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니엘의 유토피아
장-미셸 오토니엘은 루브르에 ‘창조적 개입’을 더하며 프랑스 현대미술사를 새로 직조한 데 이어, 몽트뢰유에 대규모 스튜디오를 지으며 자기 역사까지 다시 쓰고 있다. <보그>는 이례적으로 루브르의 퓌제 안뜰과 메디치 갤러리, 공사 중인 새 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프랑스의 현대미술가 장-미셸 오토니엘(Jean-Michel Othoniel)과 함께 루브르 내 퓌제 안뜰(La Cour Puget)의 계단에 앉아 있다. 그의 시선이 17세기 조각가 장 밥티스트 테오돈의 ‘겨울’과 자신의 회화 <La Rose du Louvre> 사이에서 서성이는 관객에게 머문다. 퓌제 안뜰은 당대 유명 조각과 절묘한 배치를 이루는 여섯 개의 금빛 캔버스를 통해 프랑스 역사와 예술의 영광을 현대적으로 재현하는 루브르의 새 명소가 되었다. 사실 루브르가 현대미술을 허락한 건 이례적인 일이다. 세계대전 직후부터 조르주 브라크, 사이 톰블리, 안젤름 키퍼 등의 작품을 간헐적으로 소개했지만, 30년 전 유리 피라미드와 함께 생긴 퓌제 안뜰에 현대미술품이 내걸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심지어 최근 루브르는 내년 2월까지 예정된 전시 기간을 무기한 연장했다. 루브르가 관련 부서의 만장일치로, 문제의 회화 연작을 모두 소장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올해 루브르 박물관은 유리 피라미드 건축 30주년을 맞이했다. 당시 숱한 논쟁 끝에 탄생해 이윽고 파리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피라미드의 존재와 루브르의 혁신성을 미학적으로 기리기 위해, 이들은 가장 동시대적 예술가 오토니엘을 초청했다.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그는 “꽃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 중 하나이자, 우리를 둘러싼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라는 오랜 믿음을 루브르에서 실천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기념비적 방식으로 루브르에 창조적으로 개입한다. 소장품에 숨은 99가지 꽃의 예술사적 의미 및 인류학적 기원을 찾아 기록한 책 <The Secret Language of Flowers>, 그리고 퓌제 안뜰에서 선보이는 여섯 점의 회화 작품 <La Rose du Louvre>가 그 결과물이다. 유리구슬 작품으로 명성을 얻기 전부터, 아니, 미술가의 삶을 살기 전부터 오토니엘은 꽃에 매료되었다. 열네 살 때 연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꽃과 식물을 노트에 정리한 그는 이들이 내포한 신화가 인간 혹은 인류의 그것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 작품을 “아네모네에 유황을 묻고, 석류를 해부하고, 꽃잎을 벽에 꽂은 작업”으로 꼽는 그가 수십 년 후 주관적인 식물 표본집을 완성한 셈이다. 뒤러의 자화상에 그려진 엉겅퀴, 그뢰즈의 ‘The Broken Jug’(1771) 속 소녀의 옷에 달린 모란 등 그림과 조각은 물론 태피스트리, 프레스코, 건축, 가구 등에서 발견한 꽃의 향연. 그의 책이 인류가 예술에 꽃을 어떻게 차용했는지에 대한 ‘오토니엘식 탐구’라면, 회화는 명화를 읽고 감상하는 법에 대한 ‘오토니엘식 재해석’이다.
<La Rose du Louvre>는 그가 찾아낸 꽃 중에서도 ‘루브르의 장미’라 칭송받는 루벤스의 걸작에 영감을 받은 작업이다. 장미를 포함한 5,000여 점의 소장품을 추린 그는 루브르의 역사를 주시했고, 루브르가 박물관이기 전 성이었다는 사실은 프랑스의 역사까지 들여다보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가 향한 곳은 바로 메디치 갤러리였다. 17세기의 화가 루벤스가 왕비 마리 드 메디치의 의뢰를 받아 그린 그녀의 일생이 24점의 회화로 오디세이처럼 펼쳐지는 곳. 작가는 그중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의 결혼식 장면을 담은 그림을 골랐다. 고개를 젖혀 우러러봐야 할 정도로 큰 그림의 아랫부분, 두 남녀의 발치에 떨어진 장미 한 송이가 보인다. 이탈리아인이었던 그녀는 프랑스 역사에 스스로를 각인시켜야 했을 만큼 외롭게 분투했는데, 루벤스의 장미는 그녀의 관능과 사랑, 운명과 인생을 상징한다. 오토니엘은 이렇게 당대 가장 현대적이었던 화가에, 당대 프랑스 정신을 바꾼 페미니스트에, 그리고 이들을 품은 루브르에 경의를 표한다.
르 몽드도 대서특필한 <La Rose du Louvre>의 루브르 소장 소식에 설사 오토니엘이 뒤돌아 눈물을 훔쳤다 해도 하나 이상할 게 없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2년 동안 거의 매주 화요일(루브르의 휴관일)마다 공간을 배회하고, 작품 사진을 찍고, 리서치에 몰두했기 때문이 아니다. 35년 전, 예술학교에 다니며 미술가의 꿈을 키우던 오토니엘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루브르의 경비로 일했다. 관람객을 감시하는 대신 작품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을 테니 썩 좋은 경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불안과 상처로 점철된 청춘의 긴 여정을 지나 드디어 루브르로 귀향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경의를 표할 만한 루브르의 새로운 역사다.
현대미술가로서 가장 처음 시도한 작품은 꽃을 활용한 작업이었고, 그동안 꽃과 식물로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그런 당신에게 이번 루브르 프로젝트가 더 특별했던 점은 무엇이었나? 현실 세계를 사색하는 건 내게 중요하다. 특히 자연을 관찰하길 좋아한다. 끊임없는 경이의 원천은 실재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자연이야말로 그런 현실의 가장 강력한 반영이기 때문이다. 특히 꽃의 상징성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촉매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나는 실제 꽃에서 추상의 개념을 가져오는 작업을 해왔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이미 회화로 존재하는 꽃에 영감을 받았다. 루벤스가 추상의 과정을 거친 꽃을 현대적으로 재추상화하며 그와 일종의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이 공간을 둘러보라.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 나누는 미묘한 대화가 느껴지지 않나. 무언가를 마주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느껴지는 신중하고 섬세한 감정이야말로 바로 내가 바라는 것이다.
동감한다. 퓌제 안뜰에 들어섰을 때 강렬하게 다가오는 두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17~18세기 조각품과 당신 그림의 절묘한 배치, 또 하나는 유리 피라미드 천장을 통해 쏟아지는 자연광이다. 자연광은 특히 중요하다. 나는 캔버스를 금색으로 칠함으로써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어렴풋한 금색은 빛의 정도에 따라 거울처럼 반사되기도, 벽의 색을 흡수하기도, 회화의 배경이 완전히 사라지는 듯한 효과도 야기한다. 빛의 정도에 따라 어떤 그림은 밝고, 또 어떤 건 어두운데, 그런 식으로 회화가 서로 소통하는 셈이다. 평면 회화가 자연광 덕분에 정교한 설치물로 승화되는 풍경, 작품이 환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상황을 매우 좋아한다.
당신의 회화가 기존 거장들의 조각 작품과 어떤 식의 대화를 나누길 바랐나? 나의 그림은 조각품의 앞이 아닌 뒤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도한다. 거대한 역사적 조각 뒤에 숨어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는 18세기 프랑스식 정원의 전통과도 일맥상통한다. 옛 정원에는 조각 뒤에 자개나 옻으로 칠해서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듯한 움푹 파인 공간이 있었다. 이런 식의 공간이 조각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을 재현하고 싶어 움푹 파인 벽에 회화를 걸었다. 그러므로 이번 작업은 루브르와 소장품에 대한 오마주인 동시에 정원의 역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본래 여기 놓인 조각품도 모두 어떤 정원에 놓였던 작업을 30년 전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다.
루브르가 왜 과거와 현재를 잇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 알 것 같다. 루벤스라는 거장을 오마주함으로써 이 역사적 명화가 새롭게 읽히는 기회까지 얻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루벤스의 그림이 마리 드 메디치의 일생을 담은 산문이라면, 당신의 회화는 한 편의 시다. 루브르를 향한 새롭고 시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싶었다. 권력의 중심에 있던 마리 드 메디치의 일생을 담은 그림은 이 기관에 걸맞게 웅장하고 묵직하다. 그러나 시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루벤스가 그녀의 지위 뒤에 감춰진 한 여인의 감정, 아름다움, 운명 등을 장미 한 송이로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는지 등을 포착할 수 있다. 유명한 그림 뒤에서 미묘하게 드러나는 이런 감성적인 지점을 드러내고 싶었다. 뒤를 돌아본다는 건, 미래에 대한 과거의 비전을 발견하는 일이며, 나는 과거와의 연결과 그 연속성을 믿는다.
이를테면 마리 드 메디치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을 알고 보면 그림 속 장미의 의미가 더 강렬하게 와닿는다. 오늘날 관객들에게 어떤 경험을 제시하고 싶었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프랑스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역사는 아니었다. 이들은 루이 14세나 프랑스혁명 같은 거시사에 익숙하니까. 하지만 마리 드 메디치가 프랑스 역사 및 문화를 바꾼 주인공인 이유는 원래 어둡고 근엄한 나라였던 프랑스가 그녀 이후 정신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감성적이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시적인 면모를 사랑하는 나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건, 당시 그녀가 즐거움과 빛, 예술의 비전을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이탈리아 예술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루이 14세의 성을 짓기 위해 베르니니 등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넘어왔고, 이로써 프랑스가 남유럽과 본격적으로 연결되었다.
이는 장미를 포함한 5,000점의 소장품 중 왜 이 작품이어야 했는지 이해하는 데 좋은 단서가 된다. 현대미술가로서 예술적 모티브로 재해석한 역사를 동시대인에게 알리고자 한 이유는 무엇인가? 마리 드 메디치는 프랑스인들에게 맞서야 했다. 이탈리아인을 왕비로 맞이하는 건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테니까. 그녀는 당대 페미니스트라 할 만큼 주체적이고 강한 여성이었다. 이는 과거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유럽 전역이 매일 이민자들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고, 반겨야 한다. 우리가 프랑스 문화라 알고 누리고 있는 건 온전히 프랑스만의 것이 아니다. 나는 시적인 비전 뒤에 항상 정치적인 비전이 존재하고, 이것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까지 제공한다고 믿는다. 예술을 통해 역사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미래를 알기 위해서다.
회화 연작 <La Rose du Louvre>가 이곳에 영구 설치됨으로써 전 세계 관객들이 루브르를 산책하거나 즐기는 방법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루브르를 찾는 관객들만 봐도 무조건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뛰어간다. 오늘날의 우리는 모두 정신없이 산다. 나는 이들에게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는 방법을 찾아주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회화의 디테일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꽃의 비밀스러운 의미를 찾도록 하고, 궁극적으로 시적인 비전을 공유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엄청난 파쿠르 같은 루브르에서 잠시나마 멈춰 서 내 작품을 들여다볼 뿐만 아니라, 계단과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를 바란다.
현실의 시간을 늦추는 것, 당신이 생각하는 현대미술의 역할인가?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더 큰 관심사 중 하나는 ‘리얼 월드’와 연결점을 찾는 일이다. 현실 세계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경이로움을 제시하고 싶다. 예컨대 꽃이나 석양을 보며 즐거움을 얻는 건 인간의 아주 원초적인 행위다. 지하철역에 작품 ‘야행자들의 키오스크’를 만들 때도, 바쁘게 사는 이들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라고 머뭇거리게 하고 싶었다. 지금 현실에서 벗어나고,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함으로써 또 다른 현실로 이끄는 것. 단 2분 동안이라도 호흡을 고르고 복잡한 삶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어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루브르와 프랑스의 역사뿐 아니라 작가 개인의 역사에 대한 시도이기도 하다. 루브르에서 경비로 일하며 예술가의 꿈을 키운 당신 입장에서는 더욱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나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생테티엔의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다. 그곳에 있는 MAMC라는 훌륭한 현대미술관에서 현대미술을 배우고 사랑하게 되었다. 간혹 젊은 작가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는데, 내겐 작은 희망의 창문 같았다. 파리에서는 학비를 벌기 위해 루브르에서 매일 그림을 지키고, 방문객들을 지켜보고, 청소를 했다. 35년의 시간이 흘러 전시를 위해 다시 이곳에 왔을 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감동이었다. 긴 여정이었지만,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나가고 싶은 이들에게는 내가 일종의 희망적인 지표가 되지 않을까. 여기, 이 회화 작품은 공적 혹은 사적으로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증거이자, 스스로를 믿어야 하는 강력한 이유가 된다.
그로부터 이틀 후, 우리는 내년 1월 완공 예정인 새 스튜디오에 초대받아 몽트뢰유로 향했다. 4,000㎡에 이르는 넓이에 웬만한 건물은 품고도 남을 높은 천장이 인상적인 스튜디오는 본래 작은 정원이 딸린 집이었다가 1919년부터 철강소로 사용되었다. 공사가 한창인 공간을 안내하던 오토니엘은 몽트뢰유 특유의 낮은 건축물이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에 서서 말했다. “일대를 바라보는 큰 작품을 한 점 설치할 계획이에요. 여기서 창의적인 무언가가 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이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지역 예술가들과 도시의 담론을 진행해가려 해요. 물론 낡은 건물은 문화유산처럼 보존할 겁니다.” 기대감으로 한층 더 밝아진 그의 목소리는 앞으로 이 공간에서 벌어질 무궁무진한 예술적 사건과 이 공간이 야기할 문화 지형의 재편을 예고한다.
이번 출장 기간 동안 나는 기꺼이 오토니엘의 작업을 찾아 나서는 순례자를 자처했다. 베르사유 정원, ‘수상연극의 숲’에 영구 설치된 ‘아름다운 춤’(2015)은 수백 개의 구슬이 황금색 선을 그리며 태양왕 루이 14세의 유려한 몸짓을 재현하고 있었다. 엑상프로방스의 와이너리이자, ‘예술보호구역’ 샤토 라 코스트에서는 영적인 면모를 체감했다. 마을 입구의 나무에는 ‘사라진 육체’를 닮은 목걸이 작품이 걸려 있었고, 안도 다다오가 지은 작은 예배당 옆에는 순교자의 피처럼 붉은 십자가가 서 있었다. 이에 비해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공간에서 선보인 작업은 매우 진취적이었다. 진입로에 60m 길이의 수로처럼 설치된 ‘La Ligne Infinie’와 다양한 표정의 빛을 반사하며 공간을 압도하는 ‘Îles Singulières’(폴 발레리가 쓴 시에 영감을 받은 제목으로, ‘유일무이한’의 뜻)는 유리벽돌로 지은 ‘건축적 조각’의 결정판이자 세상의 생명력을 전하는 대지 미술의 다른 형태였다.
현재 스튜디오의 1층이 쇼룸 역할을 하는 데다 마침 피악(FIAC) 아트 페어 기간이었기 때문에, 오토니엘은 인터뷰 와중에도 몇몇 미술 관계자와 컬렉터들을 만나야 했다. 이곳에는 유리로 만든 구슬 및 벽돌 작업 등 오토니엘 작업의 정수가 전시되어 있다. 이런 작품은 작가에게 눈부신 명성을 안겼지만, 사실 유리는 현대미술사가 도외시해온 대표적인 공예 재료다. 그리고 이는 그가 지금껏 미술 사조에 편승하지 않고도, 독자적 삶의 감성과 경험, 낭만적 환영을 반영한 작업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가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몇 년 전, 거대한 흰색 목걸이가 서울 유명 편집매장의 로비를 차지한 적 있었다. 건축적 규모로 확대된 목걸이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환상적인 경험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의 유리구슬이 완벽하게 아름답기만 한 적은 없었다. 무라노 유리 장인들의 숨으로 완성한 구슬은 각자 흠집과 상처를 지니고 있는데, “구슬은 좋건 나쁘건 인생의 한 굽이를 도는 흉터, 기억하고픈 슬픔과 아픔, 회한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부적이다”라는 말을 기억하면 더 애잔하다.
실제 오토니엘의 초창기 작업은 상실과 부재, 절망과 상처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상실과 소멸을 애도하는 작업 ‘사제복을 입은 자화상’(1986)과 첫 번째 유리 작품이자 성 소수자들을 통해 내면의 상처에 직면하는 ‘상처-목걸이’(1997) 사이의 시기, 유황(Soufre, ‘고통(Suffer)’과 같은 발음)으로 만들어낸 초기작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괴하고 음울하다. 1990년대 초부터 구슬 작업을 하면서 비로소 오토니엘은 반짝임과 아름다움이 “정신적 교감의 통로이자, 또 다른 세계로 발을 들일 수 있는 일종의 문”과 같은 본질적 요소임을 순순히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스튜디오는 사적 소우주에서 벗어난 오토니엘이 끝내 유토피아를 짓고자 하는 꿈의 공간이다.
어쩌면 내년 초에 선보일, 직접 조향한 딥티크의 장미 향수와 캔들도 그 일환일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 재료의 경이로움, 진실한 감정 같은 근원적인 것”을 사랑한다는 그의 세계 한가운데에 ‘관계’가 있다. 브랜드와의 협업이 더 다양한 관중을 만나는 방법이냐는 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은 자기 세계에 타인을 초대하기 위해 향이라는 요소를 사용하고, 서로 친밀한 경계로 발을 들이게 되죠. 제 이름을 딴 향수를 뿌린다는 건 제게, 그들과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손을 뻗어 저의 시각을 그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건 현대미술가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일 겁니다.” 오토니엘의 언어로 하자면, ‘희망’이다.
이 새로운 스튜디오가 인상적인 건 지난 수십 년간 작가로 산 당신이 여전히 꿈꾸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공간이란 비전과 가능성, 청사진을 간직한 유기적이고도 영적인 곳이니 말이다. 나를 비롯한 스튜디오 팀원들이 가장 기대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다. 이 공간은 내 작업의 제스처에 큰 변화를 줄 것이다. 크기 면에서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을 자유는 물론 페인팅이나 드로잉 같은 작업에도 색다른 에너지를 부여하리라 본다. 안무가, 무용가, 음악가, 배우 등 다양한 예술과 협업도 진행해보려 한다. 방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도 있는데, 누구든 머물면서 나와 작업을 함께 할 수 있다. 또한 이 스튜디오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적 의미의 실험도 내포하고 있다. 10년 후에 재단을 만들 수도, 가까운 시일에 서점이나 카페를 열 수도 있다. 지속적으로 작업을 발전시킬 수 있음은 물론 다른 시각에서 작업을 확장해 바라볼 수도 있다. 도심 속 오픈 스튜디오의 개념이랄까, 스튜디오 안에서 도시의 활기를 느꼈으면 한다.
예컨대 북 페어를 열어도 충분히 좋을 것 같다. 1960년대부터 유럽에서 가장 큰 동화책 페어가 몽트뢰유에서 열리고 있다. 그러잖아도 이 페어와 협업해 대담이나 강연 같은 걸 열어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 괴팅겐에 자리한 슈타이들의 출판사 덕분에 그 일대가 ‘슈타이들빌레’라고 불리듯, 이곳도 이른바 ‘오토니엘 마을’이 되는 거 아닌가?(웃음) 이 지역에는 이미 많은 예술가들이 살고 있다. 비교적 저렴한 생활권에 속하다 보니 특히 젊은 작가들, 뉴미디어를 다루는 작가들이 많지만 더 많은 예술가들을 불러들이려 한다.
이들과 함께 예술을 통해 오래된 건축물, 역사적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음으로써 도시를 보존하고 싶다.
새 스튜디오에서의 삶은 예술적 커리어에 또 다른 국면을 열어줄 것 같다. 특히 이 공간이 속한 커뮤니티를 위해 무언가 하고자 하는 모습은 굉장히 반갑게 들린다. 예술가로서 커뮤니티를 위해 기여한다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허허벌판에서 혹은 높다란 성에 갇혀 살 수 없다. 도시의 커뮤니티와 함께하는 건 내가 원하는 것인 동시에 내 작업의 일부이기도 하다. 공공 미술에 몰두하는 이유도 사람들의 존재, 그들의 몸과 직접 관계 맺길 좋아하기 때문이다. 예술적 배경지식이 없는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희망과 즐거움을 전하고 싶다.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시와 정치의 연결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우리의 현실적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소다. 내가 이 벽돌 작품, 아고라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지금 들어와 앉아 있는 작품 ‘아고라’는 ‘조각을 짓는 예술가’인 당신의 건축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오토니엘이라는 작가가 현재 어떤 방향을 보는지를 말해주는 작품 아닐까?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들어갈 수도, 살 수도 있는 조각을 만들고 싶다. 여기에 예술이란 우리를 외부의 혼란한 세계로부터 단절시켜줄 수 있다는 믿음을 더했다. 아고라는 그리스에서 공공 토론과 표현의 자유를 위한 회의 장소였다. 사회의 비전을 논쟁하던 곳이자, 문명의 아름다움과 예술성을 상징하는 장소. 우리에겐 이런 장소가 절실하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넘쳐나지만, 정작 스스로를 표현하기엔 더욱 힘든 상황이 됐다. 나는 예술은 다사다난한 세상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할 수 있고, 이런 위기를 극복하게끔 도와준다고 본다. 진정한 대화를 나누고 지키는 공간, 사회적, 정치적 압박이나 방해 없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 지난해 뉴욕에서 건축가, 예술가들과 이에 관한 대담을 한 적도 있다.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인 생각이라 하겠지만, 사실 내 목표는 그런 유토피아를 현실 속에 짓는 것이다.
이런 조각을 ‘짓는 데’ 벽돌 모양의 재료는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해 보인다. 유리구슬을 사용하다 어느 순간부터 벽돌을 작업에 적극적으로 가져왔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몇 년 전 인도 여행 후부터다. 하지만 25년 전 벽돌과 유황을 이용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90년대부터 관심 있게 봐오던 재료 중 하나였다. 당시 나는 무언가를 지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지만, 어쨌든 작은 벽돌이 가진 시적 의미, 예술사학적 의미에 매료되었다. 바벨 타워도, 페르메이르가 즐겨 쓰는 노란색 벽도 벽돌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지금도 미국인들은 시위할 때 돌 대신 벽돌을 던질 정도로, 동서고금, 전 지구적 재료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당신이 활용하는 유리벽돌도 인도 피로자바드 지역 장인들과의 협력하에, 그들의 전통 기법을 활용해 현지에서 만드는 걸로 알고 있다. 맞다. 유리 장인을 만나기 위해 델리와 피로자바드 사이를 지날 때, 도로 주변에 엄청난 양의 벽돌이 쌓여 있는 걸 봤다. 알고 보니 인도인들은 땅을 먼저 구입한 후, 벽돌을 한 장, 한 장 장만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도로에서 본 수많은 벽돌은 누군가가 꿈꾸는 집의 일부가 되기 위해, 어떤 인생에 한 점을 찍기 위해 기다림을 견뎌내고 있었던 셈이다. 일종의 염원과 에너지의 집합체랄까. 그 풍경이 내겐 거대한 감동으로 다가왔고, 벽돌은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희망의 연결 고리로 자리매김했다.
당신은 명실상부 성공한 예술가다. 예술가에게 성공이란 어떤 의미인가? 더 다양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이자 다른 사람들을 더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 이 관대함은 스튜디오와 한 도시를 잇고자 하는 프로젝트 같은 작업을 구상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내게 성공이란 곧 다른 이들과의 연결이자 소통이며,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영광의 순간이다. 스스로를 보다 활짝 열어 보일 수 있는 기회다.
언젠가 “내 작품은 나의 자화상”이라고 말했다. 초기작은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작품이 가진 치유의 힘은 추상적인 위로로 확장되었다. 작가로서의 화두를 확장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사람들과 함께 사회를 위한 무언가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자, 이것이 현재의 나의 자화상이다. 나의 작업을 통해 다른 이들의 힘과 에너지를 모은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당신 말대로, 한때 나는 이와 완전히 반대였다. 고립된 세계에서 홀로 작은 작품을 만드는 시기도 있었다. 그리고 내 세계를 공유하고, 자신을 열어 보이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일종의 플랫폼이 되어 다른 이들을 잇고자 소망한다.
그렇다면 판타지는 무엇인가? 혹자는 “내일 당장이라도 예술계를 떠날 수 있는 것”이라 답했는데. 나는 절대 그만두고 싶지 않다.(웃음) 나의 판타지는 가족을 만드는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인 가족. 다양한 분야, 다양한 예술가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동료이자 친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공유하고, 토론하고, 가능하다면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랄까. 이건 판타지, 그 이상이다. 꿈이다.
- 글
- 윤혜정
- 피처 디렉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신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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