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부두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싶다
당신은 어쩌면 올해, 그간 더 큰 세상을 향한 호기심 때문에 간과했지만 실은 당신에게 가장 적합한 여행지를 경험할 고마운 운명을 맞닥뜨린 것인지 모른다. 여수에서 바다 보면서 낮술 마시고 순천에 들러 갈대밭 구경하고 전주 한옥마을에 들러 해장용 콩나물국밥을 먹고 서울에 와도 하루면 족할, 국내 여행 말이다.
나는 한국 구석구석을 많이 여행한 편이다. 비혼에다 프리랜서 생활을 오래 해서 시간이 많았다. 버스, 기차, 때로는 술 못 마시고 운전 좋아하는 친구들의 차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30대 중반까지는 국내 여행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때 국내 여행의 이미지가 그랬다.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발족하고 올레길 1~3코스가 개장한 게 2007년이다.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도가 ‘한반도 남쪽 어딘가 조랑말과 똥돼지와 감귤이 많은 섬’ 정도 인식에서 벗어난 지 불과 10여 년밖에 안 됐다는 소리다. 다른 지역이야 오죽할까. 국내 여행의 주 소비층은 해외여행 갈 경제력이 없는 20대, 여러 세대가 섞인 가족 단위 휴양객, 장년 단체 관광객 등이었다. 도시 사람들에게 국내 여행이란 곧 지방 여행이고, 지방 여행이란 발전하는 대한민국이 꼭꼭 감춰둔 촌스러운 과거로의 회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저분한 버스 터미널, 바가지요금, 희멀건 커피, 곳곳에서 발견되는 꽃무늬 벽지와 넝쿨 모양 주물 장식, 도회지에서 온 처녀에게 시시콜콜 호구조사를 하는 상인들… 이게 다른 세기의 역사가 아니다. 물론 그건 그 나름 키치한 매력이 있어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라면 오히려 웃음을 폭발시키는 촉매제가 된다. 그러나 여전히, 도시에 사는 싱글 여성이자 커리어 우먼인 내게 국내 여행은 심정적으로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충동적인 잠깐의 일탈이나 해외여행의 저렴한 대체제에 가까웠다. 여름휴가를 위한 해외여행은 석 달 전부터 준비하면서 국내 여행은 2주 이상 준비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한국 지방 여행을 사랑하게 된 건 등산을 다니면서부터다. 어릴 땐 부모님 따라 등산 가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성인이 되어 친구들과 가니 산이 달라 보였고, 산 아래 막걸리와 나물 요리가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주왕산 아래서 먹은 수제 동동주, 설악산 아래서 버스 기다리며 터미널에서 먹은 황태무침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전혀 <보그>스럽지 않은 구수한 풍경이 연상되지만 현실은 그렇지도 않다. 가끔 한국 산에서 진달래색, 개나리색을 벗어난 세련된 컬러 블록의 애슬레저 룩을 갖춰 입거나 파타고니아 스타일로 풀 착장한 훤칠한 등산객을 목격하는데, 그때마다 드는 생각은 ‘아, 등산과 트레킹의 차이는 패션이로구나!’ 하는 것이다. 한국 패션 피플이 사대하는 웨스턴 여피의 라이프스타일이 지방 국립공원에서 구현되기도 한다는 거다.
독재국가에서 철저히 세뇌된 인간이 아니고서야 자기 나라 정부를 신뢰하는 경우는 거의 없겠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국립’이라는 글자가 붙은 것에 그다지 우호적인 감정을 품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국립공원’은 다르다. 산지 면적이 국토의 70%를 차지하고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어지간한 장관으로는 국립공원에 선정될 수 없다. 나는 2004년, 그러니까 아직 제주도가 감귤과 똥돼지로 기억되던 시절에 우도로 출장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함께 간 사진가가 이런 말을 했다. “광고 찍느라 전 세계를 누볐지만 제주도가 가장 좋다.” 말 통하고 음식 입에 맞고 가깝고 편하니까 애정이 남다르다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어지간히 해외를 쏘다닌 뒤에 봐도 한국의 자연이 장관은 장관이다. 국립공원 곳곳에 자리한 오랜 사찰에도 애틋한 마음이 있는데, 주로 소박하고 담담한 분위기라 종교 시설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유독 끌리는 부분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편을 보면 중국인들이 제주도를 좋아하는 이유로 ‘그들 기준’ 작은 면적에 다양한 풍광이 있다는 것을 꼽는데, 그건 한반도 전체로 확장시켜봐도 마찬가지다. 여수에서 바다 보면서 낮술 마시고 순천에 들러 갈대밭 구경하고 전주 한옥마을에 들러 해장용 콩나물국밥을 먹고 서울에 와도 하루면 족할 거리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어딜 가나 입에 맞는 음식이 있다는 게 국내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이다. 보르도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에서 그랑 크뤼 와인을 곁들여 먹은 디너 코스도, 리스본에서 줄 서서 먹은 에그타르트도, 먹는 순간엔 감동이었고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전자는 익숙하지 않은 요리라 맛을 잊어버렸고, 후자는 너무 익숙해져서 흥미를 잃어버렸다. 여행지에서 먹은 음식이 대개 그렇다. 하지만 울릉도 어판장에서 배를 기다리면서 먹은 오징어회와 여기 잘 어울리겠다며 편의점으로 달려가 사왔던 싸구려 와인의 맛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고, 언제나 그립다. 그때 그 순간, 그 장소, 그 분위기가 아니면 다시 느낄 수 없는 맛이 있지만 맛을 기억으로 전환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국내 여행에서는 그게 된다.
물론 요즘은 굳이 누가 나서서 예찬하지 않아도 국내 여행을 많이들 간다. 몇 해 전부터 동남아 관광지를 대체할 고급 리조트, 일본이나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을 자랑하는 정갈한 힐링 스테이가 지방 곳곳에 생겨났다. 국내 여행을 다니기 위해 더 이상 꽃무늬 벽지와 넝쿨 모양 주물을 견딜 필요가 없다. 이제 ‘면’이나 ‘리’를 쓰는 인구밀도 낮은 마을에서도 커피 전문점을 찾는 게 어렵지 않다. 그래도 같은 값이면 단독자의 해방감까지 느낄 수 있는 가까운 외국, 즉 일본 같은 곳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지만 지금은 코로나 시대. 새로이 국내 여행의 매력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고, 여름마다 해외 어딘가의 리조트 선베드에 누워서 비키니 샷을 찍어 올리던 패션 피플의 인스타그램에는 한국 각 지방의 호텔 수영장 사진이 올라온다. 호텔, 수영장, 선베드, 비키니, 샴페인… 다 좋다. 다만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수목원, 등산로, 해안 산책로, 슬로시티, 오일장, 국보나 보물 같은 것이 있다면 잠시 들러서 산책을 해보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코로나 때문에 해외에 못 가서 어쩔 수 없이…’라는 단서는 붙이지 말자. 당신은 어쩌면 올해, 그간 더 큰 세상을 향한 호기심 때문에 간과했지만 실은 당신에게 가장 적합한 여행지를 경험할 고마운 운명을 맞닥뜨린 것인지 모른다. 사실 이건 내가 발리에 살아서 하는 말이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알릴라 수리에서 럭셔리한 휴가를 보낼 수 있지만 그보다 통영 부두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싶다. 나리분지까지 등산하고 난 후 더덕무침을 먹고 싶다. 담양의 대나무 숲과 메타세쿼이아를 걷고 싶다. 한 주에 한 번씩 한국의 국립공원을 투어하고 싶다. <1박 2일> 식의 요란한 MT가 아니라, 우아하고 조용하고 아기자기한 여름휴가를 그런 곳에서 보내고 싶다. 코로나가 당신에게도 이런 기분을 이해시켜주면 좋겠다.
- 글
- 이숙명(칼럼니스트)
- 에디터
- 조소현
- 사진
- 조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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