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스테파노 필라티의 방황
유명 하우스에서의 커리어를 뒤로하고 새로움을 찾아 독자 노선을 걷는 스테파노 필라티, 개인적 삶을 패션에 투영해 컬트적 인기를 누리는 뎀나 바잘리아, 잠들어 있던 또 하나의 하우스에 활기찬 기운을 불어넣을 기욤 앙리, 자신만의 스타일로 하우스를 밝은 조명 아래 옮기는 데 성공한 줄리앙 도세나, 다음 세대를 위한 패션 그 자체인 텔파 클레멘스, 한국인이라는 규정이 무의미한 세계적 수준의 황록, 1980~1990년대 일본 디자이너의 ‘쇼크 웨이브’를 이을 토모 코이즈미. 우리 여자들을 위해 옷을 만드는 동시대 남자 디자이너 7인.
방황의 나날
과함과 엄격함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스테파노 필라티는 청사진 없이 브랜드를 이끈다.
스테파노 필라티(Stefano Pilati)가 입은 베이지색 캐시미어 터틀넥 아래 정교하게 장식된 티셔츠 밑단이 언뜻 보였다. 하의는 무릎 길이의 내복 바지 같은 레깅스 위에 상의와 어울리는 베이지색 반바지를 레이어드하고, 검은색 부츠를 신고 있었다. “나는 어느 한쪽만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는 여성복과 남성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은 구분이 없는 ‘중간적인 것’이 좋아요.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도전적인 미지의 대상이니까요.”
그가 입은 의상은 ‘랜덤 아이덴티티(Random Identities)’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컬트적 영감을 지닌 54세의 디자이너가 2017년 독립해서 론칭한 브랜드다. 사회적 성 체제에 순응하는 복장 규정에 저항한다는 뜻으로, 우리 시대의 정체성 정치학을 반영한다. 필라티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첫 컬렉션을 발표한 후 14개월이 지난 올해 1월, 피렌체의 피티 우오모에서 랜덤 아이덴티티 패션쇼를 선보였다. 1970년대부터 남성복 성지로 자리매김한 이 패션 행사는 성별 구분 없이 모델을 캐스팅하거나 사회적 성 개념에서 자유롭게 스타일링함으로써 디자이너들이 파격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이상적인 무대가 돼왔다. “나도 내 브랜드를 남성복이라고 소개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게 진정으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요?” 필라티는 이렇게 말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내가 입을 만한 옷을 디자인해요. 예전부터 그랬고, 그러니까 그걸 여성복이라고 부를 수는 없죠. 규정되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규정되지 않은 아름다움이오.” 필라티의 베를린 집은 그가 말하는 과거의 물리적 증거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바로 자신의 옷장이라고 부르는 가공할 만한 규모의 거대한 아카이브다. 상당 부분이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이브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그가 디자인한 옷이며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디자인한 옷도 포함돼 있다. 그의 작업에는 하우스를 설립한 디자이너들에 대한 존경도 담겨 있지만, 1990년대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프라다에서 일하며 스스로를 정립한 필라티는 엄격한 모더니즘과 화려한 글래머가 공존하는 자신만의 창의적 스타일로 하우스를 재정의했다. 그가 2016년 초 제냐를 떠날 때, 그의 다음 커리어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어떤 것도 실현되지 않았다. “아무도 나와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나 역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할 생각이 없었고요.” 그가 말했다. “나이가 조금 더 어렸다면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패션은 내가 마음을 열고 나만의 것을 만들어서 구축하는 걸 도왔습니다. 그래서 난 패션의 모든 면에 관심을 갖고요. 그런 이유로 나와 일하고 싶어 하는 경영인은 없습니다. 나는 자신에게 매우 충실하고 그걸 즐기니까요. 즐기는 것 그 이상이죠.”
그는 런던 북동부의 우아하게 폐허가 된 저택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두 친구, 케이트 모스와 자메이카 출신 댄서로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MJ 하퍼와 함께 화보를 찍으며 하루를 보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일 거예요. 나에게는 큰 성취죠. 난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거든요.” 필라티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모스의 모습이 자신이 바라는 랜덤 아이덴티티의 이미지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한편 하퍼는 전통적으로 특정 성별에만 연관 지어진 우아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풍기며 랜덤 아이덴티티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케이트는 1990년대 모든 미의 기준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MJ 하퍼도 동일한 일을 하고 있죠.”
필라티가 외로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와 비슷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밀라노 출신으로 한때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어떤 구체적 계획도 없이 브랜드를 이끌고 있다. 그의 브랜드는 성 구분이 없을 뿐 아니라 필라티 자신이 원할 때 컬렉션을 출시하고 쇼를 무대에 올린다. 그리고 지금 패션계 분위기에서는 가장 이례적으로 접근 가능한 가격대를 책정하고 있다. “젊은 세대가 옷을 사는 데 너무 많은 돈을 쓴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그가 말했다. “더 중요한 것에 돈을 쓰세요. 커리어, 여행, 독서, 대학 진학 등 뭐든 원하는 것에요.” 필라티는 새로운 세대를 각별하게 생각한다. 그와 그의 남자 친구인 크리스티안 스쿠니스(Christian Schoonis)는 2010년 초 파리에 있는 집에 싫증을 느껴서 베를린으로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이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게이 클럽에 가본 적 없다던 필라티를 베를린의 쾌락주의 밤 문화로 인도했다. 그는 거기서 패션계의 젊은 팬들을 만났고 그들의 삶과 스타일은 랜덤 아이덴티티에 미학적 자양분이 됐다. “애정과 존중이 넘쳐나죠.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마음을 씁니다. 내 작업을 통해 나의 경험을 그들에게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신선한 경험은 그들 역시 나를 가르치고 있다는 거죠. 어쩌면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을 그들이 끄집어낸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러면서 그는 젊은이들이 성별에 대한 구분 없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마음이 완전히 열렸다고 말했다. 제냐를 떠난 후 지속적으로 브랜드 론칭을 권유받으면서 필라티는 자신의 비전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거만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어쨌거나 난 좀 멋있거든요.” 그러면서 그가 미소 지었다.
이브 생 로랑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그는 스타일이 멋지기로 유명했다. 오뜨 꾸뛰르적 요소로 남성적 우아함을 변화시킨 것이다. “나에게는 자연스러웠어요. 만약 내가 브랜드를 론칭한다면 그 이유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을 구현하는 것이오.” 그가 말했다. “젊은 세대가 내 아이디어를 이해하는 걸 목격하는 것은 매우 신선한 경험입니다. 결국 내가 젊은 세대와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죠. 이브 생 로랑에서 일할 때 만날 수 있었던 유일한 젊은이는 내 어시스턴트의 어시스턴트뿐이었어요. 복도에서 마주친 적은 있어도 말을 섞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죠.” 요즘 필라티는 인스타그램 팔로워와 소통하고, 클럽에서 끊임없이 영감을 얻는다. “나는 베를린의 진보적 자세를 반체제 순응주의의 형태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정말 마음을 열리게 하죠. 그저 ‘와!’라는 말밖에 안 나와요. 모든 금기된 것과 경계선이 무너지니까요. 속이 시원해요, 무엇이든 가능하죠.”
베를린은 필라티의 작업 속에 늘 존재하던 고조된 선정적 감각을 랜덤 아이덴티티에 주입하고 있는데, 종종 그것을 숭배하는 집단에 뿌리를 두기도 한다. “내가 디자인한 의상 일부는 선택 가능한 몇 가지 스타일과 실용성을 겸비한 클럽 유니폼이 됐죠. 가끔 베를린의 나이트클럽 베르크하인(Berghain)에 가서 ‘저기, 내가 그쪽을 위해서 옷을 디자인해줄게요. 도저히 그 모습은 못 봐주겠거든요. 뭘 의도했는지는 알겠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라고 말하기도 하죠.” 그가 웃었다. 이제 그는 랜덤 아이덴티티를 진보적인 미래를 위한 브랜드로 진화시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필라티가 아르마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다는 소문이 패션계에 계속 떠돈다고 해도 그는 전혀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다시는 그런 질문 하지 마세요!’라고요?” 필라티가 농담조로 말했다. “우리는 그냥 웃어넘기거든요. 난 아르마니를 정말 좋아한답니다.”
- 패션 에디터
- 송보라
- 포토그래퍼
- Nikolai von Bismarck
- 글쓴이
- Anders Christian Mad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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