경.

이렇듯 이번 컬렉션은 모든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었 다. 완벽한 타이밍은 말할 것도 없고, 장인 정신, 상상력, 낭만, 약간의 70년대 요소와 세련미까지. 사실 모피가 패션 생태계에서 큰 뉴스거리가 되는 것만큼 펜디에 좋은 일은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정말 멋졌다. 콜로세움이 보이는 쇼장이라는 사실도, 이탈리아 작곡가 카테리나 바르비에리의 라이브 공연도, 로마의 여름밤 아래 차린 초현실적 디너도, 뉴욕에서 물건너온 R&B 듀오 라이언 베이브의 특별 공연도, 캐서린 제타 존스와 수잔 서랜든과 젠다야 콜맨과 고소영 등의 셀러브리티까지. 무엇보다 칼 라거펠트의 54년 펜디 업적에 헌정한 실비아 벤투리니의 펜디 꾸뛰르 컬렉션까지 모두 다!

    에디터
    손은영
    포토그래퍼
    Olivier Saillant, BenoÎt Peverelli, Rexfeatures, Courtesy of Chanel, Fen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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