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낭만 문방구
사실 저는 문구 ‘오덕’입니다. 거리를 걷다가도 쇼윈도의 멋진 만년필과 노트를 맞닥뜨리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예쁜 필기구나 다이어리를 보면 그것을 만든 이의 정신과 정성에 교감하고 싶어집니다. 특히 해외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김없이 문구를 캐리어 한가득 담아옵니다. 지인들을 위한 선물 또는 지금 쓰고 있는 것을 리필하기 위해서라지만 사실은 그냥 집어옵니다. 마치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예정된 만남을 운명처럼 느끼면서요.
이탈리아에는 이런 유서 깊은 문구점과 문구 브랜드가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몰스킨(Moleskine)을 비롯해 미켈란젤로와 베토벤이 애용했다고 하죠. 1264년부터 종이를 만들어온 파브리아노(Fabriano), 1912년부터 비스포크 만년필을 만들던 몬테그라파(Montegrappa)에 이르기까지.
요즘처럼 디지털화된 세상에 이런 오래된 문구용품은 단순히 그 기능과 용도를 넘어 인간의 삶과 정서, 관계를 완성하는 의미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곳은 바로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가장 번화한 장소인 리알토 다리 위의 리보알투스(Rivoaltus) 문방구입니다. 정확한 명칭은 ‘레가토리아(Legatoria)’로 ‘제본 가게’라는 뜻입니다. 전 세계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이 다리 위에서 리보알투스를 찾는 것은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언뜻 <해리 포터>에 나온 마법사의 지팡이 가게처럼 보이거든요.
이곳이 제본 가게인 이유는 직접 방문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부를 둘러보면 다락방으로 오르는 낡고 반질반질한 나무 사다리가 놓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리보알투스의 시그니처 아이템인 가죽 양장의 노트와 베니스의 독창적인 대리석 문양으로 물감이 찍힌(Marbleize) 종이 다이어리를 손수 제작 중입니다. 루이 13세 시대의 프랑스 제본업자 마세 뤼에트(Macé Ruette)의 제작 방식과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제본과 컬러 장식은 대운하 그란 카날레(Gran Canale)의 곤돌라만큼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이 문방구에는 공작과 거위의 깃털로 만든 펜과 무라노 글라스(무라노섬의 유리 특산품)와 황동으로 장식한 만년필, 염료를 직접 섞어 만든 향이 나는 잉크와 파라핀 양초와 같은 과거를 전해주는 물건이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합리적으로 느낄 만한 가격은 베니스를 방문하는 수많은 이들이 추억을 기념하기에 충분합니다.
리보알투스의 여주인 완다 스카르파(Wanda Scarpa)는 옛 방식으로 제작한 노트를 평가절하할 수 없는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대운하로 흐르는 바다처럼 리보알투스도 세월의 물결을 타고 흘러갑니다. 정성스럽게 선물을 포장하는 완다의 손놀림은 예전 같지 않지만 미소는 여전히 아름답고 말씨는 상냥합니다. 이제 딸 프란체스카(Francesca)가 다락방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기꺼이 그녀를 돕고 있습니다.
펜을 선물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경과 헌신을 뜻합니다. 마치 전통을 수호하는 리보알투스의 모습을 존경하듯 말이죠. 가죽 노트 한 권, 펜 한 자루,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그들의 열정은 유행처럼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베니스를 방문할 예정이라면 이곳에 꼭 들러보세요!
- 에디터
- 김미진
- 글/사진
- 이현승(가구 디자이너 & 공간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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