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명장면
한국 영화의 또 다른 태동기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 르네상스를 맞은 2000년대까지 수많은 명장면이 탄생했다. 촉망받는 배우들이 걸작 아홉 편을 오마주한다.
<친절한 금자씨>, 2005
Feat. 황세온
“친절해 보일까 봐.” 왜 이렇게 눈 화장을 시뻘겋게 하고 다니냐는 질문에 대한 금자(이영애)의 대답이다. 금자의 눈 화장은 촬영 전 스모키에서 붉은색으로 변경되었다. 이 탁월한 선택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금자의 복수극은 다를 것이라 보여주는 징표 중 하나다.
“캐릭터의 심경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외적 요인 중 하나는 의상이나 메이크업일 거예요. 금자의 빨간 눈 화장은 영화 사상 가장 강력한 여성 캐릭터의 탄생을 알리는 거였죠. 지금 봐도 강렬한데, 당시에는 센세이셔널했을 거예요. 하지만 여성 캐릭터보다 미장센과 감독의 훌륭한 연출력에 집중됐던 거 같아요. 만약 지금 이 영화가 나왔다면 금자라는 여성 캐릭터를 좀더 다각도로 조명했을 거라 생각해요. 우리는 점점 더 강인한 여성 캐릭터를 선망하고 있어요. 언젠가 저도 그중 일부가 되고 싶어요. 이영애란 배우의 얼굴에서 금자가 발현됐듯, 제 안에서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 꿈이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08
Feat. 이호연, 현우석, 고민성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정우성), 마적단 두목 박창이(이병헌), 열차 털이범 윤태구(송강호)가 각자 스타일대로 대륙을 누비는 추격 신은 한국 웨스턴을 부활시켰다. “만주 대륙이 배경이지만 귀시장에서 보듯 다양한 인종과 유물이 뒤섞여 무국적처럼 느껴졌어요. 그 신세계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 신은 일반 액션 영화보다 흥미롭게 다가왔죠. 특히 저도 윤태구처럼 장난스럽고 유쾌한 면이 있어서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현우석) “좀더 일찍 태어나 이 영화 오디션이라도 봤으면 할 만큼 좋았어요. 특히 추격 신에서 한국 영화 미장센의 힘을 느꼈죠. 제가 오마주한 박창이는 나쁜 놈으로 규정되지만 저는 연민을 느껴요.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이 기득권을 잡고 박창이 같은 사람들은 시대에 내몰려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이호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박도원이었어요. 최고가 되겠다는 박창이, 고향에 돌아가 소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싶다는 윤태구, 각자의 목적이 있지만 박도원은 아니에요. 겉으로 ‘나라 없으면 돈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끝내 그의 꿈이 나오지 않아요. 마치 지금의 우리처럼요.”(고민성)
<여고괴담>, 1998
Feat. 한성민
<여고괴담>은 개봉 20여 년이 넘은 지금 <식스 센스>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라는 반전처럼 모두가 공유한 비밀이 있다. 복도 끝에 있던 재이(최강희)가 효과음과 함께 카메라로 점프 컷을 해오는 장면. 누구나 품고 있을 학교라는 공포를 구현해낸 영화는 지금까지도 거의 유일한 한국 공포 영화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영화지만 이 점프 컷은 알고 있었죠. 그만큼 대단한 장면이니까요. 이번 기회로 영화 전체를 보게 됐는데, 완전히 몰입했어요. 지금 고등학생인 제가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입시 스트레스, 왕따 등의 문제는 여전하잖아요. 이제 저는 재이의 점프 컷이 무섭기보다 슬퍼요. 그가 지닌 슬픔의 일부를 알 것 같거든요.”
<타짜>, 2006
Feat. 김현주
도박판에서 인생의 패를 던지는 이들 중에 정 마담은 예쁜 칼이다. 그 칼은 시종일관 완벽하게 세공되어 등장한다. 불길 속에서 절망해 울부짖을 때조차 하얀색 홀터와 트렌치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완벽하다. “이대 나온 여자”라는 말을 날리는 장면처럼 허약한 자존심 하나를 붙잡고 살아가는 정 마담이기에 외면만큼은 완벽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그가 슬립 차림으로 “먹고살기 힘들다”고 읊조리는 장면은 민낯을 내비치는 거의 유일한 순간일 거다. “정 마담이란 캐릭터는 그야말로 ‘걸 크러쉬’처럼 보이지만 그 장면이야말로 진짜 정 마담이에요. 머리로 얼굴을 거의 가려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상처가 느껴졌죠. 세월이 흐르며 쌓였을 온갖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면서 안아주고 싶었어요. 화려함으로 애써 감춰온 정 마담의 진짜 삶을 들여다본 것 같았죠.”
<지구를 지켜라!>, 2003
Feat. 김도연
저주받은 걸작으로 수식되곤 하는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병구(신하균)가 겪는 극한의 고통, 그가 강 사장(백윤식)에게 행한 기상천외한 고문 등 많은 명장면 중에도 벌에 쏘여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추 형사(이재용)는 보는 이 또한 극한으로 떠밀리는 듯하다. “추 형사를 죽인 벌을 ‘협박적인 위트’라고 이름 짓고 싶어요. 병구의 고문 도구는 모두 기발했어요. 흔히 쓰는 총이나 칼이 아니죠. 예상치 못한 것이 죽음을 가져오듯, 삶 또한 의외의 것에서 다치고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 아닐까요?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소신을 지키려 했을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병구는 엄마와 지구를 지키고 싶었고, 추 형사는 경찰로서 정의를 이루고 싶었죠. 이런 각자의 소신이 엇갈려 비극이 되었죠. ‘나는 연기를 통해 무엇을 지키고 싶은 걸까, 연기를 넘어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것은 무얼까’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이 영화 덕분에 잊었던 질문을 되찾았어요. 답은 없겠지만 답을 구하려는 노력은 계속할 거예요.”
<봄날은 간다>, 2001
Feat. 김진곤
사랑의 봄날과 그 후를 겪은 세상의 모든 상우와 은수에게 바치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 “라면 먹고 갈래”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연애의 ‘언어’를 만들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보리밭에서 소리를 따며 미소 짓는 상우(유지태)야말로 이 영화가 결국 사랑을 지지함을 보여준다. “사랑의 세포가 깨어나는 영화였어요. 상우와 은수가 연애하던 시절은 정말 아름답죠. 강릉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만나는 장면, 서로에게 운전을 가르쳐주던 것, 라면 먹고 가라는 대사 모두 가슴에 담겼어요. 차인 후 괴로워하는 상우는 저 같았죠. 헤어진 연인의 차를 긁어본 적은 없지만 충분히 공감이 가고, 저도 상우만큼 엉엉 울고 괴로워했죠. 우리 다 그렇지 않나요? 처절하게 실연을 겪어내지만 마지막에 상우는 녹음을 하며 살짝 미소를 지어요. 아마 은수와 뜨겁게 사랑하던 기억을 떠올린 것 아닐까요? 그가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것이라 믿어요.”
<마더>, 2009
Feat. 홍승희
마더(김혜자)가 서정적인 갈대밭에서 춤을 추는 첫 시퀀스.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하고,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묘한 표정과 춤동작은 모성과 광기가 혼재함을 압축해 보여준다. “워낙 유명한 장면이기에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지 걱정했어요. 영화를 볼 때마다 첫 장면부터 압도당했거든요. 김혜자 선생님께서 과한 동작 없이 약간의 움직임과 표정만으로 광기와 슬픔 등 여러 감정을 보여주셨잖아요. 첫 장면을 이렇게 구성한 이유가 뭘지 궁금했어요. 다른 관객도 저처럼 의미를 많이 찾더라고요. 저는 ‘무언가 던진다’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단순히 모성의 이야기가 아님은 분명하죠. 어떨 땐 이 영화의 힘이 장난이 아닐 테니 마음먹고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해요.”
<초록물고기>, 1997
Feat. 조기성
이창동 감독의 영화 <초록물고기>에서 막동(한석규)은 존엄이 없는 신도시 개발처럼 황폐하게 죽어간다. 그가 죽기 직전 큰형에게 전화를 걸어 초록물고기를 잡던 시절을 얘기하며 울부짖을 때, 관객은 순수한 시대와의 종말을 직감했다. 막동을 죽인 배태곤(문성근)에게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들의 식당에 또 오라고 인사하는 막동의 가족처럼, 아이러니하고 쓸쓸한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조기성은 이를 오마주하기 위해 이창동 감독의 전작과 자료를 연구해왔다. “이 장면은 시나리오를 넘어 한석규 선배님 스스로 연기한 부분이 많다고 감독께서 말씀하신 적 있어요. 영화 자체도 훌륭하지만 배우의 에너지가 이런 장면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경이롭습니다. 순수하던 과거와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현실이 뒤섞여 견딜 수 없어 하는 막동을 볼 때마다 아득해져요. 선배님만큼은 할 수 없지만 제 나름대로 막동의 혼란스러움과 좌절감을 사진에 담고 싶어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2011
Feat. 태이
머리 쓰는 나쁜 놈과 주먹 쓰는 나쁜 놈, 속이는 나쁜 놈과 속는 나쁜 놈 등 온갖 나쁜 놈의 윤종빈 감독식 활극. 산업화와 그에 따른 피해 의식, 욕망, 혼란스러움이 끓어오르던 시대를 남자의 얼굴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중 장기하와 얼굴들이 리메이크한 함중아와 양키스의 ‘풍문으로 들었소’와 함께 최익현(최민식), 최형배(하정우), 박창우(김성균) 등이 위풍당당하게 걷는 장면은 포스터로 쓰일 만큼 강렬했다. “이 영화를 다섯 번은 넘게 봤어요. 다 함께 결의를 다지듯 부산 거리를 단체로 걷는 장면을 좋아해요. 이 바닥에서 내가 최고다, 이곳은 내가 접수했다는 자신감이 화면을 꽉 채워요. 배우들의 걷는 자세, 표정이 실제 깡패 혹은 ‘반달’처럼 느껴질 정도죠. 배경인 부산 특유의 거친 느낌, 최고의 OST까지 더해지면서 명장면이 완성되었어요. 언젠가 저도 그렇게 걸어보고 싶어요. 누구나 한 번쯤 가지는 욕망 혹은 로망 아닐까요?”
- 피처 에디터
- 김나랑
- 패션 에디터
- 손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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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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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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