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가 된 여자들: 소설가 김애란
추구하는 삶의 가치로서 성공은 사어가 되었지만 고여 있길 사양하며 계속 전진하는 삶은 여전히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시대와 호흡하며 섬세하고 다정한 서사를 펼치는 소설가 김애란, 자신의 정체성을 음악으로 창작해 전 세계 클럽에서 한국어와 영어가 울려 퍼지게 한 DJ이자 싱어송라이터 예지, 감각의 재평가를 주장하며 예술을 실험하는 아니카 이, 아이들을 작품 세계의 화두로 삼으며 성장 영화를 부활시킨 윤가은 감독. 이들 앞에 따라붙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신선한’, ‘독특한’, ‘독창적인’ 같은 수식어는 고유성을 증명한다. 지치지 않는 질문과 세상에 대한 관찰로 스스로를 장르로 만든 여자들. 변화보다 내면에 파동을 일으키는 여자들의 오늘을 만났다.
열일곱 번째 여름 안에서
소설가 김애란이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냈다. 그녀를 키운 8할의 사람과 공간과 계절을 만났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오면 모서리를 조그맣게 접는 습관이 있다. 김애란의 책을 읽고 나면 접은 페이지가 많이 생겨 두께가 두툼해지고 만다. 마른미역을 물에 담가놓으면 몸집을 두 배로 불리듯 김애란의 책이 독자에게 가닿으면 존재감이 두 배가 된다. 천진한 이야기꾼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하도 생생해서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갑자기 시공을 이동해 그녀가 창조한 자취방, 거리, 식당에 불쑥 떨궈진 기분이 든다. 주인공들은 나를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들을 관찰할 수 있는 그 상태 말이다. 소설집 <달려라, 아비>, <비행운>, <바깥은 여름>,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까지 치열하게 세상을 감각하며 풀어낸 이야기에는 늘상 보는 사람들의 앞모습이 아니라 옆모습과 뒷모습 그리고 속내가 있었다. 언젠가 그녀는 “단어든 사물이든 풍경이든 다르게 감각해주고, 다르게 표현해 세계와 접촉면을 늘리고 세계를 풍부하게 감각하게 하는 게 소설의 복무”라고 말했는데, 김애란과 같은 시대를 호흡하며 우리의 세계는 확장되고 다채로워졌다. 표현을 또 한 번 빌리자면 그녀의 문학으로 우리의 얼굴에 ‘표정과 온도가 입혀졌다’.
<잊기 좋은 이름>은 김애란의 산문집이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성장기, 주변 인물에 대한 시선, 여행과 어떤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쓰던 시절 머물렀던 강원도 인제 만해문학박물관이, ‘칼자국’과 ‘도도한 생활’의 영감이 된 어머니가 운영했던 식당 ‘맛나당’이 있고, 김연수, 편혜영, 윤성희 작가를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이 있으며, 혐오 사회, 세월호가 가라앉았던 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까 <잊기 좋은 이름>은 김애란 작품 세계의 기원을 예측해볼 수있는 힌트이자, 김애란 설명서의 다른 이름이며, 김애란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의 총합이다. 17년간 글을 들춰보며 김애란은 ‘이름’을 떠올렸다. 그동안 그녀를 스쳐간 사람 이름, 풍경 이름, 사건 이름. 소설가란 현존하는 모든 존재에게 이름을 붙이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녀에게 또 다른 이름이 될, 어쩐지 서늘하고 차분했던 여름이었다.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 오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2002년 등단 후 17년 동안 쓴 산문을 책으로 묶는 과정은 곧 그 시간을 반추하는 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드문드문 발표했던 글을 묶어 감회가 새롭기도 했는데 부끄러운 부분이 좀 있어 전부 다 리타이핑했어요. 호흡이 다 달라서 지금 호흡으로 다듬고 싶더라고요. 갖고 있는 글의 40%는 뺐어요. 이제 와서 보면 표현이 과도하거나 문장이 좀 낡아 보이거나 과도한 재치를 부렸거나. 아니면 생각 자체가 어떤 편견을 드러내거나 공부가 부족하거나 시의성이 너무 지나버린 글은 뺐어요. 한때 소설보다 솔직한 글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묶어놓고 보니 오히려 하기 힘든 어려운 이야기는 소설이라는 완충장치가 필요했구나, 했어요. 직접 드러내기 어려운 이야기나 가족사 같은 것은 소설로 풀고 바깥에서 조금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산문으로 가려서 냈구나, 이런 생각이 최근 들었어요.
그동안 칼럼이나 산문을 피해 다닌 것 같기도 해요(웃음).
소설적 경험이 많이 쌓여야 에세이도 쓰기 쉬운데, 데뷔 초엔 소설과 관련된 경험 자체가 적었어요. 에세이는 아무래도 자기 몸에서 나온 얘기라 경험과 공부가 쌓여야 잘 나오는 것 같아요. 데뷔 초엔 두 가지 다 부족하다 생각해서 청탁이 와도 고사했어요. 힘들게 발표했던 글이에요.
새삼 발견한 과거의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지금보다 더 열려 있고 더 깊었구나. 아, 깊어진 건 지금이 더 나을 텐데 세상을 더 맨살로 감각하고 느끼려고 했던 것 같아요. 미숙하지만 필터 없이 받아들여 더 정직하거나 감각적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소설이 산처럼 느껴진다고 적었는데 소설이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무엇이라면 산문은 뭔가요.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란 점에서 허허벌판 같아요. 쓰기 어려운 점은 비슷한데요. 소설은 3인칭도 가능하고 제가 카메라를 여러 개 고를 수 있는 느낌이라면, 산문은 1인칭으로 시작해서 끝나죠. 그렇게 생기는 친밀함도 있지만 그렇게 생기는 부끄러움도 있고요.
같은 소재를 다른 방식으로 푼 적 있어요. 예를 들면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이 세월호 사건에 관한 산문이고,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 실린 ‘입동’은 세월호 사건이 연상되는 소설이에요.
세월호 관련 글은 산문을 쓸 때가 소설보다 훨씬 어려웠던 것 같아요. 소설은 이 이야기가 아닌 척할 수 있잖아요. 보편적 상실의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으니까요. 4월에 사건이 일어났고 4월 말쯤 청탁이 와서 5월에 겨우겨우 썼던 글이에요. 사건이 끝난 뒤 사후적으로 해석하거나 바라보는 입장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계속 진행 중이고 나도 이 사건을 장악하지 못했고 무슨 일인지 잘 모르는 것을 쓰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많은 것이 규명되기 전이라 애도에 집중해서 썼어요.
산문집을 읽으며 예전 소설집을 다시 꺼내 읽었는데 문장에 대해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어려운 단어 하나 없이 신선함을 선사해요.
일단 제 직업의 기본 재료니까 재료에 대한 애정이 있어요.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는 매우 많잖아요. 아름다운 문장을 쓰겠다는 의식보다 ‘이 이야기는 웹툰, 영화, 드라마로 경험해도 되는데 왜 굳이 활자 매체로 경험해야 하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면서 쓰고 싶다고 생각해요.
작년쯤 ‘넷플릭스 시대에 소설가가 사는 방법’에 대해 칼럼을 기획했던 기억이 나네요.
제 주위에 둘러싸인 이야기를 다양한 형식으로 경험하는 걸 좋아해요. 문학이 중요한 걸 독점하고 있다고도 생각 안 하죠. 각자의 방식으로 이 그릇에 담겼을 때 가능한 이야기를 현장에 계신 모든 분이 치열하게 고민한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저도 만끽하는 편인데요. 영향을 받을 건 받고 또 배울 수 있는 건 배우자는 마음으로 봐요. 10년 전 <프리즌 브레이크>를 보며 몰입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원동력이 뭘까를 생각해요. 접속사로 따지면 ‘그래서’, ‘어떻게’죠. 궁금함과 욕망으로 많이 기다리고 집중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싫증 날 때가 있었어요. 사실은 도착지보다 엔진의 힘으로 굴러가는 거니까요. 어쩔 수 없이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매체라 창작자가 받는 제한이 분명히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활자 매체는 조금 더 자유롭지 않나 생각해요. 우위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가 있는 거죠.
언어 자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엿보이는 대목이 많아요. 단어 자체에 얼마만큼 골몰하나요.
데뷔 초에는 문장의 리듬감에 더 집중했다면 이제는 문장 사이의 배열, 배치를 살펴봐요. 감각으로만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그 시절에만 쓸 수 있는 감각이라는 것도 있고. 요새는 전체적 틀 안에서 고민해요. 단어는 당연히 사전을 찾아보는데 단어의 정확한 뜻을 찾기도 하지만, 유의어, 반의어, 동의어를 한 문장 안에서도 다채롭게 쓰려고 해요. 다른 작가들도 다 하는 일이지요.
그 과정을 즐기는 듯 느껴집니다.
같은 뜻이라도 글자 숫자, 이를테면 한글과 한자의 숫자가 다르니까 그럴 때야말로 리듬감을 생각하며 선택해요. 창작이라기보다 직업적 태도죠. 방금 제게 메이크업을 해준 아티스트도 수십 가지 도구와 재료의 특성과 쓸모를 다 이해하고 계시잖아요. 단어에 대해서도 작가들이 비슷하게 생각해요.
편혜영 작가, 김연수 작가, 윤성희 작가 등 주변 사람에 대한 다정한 시선이 참 좋았어요.
선배들이라 만나면 까불기도 하고 조금 편안하게 응석도 부려요. 그런데 우정은 공개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망설였다가 다른 목적과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도 있는 글이겠다 생각해서 넣었어요. 가능하면 담백하게 쓰려고 했는데, 다른 분들 읽기에는 어떨까 걱정도 돼요. 관심 없는 분들은 지루할 수 있고요.
실제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편인가요, 서서히 친해지는 편인가요.
나이에 따라 달랐어요. 지금은 예전보다 관계에 대한 조급함은 줄었어요. 기대가 줄어서일 수 있지만, 신뢰가 쌓여서일 수도 있죠. 내 모습이 투명하게 전달되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해서 너무 속상해하지 말자고, 그건 불가피한 일이라는 걸 깨달으며 조급해하지 않게 되었어요. 책에 나온 작가들도 드문드문 오래 뵌 분들이에요.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에 남아 있는 전 주인의 흔적을 보고 연락했던 에피소드의 ‘여름의 풍속’에서 엄청난 호기심과 행동력 덕분에 흥미진진했어요. 적극성은 언제, 어떻게 발휘하나요.
일단 그 책은 여전히 집에 있고요. 여전히 읽지 않았고, 그 종이도 여전히 있습니다. 정말 예외적으로 용기를 낸 경우예요.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관찰해야지 하는 각오를 갖고 보진 않아요. 결례이기도 하고 그렇게 살면 제가 삶을 누리지 못하잖아요. 뭔가 판단하거나 판정하기보단 주변 것들에 관심과 호기심을 가져요. 메이크업을 받으며 ‘수천 명의 얼굴을 만져보셨겠네, 나야 상상으로 사람의 얼굴을 만지지만 실제로 누군가의 얼굴을 오랫동안 만진 분들의 이력이나 역사는 어떤 걸까’, ‘팔근육은 직업적 근육일 수도 있겠다’ 상상했어요. 어릴 때는 인상 비평하길 좋아했는데 지금은 직업적인 것,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그분들 역사는 열심히 상상하고 내면은 기본적으로 모른다는 데서 출발해요.
회사원처럼 매일 규칙적으로 글을 쓰나요, 영감이 찾아올 때만 글을 쓰나요.
한때 창작자들의 자유로움이 낭만화, 신화화되던 시기가 있었고 그런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제가 아는 많은 창작자들은 성실해요.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분들조차 기본적 성실이 있어요. 자유로움만 있는 분들은 때로 시행착오를 겪는 것 같아요. 기계적 성실이라기보다 직업윤리 그리고 책임인 것 같은데요. 저도 회사원처럼 쓰진 않는데 마감 때 제일 열심히 써요. 골프로 비유하면 샷이 잘 나오는 몸의 각, 근육을 평소에 좀 키워놓으려고 노력해요. 운동선수가 열심히 운동한다는 건 결코 자랑이 아닌데 저도 거의 매일 읽고 메모도 합니다. 그래도 번번이 어려움을 느낍니다.
집필 장소도 궁금합니다.
데뷔 초에는 학교에서도 썼고, 졸업한 뒤에는 동네 도서관도 많이 다녔고요. 그 뒤에는 집에서도 쓰고 집중력이 필요할 때는 집중력을 구매하러 카페에 가요.
매번 새로운 카페를 찾나요.
자리의 세팅이 마음에 들 때가 있잖아요. 음악, 채광, 의자 각도가 마음에 들면 줄곧 가다가, 몸에 익는다 싶으면 또 다른 데를 가요. 마감이 급할 땐 가까운 데 가고 그때그때 다릅니다.
소설가 김애란과 자연인 김애란은 분리되어 있나요.
네. 물론 어느 때는 섞이는데 작가가 자기 삶을 작품에 헌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제 삶도 가꾸고 만끽할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스위치를 끄죠.
애써서 꺼야 하나요, 잘 꺼지나요.
잘 꺼져요. 이걸 유지하는 데도 에너지가 들잖아요. 마감 때 고생한 게 억울해 보상 심리 때문에 스스로도 잘 꺼져요. 훈련인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글 쓰는 몸, 예민한 각성 상태로 부팅시켜놓으려면 또 그만큼 시간이 들어 안 꺼도 잘 꺼지기도 해요.
청탁받은 글과 소설 외에 또 어떤 글을 쓰나요.
작은 메모들. 글 쓰는 게 기쁨이기도 하지만 스트레스라 평소에 쓰기 싫어요. 에너지가 얼마나 드는지 아니까요. SNS도 잘 안 하는 이유가 일의 연장처럼 느껴져서예요. 다른 사람들은 우정의 통로로도 많이 쓰는데 저는 문장 푸는 게 일이다 보니 그렇지 않네요.
‘칼자국’, ‘달려라, 아비’의 바탕이 된 가족사도 엿볼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부모님의 연애사를 물어볼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는데요. 모르는 척하는 게 적당한 거리로 여겨져요.
어릴 때에는 형제 귀한 걸 몰랐어요. 가까운 친구여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텐 잘 보이고 싶으니까 검열하는 것도 있는데 쌍둥이 자매와는 성장하는 속도, 경험의 양, 바뀌는 인생의 시각이 비슷하다 보니 이런저런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어요. 부모님의 연애를 상상하는 건 금기시되는 일이기도 하고 유쾌하지 않고 묘한데, 저는 성애적으로 그리지는 않아도 연애하는 부모님을 상상하던 버릇이 좋았던 것 같아요. 보통명사 엄마 아빠가 아니라, 내 부모가 김 아무개 씨 조 아무개 씨라는 고유명사로 느껴져 데뷔 초부터 즐겨 변주했어요. 어릴 때 국수 가게에서 식재료를 다듬거나 소일거리를 할 때 물어봤고 빈 홀에서 엄마가 심심하니까 했던 말이 몸에 남은 얘기도 있어요. 성인이 돼서는 취재하듯 전화로 몇 마디 물어봤어요. 내 상상 안에서 나의 기원, 부모님의 청춘을 많이 그렸으니 충분하다 싶어 이제 내 얘기, 다른 사람 얘기로 옮겼어요.
80년생으로서 시대가 어떤 문학적 영감을 줬나요.
부모가 잠깐 맛본 삶의 절정, 호시절이 저의 유년이었죠. 고도 성장기였고 모두가 열심히 하면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기대와 낙관을 가지던 시절을 보냈고, 성인으로 진입하기 직전 IMF를 계기로 그 신화와 믿음이 깨지는 경험을 다 같이 했죠. 정도의 차이지 더 많이 부서진 친구도 있고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친구도 있어요. 그래서 호시절의 기운이 남은 약간의 화사함과 성인 이후의 충격이 가져온 약간의 어두움이 제 작품에도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공간이 짙게 묻어납니다. 다른 도시, 예를 들어 서울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글을 썼을까 생각해본 적 있나요.
성인이 된 이후에 도시를 처음 경험해 더 예민하고 생생하게 감각하긴 했어요. 편의점 같은 곳까지 여러 거주 공간과 생활 공간을 그렸지만 그렇다고 고향 혹은 시골에 대한 환상이 있진 않아요. 시골에는 시골 나름의 폭력성과 개인이 되기 힘든 조건이 있으니까요. 전통적 미덕 아래에 이루어지는 착취도 많고요. 도시에서 태어났어도 도시 이야기를 썼을 것 같아요. 소재는 같은데 감수성은 달랐을 거예요. 서울이 고향인 친구는 지방 출장 갔다가 고속도로가 끝나면서 서울의 불빛이 보이면 안도감이 든대요. 저도 도시에서 20여 년 살아서 익숙하고 편안함도 느껴요. 에너지, 변화, 이런 것이 많아서 작가에게는 오히려 좋은 공간 같습니다.
이번 책도 여름 한복판에 나왔네요. 글에서 자꾸만 여름이 눈에 밟힙니다.
묶어놓고 보니 산문에도 소설에도 그렇더라고요. 여름으로부터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청춘 그리고 생명이 왕성하게 출렁이는 초록이에요. 동시에 여름은 썩기 쉬운 계절이기도 하죠. 예전에는 여름 한복판에서 여름을 쓰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좀 물러나 여름 바깥에서 계절을 바라보는 느낌도 있어요.
끈적끈적한 방바닥 같은 여름의 지긋지긋한 것들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일까요.
청춘에 한해 말하자면 이제 막 제가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좀더 바깥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느낌이 들고요. 모든 사람에게 그 시절은 짧고, 자신의 삶을 더 이해하고 투쟁해야 하는, 그리고 노화와도 투쟁해야 하는 긴 시간이 모두에게 펼쳐져 있죠.
언제 청춘이 끝났음을 깨달았나요.
정확한 워딩이네요. 몸으로 실감했을 때는, 밤을 새우면 너무 힘들 때였어요. 저마다 속도나 리듬이 다르니까 사람마다 다를 거예요.
정신적으로도 청춘이 지나갔다고 느끼나요.
종교는 없지만 하느님이 늘 사람과 가위바위보를 하시는구나 해요. 사람이 가위를 내면 보를 낼 때도 있고, 하나를 주면 하나를 거둬가는구나 생각이 들어요. 내가 무언가 잃으면서 배운 게 있고 그렇게 배운 것으로 생긴 시선, 사람이나 세상을 이해하는 품에 지금은 안도하고 감사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그 시절로 돌아갈래?’라고 얘기하면 그때의 미숙함도 떠오르고, 훨씬 개방적이고 건강했던 몸도 생각나요. 30~40대가 되면 환경을 안정적으로 세팅하기 좋잖아요.
단편 ‘서른’에서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해했는데 어느덧 40대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한국은 나이 혹은 시기에 특징이나 의무를 부여하는 게 과한 사회 같아요. 사람들이 나이 얘기를 많이 하는 이유는 가까운 사이가 아닐 때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단편 ‘서른’이라는 작품을 쓸 때도 스스로 감각하는 나이보다 환경 안에서 서른이라는 나이를 감각했어요. 사회의 책임이 덜한 무결하고 죄가 없는 20대 초 · 중반을 떠나 의지와 관계없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면서 살 수도 있는 시기에 들어왔구나 하는 감각으로 ‘서른’을 썼어요. 사회적으로 느낀 사건이 있어서 그 나이가 무겁고 어둡게 느껴졌어요. 40대 초입으로 가는 지금은 그때보다 편안해요. 육체적 절정일 때만 박수 쳐주는 직업이 아니라서 드는 편안함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각각의 직업군에서 느끼는 무게와 불안이 있잖아요.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유가 궁금하군요.
소설은 기본 체력이 필요한 일인데 체력적으로 너무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고요. 경험과 공부가 조금 쌓이고 자기 시선이 생긴 나이기도 해요. 물론 저는 데뷔를 일찍 했고 그때 쓴 글도 좋아해요. 작가마다 그 시기에 쓸 수 있는 글이 있는데 지금 쓰는 건 지금 쓰는 것대로 좋아요. 한편으로는 고정관념이 생기기도 좋은 나이 같아요. 어릴 때는 머리로 이해한 말을 믿었다면 지금은 몸으로 배운 말을 믿어 오히려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되기도 쉬울 것 같아요. 그럴 때는 다른 사람 책이나 칼럼으로 편견을 교정하려고 노력하는데 편견이 없는 사람은 없겠죠.
내면에 자리한 유머는 어떻게 변하고 있나요.
일단, 많이 줄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제 화사한 유머를 좋아하는 독자도 있고, 후기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어요. 예전에는 제가 작가라는 사실 자체가 쑥스러워서 구사한 유머도 많았어요. 어릴 때에 작가는 나이도 많고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존재 같았는데 작가로 불리니 겸연쩍어서 까불어야겠구나 했어요. 스스로 쑥스러움을 견디는 방법이었고 대상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이었어요. 뜨겁게 악수하면 상대가 부담스럽잖아요.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며 호의와 애정을 보이는 방식으로 농담을 좋아했어요. 농담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죠. 책에도 나오는데 죽음과 관련된 경우에는 불가능했고 지금도 많은 일이 정리되거나 해결됐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작가로서 그래도 유머는 애호하는 도구입니다.
일상에서도 불쑥불쑥 나오나요.
더 자주 나오죠. 가까운 사람, 같이 사는 사람 재미있게 해주는 거 좋아하고 웃는 거 보면 좋아요. 유머는 문맥 안에서 나와서 때때로 국경을 넘기 힘들다고도 들었는데 가족 안에도 가족끼리 쌓인 역사, 일화나 문맥이 있잖아요. 그문맥 안에서 두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게 농담하죠.
이야기꾼으로 사는 즐거움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작품을 잘 만들기 위해 연습과 훈련을 하잖아요. 연습과 훈련 자체가 제 삶에 도움이 되는 걸 계속 경험하게 되더라고요. 직업적 자세가 몸에 배면서 생기는 삶의 변화를 점점 더 느끼고 있어요. 내가 잘 묘사해야 잘 전달되니 잘 느끼고 보고 감각하고 맛보며 안 해본 일을 하려고 해요. 원래 가진 기질보다 좀더 용기 내고 모험하는 것 같아요. 직업적 자세, 훈련 자세 자체가 매질의 성격을 변화시켰어요. 이 직업을 잘하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제 몸이 바뀌었고, 이 몸이 제 삶을더 잘 감각하게 해줬어요.
누구나 여러 역할로 살아갑니다. 책 소개 자료에 “소설가, 학생, 딸, 아내, 시민, 인간으로서 작가의 삶을 고백한 산문집”이라는 문구가 있어요. 어떤 역할이 가장 어렵고 어떤 역할이 가장 마음에 드나요.
그걸 다 합치면 저일 텐데. 총합으로서의 ‘나’가 늘 어렵고 숙제인 거 같아요. ‘총합이 정말 나인가?’ 늘 남는 괄호도 있는 것 같고요. 글을 써서 제가 저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몰랐더라고요. 나를 친구처럼 이해하고 공부하고 계속 살펴야 하는구나 깨달은 지 얼마 안 됐어요. 하물며 내가 나도 이렇게 모르는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쓰는 일은 정말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구나 생각했어요. 그것도 자꾸 변하더라고요. 최근에는 그렇게 변화를 해석하는 것도 나고 바뀌는 나와 계속 잘 지내려면 그걸 해석하는 내가 잘 서 있어야 하니 어쨌든 잘지내야겠구나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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