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BSTLIEBE
나를 감출수록 더 노출되는 것! 자기애로 충만한 이토록 새로운 나르시시스트의 출현.
하이테크 애호가가 아들에게 스마트폰을 주려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엄마와 아들이 세대 간 소통을 통해 확인한 접속을 끊고 사는 즐거움.
서랍장 맨 위 칸 안쪽 파자마를 넣어두는 곳에 케이스가 라임 그린 컬러인 아이폰이 하나 들어 있다. 이제는 구식이 된 이 아이폰 리퍼폰을 몇 년 전에 아들의 열한 살 생일 선물로 구매했다. 하지만 이 아이폰을 충전한 적도, 켠 적도 전혀 없었고, 내가 기대한 것처럼 단체 문자메시지나 인스타그램, 슈퍼 스틱맨 골프 게임 등으로 활발히 사용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이 아이폰은 근본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채 나이트가운 사이에 놓여 있다. 휴대전화는 누군가의 한결같은 동반자이자 은밀한 즐거움이며, 완전히 천사 같고 악마 같은 인터넷이라는 경이로운 환상으로 살아 숨 쉬는 집착 대상이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야 이 아이폰은 이런 휴대전화 본연의 기능을 결코 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바로 아들이 내 선물을 거부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아들은 내가 직접 사서 포장까지 한 그 선물을 딱 잘라 거절했다. 그는 휴대전화를 원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정말 갖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냥 간단한 전화 통화와 문자메시지를 보낼 용도로만 사용하면 된다고 내가 주장했지만, 아들은 꾹 참고 있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제발 제게 휴대전화를 강요하지 마세요.” 그래서 나는 아들이 곧 정신을 차리겠지 싶어 이 아이폰 4를 서랍에 처박아뒀다. 그로부터 벌써 3년이 지났는데도, 아들은 여전히 휴대전화 없이 지낸다. 아들이 이렇게 디지털 문화를 거부하는 이유는 확실히 내가 지나치게 이 문화를 과도하게 수용한 데 대한 반감일 것이다.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당시는 인터넷 개설 초기였는데, 부모님은 뉴햄프셔주 하노버시 한가운데 있는 다트머스대학교 소유의 바쁘게 돌아가는 굉장히 인상적인 중앙 컴퓨터에 접속할 단말기를 한 대 구입했다. 나는 검은색 바탕의 초록색 글자에 매료됐다.
그뿐 아니라 최신 장비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와 끼익 하는 소리에도 매료됐다. 내가 처음 컴퓨터를 사용할 때는 순수한 연애를 하는 기분이었다. 우리 집 다이얼식 전화기로 번호를 돌리기만 해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제 수화기를 눌러 음향 결합기로 전하는 건 하지 않아도 된다. 글자가 컴퓨터 스크린에 나타나면, 세상의 모든 아이디어가 동선을 타고 가족이 사는 숲속 집으로 뭉개져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손끝만 갖다 대도 그 아이디어를 즉시 얻을 수 있어서 침대에 앉아 온 세상을 다 알 듯한 기분이었다.
중학교 시절 내내, 나는 대부분 관계적 요소로 엮인 온라인 어드벤처 게임을 여러 시간 쉬지 않고 하곤 했다. 게임 핸들로 안테나를 사용했다. 해커와 CB(시민 밴드) 마니아, 헤비메탈광, 하이테크에 관심이 많은 운동선수, <엑스맨> 시리즈 광팬 등 정말 멋진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처음 그렇게 컴퓨터를 사용한 경험이 상상력의 지평을 새롭게 열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다양한 지성인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트위터에서 맞닥뜨리는 끝내주게 유연하고 재치 있는 어법을 배웠다.
90년대 초, 미국 최초의 온라인 정보 제공 서비스 컴퓨서브에 등록해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아주 좋아한 컴퓨터 ‘회동’만큼 매혹적인 이메일을 모조리 발견했다. 정기적으로 이메일을 받는다는 건 몹시 멋진 일이지만, 갑자기 편지를 너무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메일 덕분에 풍자와 유머, 당시로서는 전에 없이 용감한 표현 방식을 실험하게 해준 새로운 관습이 생겼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모토로라 레이저를 보자마자 바로 구매했고, 다음에는 블랙베리로 갈아탔다가 마침내 아이폰을 갖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인터넷과 TV는 청소년기의 모바일 폰과 결합되어 참으로 멋진 동시에 늘 나와 함께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하나의 멋들어진 유리 직사각형 안에 들어 있는 창의적 가능성의 세상. 인터넷과 내가 둘 다 변화하는 동안 나는 수년에 걸쳐 많은 온라인 활동과 소셜 네트워크는 대부분 그만뒀는데, 휴대전화 사용에는 거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대체로 포용의 관점에서 인터넷에 관한 글을 써왔다. 나에게 디지털 공간은 집처럼 편안한 곳이다.
2005년과 2009년에 두 아이가 태어났고, 녀석들의 사진을 진부한 캡션과 함께 페이스북에 차곡차곡 올렸을 때, 나는 디지털 시대에 태어난 이 아이들이 부러웠다. 얼마나 운이 좋은 아이들인가. 또 나를 엄마로 뒀으니 말이다. 나는 온라인에 자신의 흔적이 남는 것을 두려워하고, 셀피를 무서워하며, 우리 시대의 누구라도 언제든 완전히 인터넷을 떠날 수 있다는 듯 가정에서 ‘인터넷 사용’을 하루 20분으로 제한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신기술을 반대하는) 러다이트 풋내기가 아니다. 인터넷을 자주 사용하는 시크한 엄마다.
내가 계속 요구하긴 했지만 아이들이 내 구글 글래스를 시험 삼아 해보고 내가 파일럿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옥신각신하며 간신히 익힌 반짝 성공한 기기를 손쉽게 완전히 익히며 내 구역에서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자랑스럽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두 아이 모두 디지털 문화, 소셜 미디어, 온라인 연구의 대가가 되는 상상을 했다. 둘은 막강한 파워와 스캠, 트롤, (정부 기관에서 고의로 유포한) 허위 정보에 대해 확실히 면역력이 있는 무시무시한 불굴의 아바타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들이 만든 아바타들은 언젠가 J.K. 롤링과 솔레다드 오브라이언, 아니면 미래에 트위터를 지배하게 될 명사라면 누구하고라도 용감히 재치 대결을 벌일 것이다.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한 가지가 둘 중 한 명이 인터넷을 완전히 거부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적신호가 있었다. 내 아들은 처음부터 팝 뮤직이나 블록버스터 영화, 슬랭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사진이나 자기가 아는 다른 누구의 사진을 온라인에서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신 역사책에 푹 빠져 살았고, 바지를 걷어 올려 입었다.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였기 때문이다. 맹세컨대, 나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다. 여느 X세대 엄마처럼, 나도 그에게 젤리 형태의 캔디인 졸리 랜처나 조각 피자를 사줬고 TV도 계속 보게 했다. 그런데도 아들은 나에게 저항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그가 말한 것처럼 아들은 자신이 만약 중등 과정을 성실하게 이어갈 계획이라면 휴대전화와 거리를 둬야 한다고 내심 결정했다. 자신의 교육에 필요한 특정 과업을 직접 설정했고, 전국 평균에 해당하는 하루 거의 7시간을 휴대전화와 다른 온라인 기기에 버릴 수는 없겠다고 계산했다.
나에게 이것은 골칫거리였다. 아들 친구들이 아들을 찾을 일이 있으면, 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들이 휴대전화를 여러 시간 동안 꺼두고 있으면, 아들을 찾을 길이 없었다. 우리는 항상 연락이 가능한 상황에 익숙한데, 내 아들은 대체로 그렇지 않다. 주기적으로 우리는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것으로 조율하려고 애썼다. 가끔 아들은 친구의 전화를 빌려 나한테 전화하기도 했지만, 옛날에 국제전화를 할 때처럼 대화를 정말 짧게 하곤 했다. 그는 자신이 모바일 기기에 가까이 가는 순간마다 지구 종말을 알리는 시계가 똑딱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 모든 상황이 생일 선물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아들이 휴대전화를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때가 됐다 싶었다. 아들 친구들 사이에서는 휴대전화를 갖는 것이 중학생이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아들에게도 휴대전화가 한 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나를 위해서도 아들에게 휴대전화가 있어야 했다. 아들은 셀피와 문자 대화를 비난하며 자신이 고상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군다. 하지만 게임 앱을 깔거나 유튜브에 올라온 스포츠 하이라이트 영상을 한번 보기 시작하면 과연 어떤 인간이 아이폰에 넘어가지 않겠는가? 내가 순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아들의 생일날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아들은 스마트폰에 대해 다음 세 가지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첫째, 스마트폰은 우리를 애 취급하고 있다. 우리가 엄마들에게 들러붙게 만드는 일종의 디지털 앞치마 끈인 셈이다(그는 그 점에 대해 뭔가 알아냈다). 둘째, 스마트폰은 어린아이의 풍부한 재원을 위태롭게 만든다. 아이들이 스카우트 조직의 기술을 배우는 대신에 GPS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스마트폰은 사람들을 쪼잔하게 만든다. 이 마지막 입장이 나를 가장 짜증 나게 만든다. 아들은 아직도 내가 모바일 기기에 터치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문자메시지 문자메시지!” “이모티콘 이모티콘!” 그리고 내가 워드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아들은 “게이머!”라고 외친다. 그게 상처가 된다. 요컨대 아들은 자기는 자유롭고 싶어서 휴대전화를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들이 열한 살이 되던 9월 생일날, 우리의 감성은 결국 충돌했다. 나는 아들에게 휴대전화를 줘야 했다. 3년 동안 아들은 자기 방침을 계속 고수해왔다. 아들은 프린트한 종이 지도로 길을 찾아다녔다. 그는 게임 앱을 사용하지 않았다. 소셜 미디어에도 전혀 가입하지 않았다. 짤방이라고 하는 ‘밈’도 전혀 모른다. 그러나 아들도 트위터상의 뜨거운 정치적 논쟁과 청소년기의 사회생활에 대해서는 불안해하는 듯하다. 그는 스냅챗을 경멸하지만, 학교 댄스파티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나의 휴대전화 이용 시간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개념을 싫어한다. 스크린 자체를 아주 유해하게 만들어 그것에 노출되는 시간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뉴욕 타임스> 앱인가, 아니면 우리 엄마들이 사용하는 마르코 폴로 앱(엄마들이 친구들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동영상 메시지 앱)인가? 그러나 아들의 저항을 책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 일에서 배운 바가 있다.
나는 열 살 난 딸을 통해서도 기술의 사용에 대해 배웠다. 딸도 마찬가지로 내가 그녀를 위해 너그러이 닦아뒀다고 생각하는 디지털 여정을 밟지 않았다. 아들처럼, 딸도 휴대전화가 없지만, 그 아이는 그것에 대해 올바르지 않다. 대신 친구들과 페이스타임을 하고, 아이무비를 만들고, 베이킹 동영상을 보기 위해 내 휴대전화나 노트북을 사용한다. 물론 그 정도까지는 내가 전적으로 허락한다. 우리는 스크린을 앞에 두고 같이 다정하게 앉아 주기적으로 서로에게 재미있거나 별난 내용을 보여준다. 천국 같은 행복한 시간이다. 그리고 많은 부모에게는 악몽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점을 존중한다.
그러나 딸은 시연 장면을 본 케이크나 빵을 실제로 구울 것이다. 그녀의 스크린 경험은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딸도 역시 다른 큰 부분에서 아들과 공통되는 점이 있다. 그녀도 자신을 사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할 경우, 나는 그들이 자랑스러워서, 자랑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그들 둘 다 자신들의 초상을 홍보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권리 포기 각서에 결코 서명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최근에 나는 우리 아이들처럼 블로그와 페이스북, 유튜브, 다른 SNS에 부모들이 올리는 홍보용 사진 촬영에 생활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야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위험한 반란이 일고 있다는 냉소적이고 불길한 소문을 들었다. 프랑스에서는 이제 부모가 아이들의 사진을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면 고소할 수 있고, 부모는 심지어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최근에는 미국 진보 성향 매체 <뉴 리퍼블릭>의 조세핀 리빙스턴을 비롯한 평론가들이 백투스쿨 세트 피스에서 헝클어진 금발 머리의 햇볕에 그을린 아이들과 함께 자식 광고를 하고 협찬 물품을 한 보따리 챙겨간 ‘엄마 인플루언서들’을 비난했다. 좋다, 좋아, 그래서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소셜 미디어에 포스팅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게 뭐든 말이다. 그런데 농담이 아니라 요즘 젊은 친구들은 뭐가 문제인가? 그들은 인스타그램을 좋아하지 않는 거 같다. 그리고 보안에 대해 걱정한다.
지난여름에 중학교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이제 열네 살이 된 아들을 데리고 아일랜드에 갔다. 아들의 요청이었다. 아들은 그 시골 지역이 골프 앱보다 골프가 더 많고 비디오 게임 ‘저스트 댄스’보다 오히려 경쾌하고 빠른 아일랜드 지그가 있는 초록의 조용한 곳일 거라고 상상했다. 아들의 상상이 맞았다. 우리는 너무 외딴곳이어서 지도에도 지명이 표시되지 않은 어느 길 위의 에어비앤비에 머물렀다. 불규칙적인 와이파이보다 더 큰 문제는 더블린에서 어댑터를 가져오지 않아서 휴대전화를 충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 곳곳을 미친 듯 휙 둘러보며 어댑터를 찾아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런데 그때 계시 같은 것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휴대전화가 방전될 때까지 내버려두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휴대전화가 깜박깜박하다가 배터리가 마지막 1%까지 사라지면서 특징 없는 빈 스크린으로 바뀐 지 몇 시간 후, 아들과 나는 머물던 시골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의 술집에 재빨리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술집에서 준 스낵을 먹으며 우리는 동네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고, 그들은 우리에게 그곳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교회까지 갔다 오라고 권했다. 말 잘 듣는 관광객처럼 우리는 걸어서 세인트 아일베로 갔다. 웅장해 보이는 그곳은 십자형 설계도에 따라 헤이즐 컬러의 사암으로 세운 복고풍 고딕 건물이었다. 한여름 밤 기묘한 청록빛을 받은 티퍼레리 자치주의 시골 교회는 관광 명소라기보다는 진짜 성소처럼 보였다. 1500년 이상 종교적 목적으로 이곳을 계속 사용했다는 말을 듣고는 519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라도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가 동로마제국의 수도이던 콘스탄티노플의 전성기였어요.” 아들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아들과 나는 시골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일찌감치 교차로에 이르러 왼쪽 대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 식으로 오후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어두운 아일랜드 시골 마을에서 도보 여행을 시작했다.
사이키델릭 아트가 이상한 우스갯소리와 놀랄 만한 평온을 망라하는 것이라면, 그 도보 여행은 환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이키델릭했다. 우리는 도보 여행 중에 무시무시하게 큰 탈곡기에 타기도 했고, 몇몇 집에 가까이 가보려다가 우리 앞에서 커튼이 쳐지는 경험도 했으며, 별을 보고 길을 찾았고, 20여 마리의 소와 마주치기도 했다. 열광, 공포, 절망, 희열의 순간이 있었다. 가짜 게일어로 즉석 노래를 불렀고, 하나님에 대해 한없이 달콤한 대화를 오래 나눴다.
서서히 저무는 태양에 비스듬하게 비치는 동화 같은 풍광이 무한 증식하는 배경을 지닌 채 온통 초록빛 만화경처럼 펼쳐졌다. 그 풍경은 우리가 걷는 길처럼 이름 없는 음영으로 바뀌었다. 나는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톨킨의 문구를 읊조렸다. “방랑하는 모든 이가…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아, 우리 길을 잃었어요.” 아들이 말했다. 정말 우리는 길을 잃었다. 마침내 수녀처럼 차려입은 두 여성이 우리를 태워서 집으로 데려다줬다. 충전되지 않은 내 휴대전화는 외계 생명체처럼 생경해 보였다. 아들은 침대로 가더니 곯아떨어졌다. 나는 잠이 드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지구를 벗어난 듯한 5시간 동안, 우리는 휴대전화를 가진 모든 사람을 인터넷과 GPS에 묶는 보이지 않는 끈을 끊어버렸다. 내 인생 최고의 경험 가운데 하나일 것이며, 그 순간을 찍은 사진도 전혀 없을 것이다. 아들의 말이 옳았다. 나는 수년 동안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길을 잃은 데다, 찾을 수도 없는 그런 상태. 아니면 휴대전화가 없는 나의 멋진 도보 여행 동반자가 말하듯 자유로운 상태 말이다.
- 패션 에디터
- 김미진
- 에디터
- 이소민
- 글
- Virginia Heffernan
- 포토그래퍼
- 김보성
- 모델
- 송경아
- 헤어
- 김승원
- 메이크업
- 김지현
- 장소
- 나인트리 프리미어 호텔 인사동, 마이클 바이 해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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