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가슴, 나쁜 가슴, 이상한 가슴 (2)
나는 ‘앞으로 10년, 여성 가슴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솔직히 모르겠다. 탈브라 선언, 편한 브라 열풍, 스포티즘, 페미니즘의 부흥, 패션 전문가들의 자아 성찰? 그런 일이 전에는 없었던가. 1960년대에도 브라를 벗어 던지고 여성해방을 부르짖은 히피들이 있었다. 숱한 패션 아이콘이 노브라를 실천했다. 하지만 런웨이에 등장한 온갖 해괴한 아이디어가 하이패션이라고 인기를 끌 때도 모델들의 노브라가 현실에 대대적으로 수용된 적은 없었다. 유럽 사대주의에 뇌가 푹 젖어든 패션 피플과 트렌드세터조차 프랑스 여자들의 젖꼭지와 한국 여자들의 젖꼭지에는 다른 시선을 보낸다. 트렌드에 따라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디자이너들이 언제 ‘섹시함이야말로 진정한 여성의 권력’이라며 레이스가 부글부글한 와이어 브라를 다시 꺼내 들지, 연구 지원금만 받으면 어제는 독이라던 음식을 오늘은 보약이라 주장하는 뻔뻔한 건강 ‘전문가’들이 언제 ‘실은 브라가 여성의 상체 근육 보존에 좋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을지, 누가 알겠는가. 2019년 대중문화계는 여전사와 걸 크러시 이미지를 생산하기에 바쁘지만 그걸로 여성성에 대한 인식이 바뀔 거란 기대는 1980년대 ‘강한 여자’와 ‘커리어 우먼’들이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어떻게 스러졌나 생각하면 쉽게 수정된다. 2025년의 뉴레트로로 빅토리아 시크릿이나 마돈나의 원뿔 브라가 지목될 수도 있고, 21세기 초에 그랬듯 페미니즘이 잠시 광장에서 잊힐 수도 있다.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으로서의 ‘노출’은 그리 실용적인 전략이 아닐지 모른다. 성범죄가 도둑질보다 경미하게 취급되는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방어 전략 혹은 섹스 사보타주의 의미로서 남산 위에 저 소나무 같은 전신 철갑을 입자고 주장하는 여자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도대체 이 세계를 뭘 믿고 10년 후를 예측한단 말인가?
다만 기대해볼 만한 건 브라의 역사가 100년 남짓밖에 안 되었다는 거다. 기능성 섬유의 발전, 레저 산업의 성장, 메가트렌드에서 멀티트렌드로 패션 산업 구조 재편, 불완전 고용으로 인한 비자발적 스타트업의 시대라는 토대 위에 ‘우리 몸에 맞는 브라를 내놓으라’는 소비자의 요구가 가시화되면서 시장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내가 15년 전 레이스와 볼륨 패드가 없는 단순하고 편한 브라를 찾으며 속옷 회사에 분노할 때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건 안 팔려.” 대세에 어긋나는 아이디어는 그렇게 쉽게 무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불편을 느끼는 누군가가 나서서 제품을 만들고 시장성을 테스트하면 대기업이 아이디어를 낚아채고 판을 키우는 식으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세상에 나온다. 그 덕에 대안적 브라가 쏟아지고 관련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편한 브라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늘 존재했다. 남대문의 부인 전용 속옷 가게가 어떻게 그리 오랫동안 살아남았겠나. 다만 그 수요가 적지 않다는 게 이제야 증명된 것뿐이다. 말인즉 그 수요가 쉽게 사라지지도 않을 거란 소리다. 차제에 브라의 역사를 바꾸어놓을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탄생하면 좋겠지만 일단 ‘보는 브라’에서 ‘입는 브라’로 관점이 변하고 있는 것만 해도 다행스럽다. 여성의 가슴을 섹슈얼리티가 아닌 기능으로, 보이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징조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을 부끄러워해서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린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브라는 액세서리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한 이는 우리를 떠났지만 그가 던진 화두는 아직 유효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막 그의 말이 현실화되는 과도기에 들어선 것일지 모른다.
- 글
- 이숙명(칼럼니스트)
- 포토그래퍼
-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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