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의 포인트, 캣워크 플로어
패션쇼의 주인공은 런웨이에 등장하는 옷이다.
하지만 근사한 무대장치, 음악, 피날레 퍼포먼스 역시 시선을 끄는 요소.
최근 캣워크 쇼의 시선 집중 포인트는 바로 캣워크 바닥이다.
“오 마이 갓, 구두 사진 찍어도 될까요?” 지난 2월 20일 저녁, LA의 밀크 스튜디오에서는 이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곳은 톰 포드가 2015년 가을 컬렉션을 선보인 패션쇼 현장. 비욘세, 리즈 위더스푼, 기네스 팰트로, 줄리안 무어, 마일리 사이러스, 제니퍼 로페즈, 스칼렛 요한슨 등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프런트 로 관객들을 자랑했던 이번 쇼의 숨겨진 주인공은 바로 런웨이 바닥이었다. 수만 송이의 백장미 꽃잎으로 무대 위를 온통 뒤덮어버린 것. “LA엔 절대 눈이 오지 않죠. 그래서 장미 꽃잎으로 눈을 만들어보자, 싶었어요.” 런던에서 LA로 쇼를 옮겨버린 디자이너의 의도대로 하얀 장미 꽃잎으로 덮인 캣워크는 관객들의 시선을 온통 사로잡았다. 쇼가 끝나자마자 런웨이로 몰려든 관객들은 저마다 아이폰을 들고 꽃송이에 파묻힌 자신의 구두를 담은 ‘슈피’를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난해 5월 <보그 코리아>는 새로 외워둬야 할 패션 용어로 ‘슈피(Shoefie)’를 소개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신발을 찍어 올린 사진을 가리키는 말. 예쁜 신발을 자랑하기 위해 찍는 슈피는 셀피처럼 민망하게 팔을 뻗고 찍을 필요도, 주위를 살피며 셀카봉을 꺼낼 일도 없다. 그저 평소처럼 휴대폰을 바라보는 시늉을 한 채 셔터 버튼만 클릭하면 ‘남부끄럽지 않게’ 찍을 수 있다는 것이 슈피의 가장 큰 장점이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샤넬 투톤 펌프스나 루부탱 로퍼를 자랑할 수 있으니, 은근히 자신의 스타일을 과시하기에도 안성맞춤. 당연히 슈피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멋진 신발. 하지만 그 신발의 배경이 되는 ‘바닥’ 역시 중요하다. 아름다운 타일이나 카펫이 깔린 바닥이라면, 누구라도 은근슬쩍 슈피를 찍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밖에.
슈피의 중요성이 디자이너들에게 전해졌을까? 요즘 패션쇼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장치는 캣워크 바닥이다. 디자이너들은 거창한 무대 세트 대신 캣워크 바닥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패션쇼에서 선보인 건 그 시즌의 테마를 담은 카펫! 봄 컬렉션을 위한 쇼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유리 바닥을 마련했던 발렌시아가의 알렉산더 왕은 가을 쇼를 위해선 아카이브 속 격자 패턴을 카펫으로 완성했다. 쇼장을 가득 채운 격자 패턴은 안나 이버스의 스커트와 재킷에도 등장했다. 거친 시멘트 바닥을 런웨이로 대신했던 하이더 아커만도 다이아몬드 패턴의 검정 카펫을 깔았다. 마름모꼴 프린트가 의상 곳곳에 등장했음은 물론이다. 살바토레 페라가모 쇼에서도 기하학적인 패턴의 카펫을 그대로 옮긴 옷이 등장했고, 90년대 복고풍 미래주의 스타일을 선보인 J.W. 앤더슨 역시 옷 프린트를 활용한 카펫을 준비했다. 미쏘니 또한 대리석 프린트의 니트와 바닥을 함께 선보였다.
옷의 패턴 대신, 컬렉션의 테마를 바닥으로 표현하는 디자이너들도 많다. 뉴욕의 타미 힐피거는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인 미식축구 경기장을 쇼장에 재현, 모델들이 야드가 그려진 인조 잔디 위를 거닐었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반전운동에 가담한 히피들이 테마인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 쇼는 평화의 상징인 정사각형 잔디밭이 런웨이를 대신했다. 안토니오 마라스와 토리 버치, 언더커버는 페르시안 카펫을 바닥에 잔뜩 깔았고(마르지엘라 하우스에서 자주 쓰던 트릭), 셀린의 피비 파일로는 나무 바닥 대신 흰색과 핑크색 타일을 선택했다. 지암바티스타 발리, 발맹의 올리비에 루스테잉도 특별히 디자인한 카펫으로 쇼장 바닥을 덮었다. 또 매리 카트란주는 핑크색 스펀지 뿔로 런웨이를 대신했다. 그중에서 가장 탐나는 카펫 캣워크를 만든 이는 생제르맹 데 프레 매장에서 두 번째 쇼를 선보인 소니아 리키엘의 줄리 드 리브랑. 숍 전체를 작은 도서관으로 변신시키기 위해 5만 권의 책과 그것을 꽂을 책장을 마련한 그녀는 욕심을 더 부려 담배와 연필, 책, 눈동자와 입술이 프린트된 눈에 확 띄는 네이비색 카펫(파리의 패션 스타, 앙드레 사라이바의 디자인)으로 바닥까지 시선이 머물게 했다. 최근 패션쇼에서 두드러지는 무대장치에 대한 기사를 쓴 <뉴욕타임스>의 패션 평론가, 바네사 프리드먼은 리브랑의 무대가 “브랜드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반영하고, 여성에 대한 새로운 면을 공개했다”고 칭찬했다.
물론 이전에도 극적이고 인상적인 패션쇼 바닥이 존재했다. 모델들이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사각형 조명이 켜졌던 알렉산더 맥퀸의 체스판 컬렉션(2005년 S/S), 황금빛 잎사귀들이 반짝이던 드리스 반 노튼의 골드 컬렉션(2006년 F/W), 혹은 밍크 카펫이 깔려 있던 톰 포드의 마지막 구찌 컬렉션(2004년 F/W) 등등. 하지만 최근처럼 컬렉션의 키워드를 암시하는 캣워크를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대부분의 쇼 무대는 흰색과 검은색 아크릴 바닥 일색. 거창한 무대 세트를 마련해도 바닥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최근의 런웨이 바닥이 새삼스럽게 눈길을 끄는 요소가 된 것이다.
지난해 5월 모나코에서 첫 번째 루이 비통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인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바닥을 모니터 화면으로 가득 채웠다. 모델들의 발 아래로 투명한 바닷물이 찰랑이는 영상은 해양 생물과 바닷가에서 영감을 얻은 컬렉션의 테마를 알려주기에 안성맞춤. 또 실시간으로 중계되던 패션쇼 영상을 지켜보던 이들에게 쇼가 물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신비로운 초록빛 바닥은 슈피를 위한 최고의 배경이기도 했다.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손기호
- 사진
- Indigital, Gettyimages / Multibits,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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