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잘 쓰는 박정민
배우 박정민은 책과 함께 밤낮 깨어 있고 끊임없이 사유한다. 그의 쓸 만한 진담 같은 농담과 농담 같은 진심.
글 잘 쓰는 박정민’은 한동안 나에게 재목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음을 주장할 증거였다. 박정민은 2013년부터 4년 가까이 <탑클래스>에 글을 썼다. 말로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언희(言喜)’가 필명이었다. 처음 그의 글을 발견하던 날, 공개된 모든 글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때부터 대화에 박정민만 등장하면 그의 글을 들먹거렸다. 대화는 다음과 같이 흘러갔다. “‘응팔’에 성보라 남친 진짜 짜증 나지 않냐?” “아~ 박정민? 그 배우 글 잘 써.” 또 다음과 같이 흘러갔다. “<동주> 보고 한참 울었네. 송몽규 역 맡은 배우 진짜 잘될 것 같아.” “아~ 박정민? 그 배우 글 잘 써.” 물론 나만 박정민이 글 잘 쓰는 줄 알던 시간은 금방 끝났다. 연재한 글은 <쓸 만한 인간>으로 묶여 책으로 나왔고 베스트셀러 자리에 안착했으며 얼마 전에는 시대를 반영해 꼼꼼하게 수정을 거친 개정 증보판도 나왔다.
박정민의 글은 재미있고 술술 읽힌다. 깔깔 소리 내어 웃기보다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읽게 되는 글, 펑펑 울기보다는 눈을 비비면 사라질 정도로 나만 아는 눈물이 나오는 글이다. 대학 면접 시험, 온갖 아르바이트 경험, 뭐 하냐는 친구의 질문에 대답이 길어지던 시간, 여행 중에 일어난 일 등 박정민은 자신을 소재 삼아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 글을 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세상에서 오직 자기만 하찮게 여기는 사람의 글에서는 비릿한 자괴감이 유머로 승천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나 같은 것’이라고 쓴다. 자기 비하, 자책, 자괴감 3종 세트를 동력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의 글은 어김없이 ‘다 잘될 거다’로 끝난다. 지구 반대편에서 ‘삥’ 뜯겨도, 강박 증세를 진단받아도 ‘우리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라는 메시지로 끝난다. 이런 결론은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달리 신기할 정도로 전혀 무책임하게 들리지 않는다.
박정민은 배우로서 인지도가 올라가도 ‘가끔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나오는 사람’으로, 글을 쓰지만 글씨만 쓸 줄 아는 평범한 옆집 남자로 자신을 소개한다. 늘 자신의 위치보다 한 계단 아래에 서서 다음 걸음을 내디딜 준비를 한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길 바라며 하루를 치열하게 채우는 사람이 말하는 희망은 희망적이다. 그래서 <쓸 만한 인간>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힘들 때 한술 뜨는 뜨거운 국밥처럼 일상 치료제가 된다. <쓸 만한 인간>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건, 자신이 생각보다 강한 인간임을 믿고자 하고 독자들도 그런 힘이 있다고 믿는 진심이 전해지기 때문 이다. 돌이켜보니 교훈이 있었던 시트콤이나 웃다가 울고 마는 희비극처럼 <쓸 만한 인간>은 농담 같은 겉모습을 하고 사실은 사유를 하고 있다.
정제된 정보로만 이미지가 형성되는 배우라는 신비로운 존재의 속내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드문 기회가 그의 글을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별 후 눈앞을 가리는 게 눈물인지 눈곱인지 알 수 없다”, “찌질하다의 반대말은 찌질했었다” 같은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예민한 감각과 섬세한 시선을 가진 종족뿐이다. 박정민은 단어와 뜻과 발음을 저글링하듯 사용하는 문장가다. 그가 선사하는 언어가 주는 리듬과 자극은 뇌세포를 즐겁게 한다.
처음 책이 나왔을 때 박정민은 “글을 말로 옮기는 배우 일을 하다가 말을 또 글로 표현해보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말과 글의 차이를 헤아리고 동력으로 삼는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은 시간이 흐를수록 생생하게 다가오는 중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필모그래피가 입체적으로 확장되는 동안 우리가 목격한 건 뛰어난 연기력만은 아니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 서번트 증후군 연기를 위해 6개월간 봉사 활동을 하고 <변산> 래퍼를 연기하기 위해 1년 넘게 랩을 배우고 가사를 썼으며 <타짜: 원 아이드 잭>에서 대역 없이 현란한 카드 기술을 선보이는 모습에서 계속 나아지고자 하는 한 배우의 무구한 노력을 보았다. 배우의 숙명이 끊임없이 인간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이라면 박정민은 그 노력을 어떤 경우에도 멈추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박정민이 책방을 시작했다. 그동안 읽었던 책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어서, 책 읽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열었다. 새로운 신선함과 오래된 익숙함이 공존하는 합정동 길가에 책방 ‘책과 밤, 낮’이 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책꽂이에 꽂힌 책은 박정민의 것이다. 형광펜으로 줄이 쳐 있고 호스텔 할인권이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다. 박정민은 책 메뉴판에 이 책들을 추천하는 이유를 적어두었다. 가능하면 매일 이곳에서 커피를 내리고 재고를 정리하고 손님들에게 내줄 코스터에 좋은 문장을 쓴다. 책방은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박정민의 방을 닮았다. 벽에는 <패터슨>, <레옹> 엽서가 붙어 있고 구석에서는 <쥴 앤 짐>, <와이키키 브라더스> 비디오테이프가 돌아간다. 그리고 이런저런 말이 포스트잇에 적혀 있다. 팬이라면 이곳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이고(실제로 향 냄새가 황홀하기도 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애서가 박정민이 직접 읽고 검증한 책을 만나볼 수 있어 유익할 것이다. 책방은 한 인간에 밀착해 그 우주를 보여주는 직업을 택한 박정민의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힌트로 가득 찬 물리적 공간이다.
초록색 네온사인이 꺼진 책방의 낮. 박정민은 늘 그렇듯 블랙 스쿠터를 타고 탈탈탈 소리를 일으키며 출근했다. 헬멧을 벗자 얼핏 무심한 듯 보이나 사실 선하고 지혜로운 박정민이 보였다.
얼마 만에 출근인가. 어제도 마감 치고 갔다. 이 동네에 주로 있으니까 웬만하면, 시간 되면 들른다.
책방에 진열된 책에 밑줄 같은 흔적이 있었다. 독서 습관이 궁금하다. 그때그때 다르다. 각을 잡고 책을 볼 때는 밑줄 치면서 보는데 그냥 카페에서 보거나 이동하면서 볼 때는 그렇지 않다. 책을 모시면서 읽는 편은 아니다. 막 본다. 뭐 흘리기도 하고. 사실 예전에는 페이지를 접지도 않고 소중하게 본 적도 있는데 나중에 보면 그 책을 안 읽은 것처럼 느껴졌다. 본 흔적이 있어야 마음이 오히려 안정되어서 책방에도 내 책들을 갖다놨다.
좋아하는 책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새로운 책 리스트는 어떻게 추가하고 있나. 나는 여기서 일하지만, 책은 서점에서 산다. 총판에서 싸게 주문해 읽어도 되지만 그러면 책이 소중하지 않은 느낌이다. 서점에서 책을 훑어보고 사서 읽고 괜찮으면 여기에 갖다놓는다.
책 메뉴판을 읽어봤다. 평소에 책을 읽으면 감상문을 쓰나. 남겨놓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책은 시간 간격을 두고 몇 번씩 읽는데 그때마다 느껴지는 게 다르다. 그래서 전에 써놓은 걸 보면 좀 창피하다. 내가 핵심을 찌르지 못했구나 하면서. 책 메뉴판을 비치한 이유는 “책을 한 번도 안 읽어봤는데 어떤 책을 읽는 게 좋을까요?”라고 물어보는 분들이 꽤 많아 도움을 드리고자 함이다.
책방 주인은 책 읽는 사람들을 마음껏 관찰할 수 있는 자리다. 책방을 시작하고 알게 된 책 읽는 사람들의 습성은. 천차만별이다. 가볍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을 보는 분들이 많다. 구석에 있는, 사람들이 잘 안 보는 책을 꺼내 보는 분들도 있는데 그러면 기분이 약간 좋다. 사실 책방도 유지해야 하니 책이 팔려야 한다. 잘 팔리는 책 중 내가 잘 안 읽는 책도 있는데 놔둬야 하니 읽게 되고 그러면서 오히려 출판 동향을 따라간다. 책을 소비하는 독자였을 때는 읽는 책이 한정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책을 접하는 경로가 다양해서 영향을 받고 재미있어지는 것 같다. 전혀 관심 없던 작가의 책을 읽으며 놀라기도 하고.
당신이 생각하는 요즘 출판 트렌드는. 공감이다.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싶은 책. 쉽게 씌어 있고 그 안에서 ‘맞아 맞아’, ‘나도 나도’ 할 수 있는 책. 한 단계 더 나아가 그 작가의 어떤 견해나 더 깊은 사색을 얻는 것 같다. 그런 책이 아주 잘 나간다.
책과 밤, 낮은 밤 12시까지 문을 연다. 늦은 밤까지 불을 켜고 합정동의 밤을 지켜보고 있다. 책방에서 큰길 하나만 건너면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굉장히 핫한 골목이다. 이 동네가 이렇게 조용한지 몰랐다. 조용한 동네에 찾아와주는 분이 많아져 밤에도 살짝 복작복작한 걸 보면 기분이 묘하다. 건물주가 제일 좋아하신다.(웃음) 사실 고민도 많다. 지금은 박정민이 하는 책방이라서 오는 분이 많은데 이 공간이 정말 책방이라는 공간만으로도 남아 있을 수 있을지. 주변에 사는 분들, 책 좋아하는 분들이 와서 공간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인데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목받는 걸 부끄러워하고 불편해하는 성격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작가와 책방 주인이라는 자리는 성격과 부합하나. 책방 주인은 사실 성격과 맞다. 조용히 앉아 있으면 되니까. 그런데 나를 보기 위해 책방에 오는 분들이 있다. 그래서 카운터에 앉아 있으면 책방 분위기가 조금 묘하게 형성된다.(웃음) 다들 쳐다보면 좀 주눅 드니까 웬만하면 주방에서 음료를 만들어 내드리며 숨어 있으려고 한다.
팬 미팅을 처음에 혼자 기획했다거나, 영화 촬영장에 직접 운전해서 다녔던 에피소드 등을 종합해보면 무슨 일이든 혼자서 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게 편하다. 누굴 시키거나 부탁하면 마음에 안 들었을 때 누굴 탓하게 된다. 매도 내가 맞는 게 낫다. 성격상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게 빚지는 것 같아 싫어서 웬만하면 혼자 하려는 것도 있다. 대체로 감수할 수 있으니까.
<쓸 만한 인간> 개정 증보판이 나왔다.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글에 대해 사과하고 손을 봤다. 외부 피드백이 있었나, 아니면 세월이 선사한 자기 검열인가. 둘 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게 20대 중·후반 때다. 갓 데뷔해 나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고 그냥 배우라는 타이틀은 갖고 있을 때쯤이다. ‘누가 보겠어?’ 하는 마음으로 막 썼다. 한 달에 한 번 써서 냈는데 재미있게 보는 분들이 생겼다. 인터넷에 쓰는 글 같은 거였는데 책으로 묶여 나오게 됐고 그 과정에서 나라는 배우의 인지도도 올라갔다. 그러면서 별로 행복하지 않아져 그만뒀다. 찬찬히 생각해봤는데 아무 생각 없이 썼던 그때는 별로 문제 되지 않았던 사항이 요즘엔 문제로 보였다. 이미 뱉어버린 걸 고칠 수 없는 와중에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제안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분이 글이라는 건 따로 떼서 부유하기 딱 좋은 형태이기에 신중해야 한다고 하시며 수정에 도움을 주셨다. 매우 감사했고, 그래서… 밥을 샀다.(웃음)
읽는 사람을 인식하는 순간 창작욕은 저해되지 않나. 글쓰기가 재미없게 느껴지던 순간은 언제부터인가. 내 글을 계속 보던 분들이 갖는 기대가 있다. 내가 어떤 감독의 영화를 봤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또 저런 영화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는데 감독은 하고 싶은 게 따로 있는 느낌이다. 대중의 기대 때문에 하고 싶은 영화를 못하고 다른 걸 하는 상태. 나 역시 하고 싶은 말은 못한 채 대중이 원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다 똑같아지고 재미도 없어서 “이젠 못하겠습니다” 정중히 말씀드리고 연재를 관뒀다. 글이라는 게 무서워졌다. 몇몇 출판사에서 책을 낼 의향이 있는지 제안하기도 했는데 다 거절했다. 세월이 변하며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될 수 있고, 아직 젊은 배우고, 이 젊은 배우가 할 수 있는 말이 아직은 많이 없을 것 같았다.
글은 생각의 정리이자 감정의 교류다. 누군가는 글을 쓰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도 한다. 책으로 묶인 글은 당신에게 어떤 역할을 하던 글인가. 남들을 즐겁게 해주면서 의미를 얻는 글이다. 컴퓨터 하드에만 있는 글은 더 분노가 가득하다. 그런 글은 잘 쓰는 분들이 많고 굳이 내가 책으로 낼 이유도 없다. 사실 글을 쓰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본업이 배우이기 때문이다. 자칫 글로 실수했을 때 나만 피해를 입지 않는다. 동료들이 다 피해를 입는다. 특정 책을 추천하기도 쉽지 않다. 좋게 봤는데도 어떤 성향이 강한, 색깔이 강한 책은 추천을 못한다. 자중하려고 한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위치에 있기에 글쓰기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 어떤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위치다. 방금 한 얘기와 같다. 상업 영화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 영화를 만드는 특정 배우가 너무 큰 목소리를 내면 그 영화 안의 역할로서가 아니라 자꾸 그 배우가 튀어나온다. 예능 프로그램에 못 나가는 이유도 배우 박정민이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게 힘들어서다. 나라는 인간에 대한 자신감도 없을뿐더러 박정민이라는 사람을 보여주면 대중이 영화에서 자꾸 박정민을 보게 될 듯한 우려와 기우가 생긴다. 그리고 감독님이나 작가님 혹은 모두가 하고 싶은 얘기로 존재하는 게 영화배우의 가장 큰 덕목이자 어쩌면 좀 불행한 제한이기도 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할 수 없고 개인적 성향도 그렇다. 나서는 걸 잘하지 못해 숨어 있는데 언제 또 바뀔지 모르겠다. 물론 목소리를 높이는 분도 있고, 그런 분들을 존경한다.
글을 쓸 때 즐겁게 쓰는 편인가. 뼈를 깎아가며 쓰나. 뼈를 깎아가며 쓰는 글이다. 즐겁게 쓰지 않는다. 진짜 가끔은 정말 분노에 차서 쓰는 글도 있고 아니면 너무 슬퍼서 쓰는 글도 있다. 사실 예술이라는 형태를 띠는 작품은 행복해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통 결핍이 돼서, 내가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이걸 말을 해야겠기에 나오는 것이 더 많은 듯하다.
슬픈 농담 같은 글이 많아 고통스럽게 쓴 글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전업 작가가 아니니까 그나마 낫지 않을까. 실제로 글로만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들은 얼마나 더 힘들겠나. 공감을 얻는 글, 남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주는 책은 정말 여러 생각과 고통 끝에 ‘그래도 좋은 이야기를 해야지’ 하면서 쓰는 글일 것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같은 책을 보면 굉장히 슬프다. 누군가는 거기서 용기를 얻을 수 있지만 나는 이 작가가 너무 힘들겠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북 토크에서 전한 얘기인데, 배우는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책임을 나눠 지는데 작가는 거의 90%는 혼자 진다. 책 앞에 “모든 작가들에게 넘볼 수 없는 존경을 표한다”고 쓴 건 ‘나는 당신들의 세계를 넘보지 않습니다. 나라는 미천한 인간은 당신들의 고통의 10분의 1도 못 느낍니다’라는 의미였다. 책을 쓰는 사람들은 너무 힘들 것 같다. 그 정도의 고통을 감수하는 분들이니 책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작가가 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문장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하나. 보통 ‘어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보다 ‘어떤 문장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다. 내 글을 쓴다면 좋은 문장을 쓰고 싶다. 이 책에 해당되진 않을 거다. 좋은 점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리스본행 야간열차> 같은 책은 정말 명문이 가득하다. 책방에서 코스터에 문장을 적어 차와 함께 내드리는데 자주 꺼내 쓰는 책이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명문이다. 그런 글을 쓰는 작가들을 보면 부럽고 좋은 문장을 쓰고 싶다.
좋은 문장은 어떤 문장인가. 간결하면서 날이 서 있는 문장. 그리고 사색의 결과가 명쾌하게 들어간 문장. 가볍게 생각해서 나온 문장은 아니다 싶은 문장. 생각과 생각이 깊이 꼬리를 물고 가서 끝내 나온 문장. 그런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감을 얻어내며 탁 다가오는 문장. 수식어가 전혀 필요 없는 문장이기도 하다.
문장을 눈여겨보는 사람일수록 맞춤법에 민감하다. 당신은 과잉 교정 인간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런데 시나리오 볼 때 약간 나쁜 버릇이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갑자기 ‘아이, 이건 비문인데?’ 하며 개입할 때가 있다. 하지만 사실 그것마저도 잘 해결해내는 배우가 좋은 배우다.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나 감독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설계도를 짜는 거지 디테일까지 다 신경 쓰기 힘들다. 배우는 작가가 얼기설기 짜놓은 설계도를 구체적인 말로 구현해내야 한다. 태생적으로 센스를 지닌 사람이 아니면 책을 좀 봐야 한다. 그런데 ‘무조건 책을 봐야 해, 책을 안 보면 배우가 아니야’ 같은 꼰대 마인드는 아니다. 주변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데 연기를 너무 잘하는 애들도 많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말 센스가 있다. 어떤 한계를 느낀다면 책이 꽤 도움을 주지 않을까 권유하는 정도다.
개정 증보판에는 직접 그린 그림도 실렸다. 개정 증보판을 내기 위한 그림이다.(웃음) 출판사에서 일러스트를 넣겠다고 했다가 직접 그리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서 그렸다. 그림을 배우고 있다.
그림을 배우는 이유는.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어서. 그림 그리는 동안 식은땀 흘리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쓰기와 읽기 중 무엇을 더 좋아하나. 아직은 읽기를 더 좋아해야 할 때다. 책 읽기도 그림과 비슷하게 생각하기 싫을 때 좋다. 약간 진공 같은 상태가 된다.
남들 CDP 들고 다닐 때 MP3 들고 다니고, 남들이 즐기는 책이나 영화는 굳이 안 보고, 남들 핑클 좋아할 때 써클을 좋아했다. 마이너적 성향은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양분이 된다. 메이저한 것들은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눈에 보인다. 귀에 들리고 뭔지 알겠다. 재미있고 좋다. 마이너한 것들을 찾아 나서는 건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 나서는 거다.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 건 나도 좋아하니 나만 좋아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정 같은데 거기서 오는 매력이 있다. 그런 짓거리들을 하면서 오는 희열이 아직도 있다.
마이너적 성향은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연기도, 글도 대충 다 아는 걸 얼마나 신박하게 표현해내느냐의 싸움이다.
근면이 유일한 재능이자 재산이라고 얘기했다. 쉬는 걸 잘 못한다. 영화를 찍고 홍보하는 일 외에 뭔가 하는 게 쉬는 거라 생각한다. 다들 좀 쉬라고 하는데 난 쉬고 있는 거다. 손님이 많아져 몸이 힘들지만 책방도 내가 쉬는 방식이다. 집에서도 영화 보거나 책을 읽으며 계속 뭔가를 한다. 배우들과 작가들이 늘 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노력이다. 나만 근면 성실한 건 아니다.
우리 사회는 근면 성실함을 미련하고 고루하고 답답하고 순진하게 여긴다. 그 가치를 믿고 살기 힘들 정도로 무시된다. 나는 믿는다. 계속 태생적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끼가 있거나 어릴 때부터 남들 앞에서 연기하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아니다. 교과서만 보고 지내던 20년이 넘는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계속 뭔가를 하려고 했다. 지금 이렇게라도 활동하는 건 그 덕이다. 내가 이 꿈을 갖고 산 짧은 시간 동안 남들만큼 하기 위해 많은 걸 보고 많은 걸 배우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많은 걸 얻었다. 나 혼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로부터 배운 걸 내 것으로 체화하려고 하던 시간이 나를 이렇게라도 만든 것 같아 노력의 가치를 믿는다. 대본 연습을 24시간 하는 노력이 아닌, 계속 뭔가를 해내고 싶어서 했던 수만 가지의 행위가 내가 밥 먹고 살 수 있게 했다.
개인적으로 <동주> 개봉을 앞두고 했던 인터뷰가 잊히지 않는다. 다 한철일 뿐 <동주>가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생계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늘 그 불안에 사로잡혀 산다.
열등감 역시 여전히 에너지로 작용하나. 열등감은 좋은 에너지다. 그 누구에게도. 좀 괴롭지만.
그 뒤로도 <그것만이 내 세상>, <변산>, <사바하>, <타짜: 원 아이드 잭> 등 이른바 유명 감독, 유명 배우와 작품을 찍었고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도 똑같이 생각한다. 언제 고꾸라질지 모르니까. 배우는 누가 찾아줘야 하는 직업이니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동주>로 상도 받고 잘한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너 정도 되는 상황과 실력 안에서 잘한 거야’라는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넌 정말 최고야’라는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전보다 나은 걸 보여줘야 하니 나 자신과 계속 싸운다.
열등감과 자학은 에너지가 될 수 있지만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언젠가 픽 하고 쓰러질 수도 있다. 아직은 갈 길이 구만리라고 여기니 조절 가능하다.
말미에 늘 적힌 “그래도 잘될 것이다” 같은 문장은 소망에 가까운가. 나에 대한 주문이다. 그랬으면 좋겠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게 되고 싶어서.
요즘 인생의 화두는 뭔가. 다음 영화다. 곧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촬영을 시작하는데, 너무 어려운 역할이라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문장이 자꾸 떠올랐다. 힘들 때 당신은 농담하는 사람인가, 우는 사람인가. 아무 말도 안 한다. 그냥 가만히 혼자 있다. 술을 마시거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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