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의 다음을 그리는 버지니 비아르
오랫동안 칼 라거펠트와 일해온 버지니 비아르가 조용하지만 넘치는 자신감으로 샤넬의 다음 장을 그린다.
새롭게 거듭나는 샤넬 뒤에서 조용한 가운데 창의적으로 힘쓰는 수석 디자이너 버지니 비아르(Virginie Viard)는 말수가 적어 보인다. 그렇다고 점잔 빼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녀의 친구이며 모델이자 음악 프로듀서인 캐롤린 드 메그레(Caroline de Maigret)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잡담 같은 건 안 해요. 그러는 척할 줄도 모르죠.”
비아르는 처음 봤던 샤넬 패션쇼를 생생히 기억한다. 칼 라거펠트의 연극적이고 화려한 오뜨 꾸뛰르 무대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가족처럼 지낸 친구의 아버지가 선물로 그녀를 쇼장에 데려갔다. 그 컬렉션에서는 모자와 장갑, 모델들만 눈에 띄었다. 모델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Inès de la Fressange)와 마르페사 헤닝크(Marpessa Hennink)가 런웨이 사진가들을 위해 관능미를 뽐내고 있었다. 비아르는 그 컬렉션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끔찍했어요!” 그녀가 솔직히 말했다. “너무 구식이었죠.”
비아르의 인생 궤적은 결국 그녀를 라거펠트의 매우 귀중한 샤넬 스튜디오 디렉터에서 2019년 그의 별세 이후 이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이끌었다. 라거펠트가 생전에 그녀를 두고 “내 오른팔… 그리고 내 왼팔…”이라 표현한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리고 이번 변화는 전설적인 패션 하우스가 만들어왔을 매끄러운 우아함이 가득 넘치는 그런 것이었다. 패션계 호사가들이 샤넬의 소유주이자 베일에 싸여 있기로 유명한 웨르테이메르(Wertheimer) 가문이 라거펠트 대신 또 다른 유명 디자이너를 내정할 것이라고 예상했을지라도, 그 가문이 지속성과 가치 있는 경험, 전문성을 선택할 것임을 보여주는 단서가 많았다. 특히 라거펠트는 마지막 두 번의 컬렉션에서 박수갈채를 함께 나누고자 1987년 이후 라거펠트를 위해 일해온 비아르를 직접 피날레 무대 위로 데리고 나오지 않았나.
가브리엘 코코 샤넬과 칼 라거펠트는 각각 20세기와 21세기의 가장 위대한 크리에이티브였고, 오래 드리웠던 이들의 그림자에 서 있던 비아르(59세)는 비교적 소극적이고 몰아적인 인물이다. 어쩌면 패션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에서 일하는 가장 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일지 모른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죠.” 배우이자 샤넬 브랜드 홍보대사인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이렇게 말하면서 덧붙였다. “다름을 포용하며 그녀는 그녀 자체로 아름답고 독특하죠.”
비아르는 텍스타일 중심지로 유명한 프랑스 리옹(Lyon)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의사였고, 가족은 아버지의 발령으로 디종(Dijon)이라는 소도시로 이사 갔다. 어린 비아르는 때로 간호사나 의사처럼 옷을 입고 아버지가 일하던 병원에 따라가 환자들을 응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뒤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 “의사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해요. 그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패션이 더 편해!’라는 결단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어머니로부터 바느질을 배운 비아르는 20세가 되었을 때 친구와 너바나(Nirvana)라는 레이블을 만들고, 할아버지 텍스타일 공장에서 생산되는 패브릭으로 옷을 만들었다. 젊은 시절의 가브리엘 샤넬처럼, 비아르는 저지 작업을 더 좋아했다. “특별한 재단이 필요 없으니까요. 몸이 옷의 형태를 만들어주거든요.” 그렇지만 그곳의 패션 스쿨에서 패턴과 재단 기술을 연마했다. 그리고 옷과 주얼리 상점에서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팔지는 못했다고 회상했다. “고객들이 두려웠어요! 하지만 늘 그 상점과 쇼윈도를 다시 꾸미고 있었죠. 이번 주는 빨강, 그다음 주는 초록으로 말이죠.”
결국 파리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그녀는 리옹에서 사귄 좋은 집안 출신의 룸메이트를 통해 자클린 드 리브스(Jacqueline de Ribes)의 인턴이 되었다. 파리 사교계 명사였던 자클린이 완전한 패션 취향과 솜씨를 자신의 브랜드에 활용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당시 그녀의 집에서 작업했어요.” 비아르가 그때를 떠올렸다. “패브릭이 모두 침대에 놓여 있었고, 복사기가 욕실에 있었죠. 저는 직원 세 명의 어시스턴트였어요. 그러니까 전 직원이 네 명뿐이었죠.”
얼마 후 그녀는 코스튬 디자이너 도미니크 보그(Dominique Borg)의 어시스턴트로 옮겨갔다. 브뤼노 뉘탕(Bruno Nuytten)의 <까미유 끌로델>, 그리고 클로드 를르슈(Claude Lelouch)의 <레 미제라블> 같은 영화를 통해 그녀의 작품에 찬사가 쏟아졌고,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가족은 오래전 부르고뉴(Burgundy)의 한 시골집으로 이사했다. 그곳 이웃이 모나코 대공 레니에(Prince Rainier)의 부관이었다. 그가 얼마 뒤 모나코 시민이며 대공의 딸 캐롤린 공주와 친한 칼 라거펠트를 만났고, 인턴이 필요한지 대담하게 물었다. 운명적으로 때마침 라거펠트는 인턴이 필요했다. 비아르는 곧바로 샤넬이 있던 캉봉가로 가서 라거펠트의 참모였던 질 뒤푸르(Gilles Dufour)를 만났고 즉석에서 채용되었다.
“들어가자마자 칼은 제게 ‘이거 어떻게 생각해?’, ‘저 색은 어떤 것 같아?’라고 물었죠. 너무 당혹스럽더라고요.” 비아르가 기억했다. 그녀의 인턴십은 곧 정규직으로 바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과 버지니는 궁합이 잘 맞았죠.” 라거펠트 디자인팀의 또 다른 기둥이었던 에릭 라이트(Eric Wright)가 말했다. “버지니는 늘 차분했어요. 굉장히 신중했죠. 그렇지만 그녀의 존재감과 에너지는 정말 강하고 영향력이 있었죠.” 당시 그 팀은 소규모였다. 뒤푸르와 라이트 외에 기성복 어시스턴트, 액세서리 디자이너와 어시스턴트, 그리고 뒤푸르의 혈기 왕성한 조카이며 당시 샤넬의 과장된 코스튬 주얼리를 맡았던 빅투아르 드 카스텔란(Victoire de Castellane)뿐이었다. 비아르는 곧 코스튬 디자인 분야에서 다진 실력과 섬세하게 준비한 기술을 어필할 기회를 포착했다. “자수를 맡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 기회였죠.”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유명한 자수 공방에 파견 나가 그 뛰어난 프랑수아 르사주(François Lesage)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와 칼은 두 개의 자아였어요.” 비아르가 떠올렸다. “울라라! 저는 사교적 수완을 발휘해야 했어요.”
버지니 비아르는 샤넬에 보물 같은 수공예 작품을 납품하던 특별한 인물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것을 즐겼다. 단추 등을 납품하는 무슈 데뤼(Desrues)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매일 12시에 수트케이스를 들고 왔다. 그 가방은 아마 비어 있었을 테지만, 종이로 싼 주얼리 같은 예술 작품 샘플을 담기 위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마담 푸지외(Pouzieux)도 있다. 그녀는 프랑스 시골 산간벽지에 있는 자신의 농가 축사에 마련된 아틀리에에서 샤넬 수트에 쓰일 특별한 장식용 수술을 만들었다. “제가 그녀의 샘플을 받아보곤 했는데, 그녀가 기르는 말 냄새가 나고는 했죠. 다행히 저는 말을 좋아해요.” 알다시피 샤넬은 사라질 위기에 놓인 수공예 공방(Maison d’Art) 38곳을 인수했다. 깃털과 조화 공방, 모자 공방, 글러브 메이커, 주름 공예가인 플리터, 그리고 텍스타일과 신발 디자이너가 포함된다. 이들 중 11곳은 ‘19M’으로 곧 통합된다(파리 북부에 있는 작업 전용 허브의 모습으로 공개된다).
그리고 1992년 칼 라거펠트가 끌로에로 돌아갔다. 1982년 샤넬에 합류하기 전까지, 그는 1964년부터 끌로에의 로맨틱하고 시적인 레트로 스타일을 선보인 주인공이었다. 그는 비아르를 끌로에에 데려갔다. 실용주의자였던 라거펠트가 라이트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무엇을 하든 수많은 여성을 주변에 두세요. 개성이 다양한 여성을 말이죠. 그런 식으로 상부상조하는 거죠.” 1993년 <보그>는 라거펠트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끌로에의 정신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잇 걸로 비아르를 소개했다. “재미있는 것이 좋아요!” 그녀가 작가인 칼라 카터(Charla Carter)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스노우볼, 초록색 플라스틱 개구리 전화기, 종이로 만든 선인장에 대해 말했다. 이것들은 스테판 루브리나(Stefan Lubrina, 현재는 서사적인 샤넬의 무대장치를 맡고 있다)가 페인트칠했고, 블룸즈버리 아티스트(Bloomsbury Artist)의 작품이 떠오르는 자신의 열정적인 빨강과 노랑 스트라이프로 꾸민 집에 놓여 있다고 한다.
“저는 샤넬을 입지 않았어요. 심지어 그곳에서 일하면서도 그랬죠!” 그 당시 비아르가 인정했다. 실비아(Sybilla), 헬무트 랭, 존 갈리아노,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옷을 선택했다고 한다. “때때로 재미있고 괴짜 같은 것을 좋아해요. 그렇지만 너무 인위적인 건 싫죠. 제가 멋스러우면서도 현실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비아르가 말하는 ‘벼룩시장 히트 작품’을 포함하는 열정적 미학은 그녀가 하얀 코튼 속치마와 함께 입는 파네 벨벳(Panné Velvet) 파자마 팬츠 같은 스타일에서 잘 드러났고, 이는 곧 라거펠트가 선보인 보헤미안 스타일의 끌로에 컬렉션에 반영되었다.
비아르는 끌로에에서 주로 밤에 활동했다. “칼이 정말 늦게 왔죠.” 그녀가 당시를 떠올렸다. “가끔 밤 11시에 오곤 했어요. 그는 종일 샤넬과 자신의 브랜드 라거펠트에 매달려 있었으니까요.” 그가 디자인하는 시간에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 또는 비아르가 좋아했던 그런지 스타일 음악이 깔렸죠. “그녀의 음악 취향은 로큰롤이죠.” 드 메그레가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주로 어떤 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면도 조금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죠.” 나중에 그녀와 라이트는 야식을 먹을 수 있는 나타샤(Natacha)로 향하곤 했다. 당시 패션계 사람들이 즐겨 찾던 식당이었다. 라이트는 비아르의 배우 친구들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두 사람이 있는 자리에 그들도 함께 모이곤 했던 것이다. “뱅상 랭동(Vincent Lindon), 줄리엣 비노쉬, 이자벨 아자니 같은 배우 모두 뭘 입을지, 어떻게 입을지 그녀의 조언을 굉장히 신뢰했어요.” 라이트가 말했다. “지금 프랑스 영화계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는 젊은 남녀 배우 모두가 버지니를 엄청나게 신뢰하죠.”
1990년대 후반 라거펠트가 비아르를 샤넬로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제가 원했던 유일한 것은 칼과 함께하는 것이었죠. 당시 샤넬로 돌아왔을 때 최고로 좋은 시절은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칼이 네오프렌만 원할 때의 컬렉션이 기억나요. 저는 그가 트위드를 좋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샤넬에서 네오프렌이라니… 이 틀로 찍어낸 새로운 가방은 정말 끔찍했죠. 저희는 다시 로맨틱한 쪽으로 돌아가야 했죠!”
“버지니가 되돌아왔을 때 티가 났죠.” 라이트가 말했다. “작품이 더 순수해지고, 우아해졌거든요. 그녀는 옷에 담긴 호화로움, 즉 장인 정신과 아름다움을 좋아하죠. 그렇지만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늘 실용적이었어요.” 곧 비아르의 프랑스식 보헤미안 스타일은 조용히 라거펠트가 샤넬의 미학을 다시 바꾸도록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쉽게 조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좋아했죠. 버지니는 샤넬에 맞는 참신함을 찾고 있었죠.” 이런 특징은 현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비아르가 취하는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언젠가 제가 칼에게 ‘이런 빈티지 같은 작은 클래식 셔츠 드레스를 만드시는 건 어때요?’라고 물었죠.” 1980년대 샤넬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소피아 코폴라가 그때를 회상했다. “그가 이렇게 대답했죠. ‘아니요, 우리는 절대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아요. 우리는 늘 앞으로 진보할 뿐이죠.’ 하지만 버지니는 어떤 주제나 일에 대해 다시 논의하는 것을 좋아하죠. 그렇지만 그것을 늘 새롭게 보이게 만들어요. 그것이 그녀만의 스타일이죠. 절대 복제품같이 보이지 않아요.”
코폴라는 비아르의 2020 프리폴 메티에 다르(Métiers d’Art) 컬렉션에서 아트 디렉팅을 맡았다. 이 컬렉션에는 ‘파리 31 뤼 캉봉(Paris-31 Rue Cambon)’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그리고 가브리엘 샤넬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은 채 관객의 반응을 반사시켜 볼 수 있도록 그 유명한 계단과 거울 벽을 설치했던 샤넬 캉봉 매장이 그랑 팔레에 재현되었다(2000년대 초 크리스티앙 리에거(Christian Liaigre)가 칼 라거펠트를 위해 모더니스트 블랙 & 그레이로 꾸몄던 그 매장은 유명 데커레이터 자크 그랑주(Jacques Grange)가 현재 리노베이션하고 있다. 1930년대 오리지널 분위기를 환기시킴으로써 비아르의 취향을 반영하려 한다는 것). 코폴라는 패션쇼가 끝난 후 유서 깊은 1920년대 식당 라 쿠폴(La Coupole)에서 디너와 애프터 파티를 열자고 제안했고, 정신없이 시끌벅적한 시간을 비아르의 록 스타일 세상으로 이끄는 밤이 되었다. 젊은 벨기에 가수 앙젤(Angèle)이 노래하고 프랑스 전설적인 크루너 스타일 가수 크리스토프(Christophe)가 즉흥 무대를 연출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크리스토프는 코로나19로 쓰러졌고 비아르는 그의 노래로 2021 봄 컬렉션의 문을 열었다).
‘파리 31 뤼 캉봉’ 프로젝트의 서막으로서, 비아르는 파리 외곽에 위치한 샤넬 아카이브 박물관에서 코폴라와 만났다. 그곳에선 샤넬의 작품을 박물관처럼 보관하고 있다. “버지니가 오토바이를 세우더니 헬멧을 벗고 내린 뒤, ‘오케이, 갑시다’라고 말했죠.” 코폴라가 그날을 기억했다. 비아르는 코폴라를 데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벽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샤넬의 실크 파자마 또는 옵아트식 타이다이 실크 블라우스와 조화로운 재킷 안감을 부착한 1960년대풍 수트 같은 놀라운 작품을 꺼내서 보여줬다. “그녀는 이런 보물을 보여주며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코폴라가 말했다. “재미있죠. 샤넬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했으니까요.” 1960년대풍 수트의 안감은 이번 컬렉션의 타이다이 섹션으로 이어졌다. 그 아카이브의 디렉터 오딜 프레멜(Odile Prémel)은 뭔가 중요한 것을 새로 입수하면, 비아르와 샤넬 공방 장인들에게 가져와서 그 기법을 연구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개인 강습 같은 것이죠.” 비아르가 말했다. “그런 게 너무 좋아요! 좋아!”
파리 의상 박물관(Palais Galliera)이 샤넬의 비용 부담으로 2년 동안 리노베이션을 끝낸 후 <Gabrielle Chanel. Fashion Manifesto> 전시를 열었다. 비아르와 나는 전시를 둘러보면서 코코의 유산을 더 많이 탐구할 수 있었다. 비아르는 끌로에에서 라거펠트가 보여준 미학을 떠올리게 하는 경이적인 1920년대 드레스를 보고 황홀경에 빠졌다. 그리고 플리츠 크레이프 스커트 위에 입었던 1934년 땜납(Pewter) 스팽글 이브닝 재킷과 샤넬만의 아이보리 실크 데이타임 파자마 같은 놀라운 작품도 그녀를 흥분시켰다. “너무 현대적이네요.” 비아르가 말했다. “이런 점이 가브리엘을 우리와 가까워지게 만들었죠.” (“가브리엘은 자유롭고 싶어 했어요. 말 위에 올라타고, 미친 듯 춤추러 가고, 그런 뒤 일하러 갈 수 있길 원했죠.” 드 메그레가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편한 의상을 만들었어요. 버지니도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똑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죠.”) 투어를 끝내면서 깊이 감동받은 비아르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창작에 헌신한 두 명의 삶을 봤군요.” 그녀가 말했다. “칼의 스케치 몇 점과 몇몇 컬렉션이 기억에 남아요. 여기서 봤던 한두 가지 디테일에 의해 영감을 받은 그런 작품인 거죠. 그것이 그의 삶이고, 그것이 그녀의 삶이죠.” 그녀가 피팅 작업을 하러 나서면서 기프트 숍에 들러 엽서를 샀다. 그녀는 그 엽서로 라숌(Lachaume)에서 고를 꽃과 함께 컬렉션을 마무리한 뒤 각 아틀리에 대표에게 보낼 것이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비아르의 눈이 그 생각으로 기쁘게 빛났다.
비아르의 삶이 승진으로 어떻게 바뀌었을까? “저는 더 많이 일하고 있어요. 늘 일하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패브릭 공장을 물려주셨고 저는 그곳을 최고로 만들고 싶었어요. 저는 그들이 행복하길 바랐죠. 종종 혼자 이런 질문을 던져요. ‘칼, 어떻게 생각해요? 이거 괜찮아요?’라고 말이죠.”
비아르의 2021 봄 기성복 쇼 전날 밤, 전설적인 샤넬 아틀리에가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어시스턴트 모두 여성들이었고 굉장히 협동적인 비아르의 팀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열정적으로 쏟아내고자 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수십 년간 샤넬에 몸담고 있었다. 사진가 이네즈와 비누드 커플은 그들이 제작한 세 편의 짧은 프로모션 무비 티저에 나온 스틸 사진을 비아르에게 보여주려고 와서, 의자 뒤쪽에 팔을 두른 가브리엘 샤넬의 상징적인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다음 스튜디오 끝자락 벽에 붙여놓은 편안한 하이백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한때 라거펠트가 책상에서 떨어진 이 의자에 앉아 열정적으로 스케치를 하곤 했다. 비아르는 거의 엉덩이를 붙이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베일이 부착된 1930년대 스타일 헤어밴드나 베이비 핑크 혹은 진줏빛 핑크 퀼팅 지갑을 앙상블에 매치할지 고민하면서 작업실 반대편 끝 쪽 드레싱 룸에서 모델들을 스타일링하느라 분주했다.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건 아니에요.” 비아르가 설명했다. “그리고 모델들이 옷을 입고 편안함을 느끼지 않으면 저는 그런 옷을 바꾸죠.” 19년간 샤넬 모델로 활동해온 아만다 산체스(Amanda Sanchez)부터 샤넬에서 만난 동료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가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의 카탈로그를 위해 발굴한 모델 루이즈 드 슈비니(Louise de Chevigny)까지 다양한 모델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몹시 좋아요.” 비아르가 슈비니에 대해 말하며, 그녀가 1980년대 패션쇼 혹은 그 시대 헬무트 뉴튼 사진을 장식했던 정말 시크한 여성들과 닮았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프랑스 모델이 많이 서요.” 비아르가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국제 여행 제한령이 가까운 곳의 모델을 캐스팅해야 함을 뜻한다는 사실을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저는 비아르를 정말 좋아하죠.” 사진가 이네즈가 말했다. “비아르는 모델에게 신경을 많이 써요. 더 아름답게 만들고, 기분 좋게, 더 근사하게 보이도록 하고 싶어 해요. 진정한 너그러움이 담긴 거죠.”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버지니의 비전은 삶에 대해 그리고 삶 가운데 무엇을 입느냐와 더 관련되어 있죠. 패션이나 변화에 관해 표현하려고 애쓰기보다. 그런 것은 이 회사와는 관계가 없죠. 우리가 관련이 있나요? 사람들은 자학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녀의 비전은 자신의 옷을 사는 여성의 삶을 뒷받침하는 데 더 많이 관련되어 있죠. 그것은 정말 여성적인 접근 방식이죠.”
비아르는 이번 컬렉션을 위해서 영화뿐 아니라 배우들에 대해서도 열정을 쏟았다. 이네즈는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감독의 <보카치오 70>에 출연한 영화배우 로미 슈나이더와 알랭 레네(Alain Resnais) 감독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Last Year at Marienbad)>에 출연한 영화배우 델핀 세리그(Delphine Seyrig)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 모두 가브리엘 샤넬의 옷을 입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곧 알아챘듯, 프랑스 누벨바그부터 <레미제라블(2019)>(그녀가 퍼렐 윌리엄스를 통해 만난 친구 래드 리(Ladj Ly) 감독의 연출작)까지 다양한 영화 취향을 지닌 비아르는 ‘현재’로부터도 영감을 끌어내고 있었다. 이네즈가 말했듯 레드 카펫에 서거나 공항으로 가거나 혹은 스타벅스로 가는 여배우를 보면서도 영감을 받는 것이다. “여성의 삶 혹은 일상의 각기 다른 순간을 위한 옷에 더 가깝죠. 거기에는 자유가 깃들어 있어요. 단지 당당한 샤넬인 거죠.”
비아르는 지금 수십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세계적인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이고 그녀의 업무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인적인 삶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라거펠트가 세계적인 수준의 아르데코 보물, 그다음 박물관 소장급 18세기 장식품, 그다음에 최첨단 현대 디자인 작품에 둘러싸인 채 살았다면, 비아르는 그다지 인기가 많지 않은 파리 14구에 있는 아티스트 아틀리에에서 살고 있다. 20년 전에 샀지만 개조할 이유를 전혀 못 느낀다. “그곳이 너무 좋아요. 칼은 늘 웃었죠. 저는 아무것도 바꾸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새 차를 사면, 원래 타던 차가 낡은 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죠.”
비아르는 이동 제한령이 내려진 동안 자신의 파트너이며 작곡가 겸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장 마르크 파이요(Jean-Marc Fyot, 그녀는 그를 ‘내 피앙세’라고 표현한다)와 두 사람의 25세 아들 로빈슨(Robinson)과 함께 드롬 프로방살(Drôme Provençale)에 있는 평범한 주택에서 보냈다. 비아르가 그 집을 약 20년 전에 매입했을 때 그녀의 피앙세는 그것을 ‘불법 건축물’이라 표현했다. 이후 비아르가 계속 집을 고치고 있지만. 다행히도 프랑스가 엄격한 격리를 실시했을 때, 그녀는 메티에 다르 컬렉션을 마치고 2021 봄 기성복 컬렉션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시골에서 그녀는 자전거를 타거나 풀장에서 수영하고 요리와 청소를 하며 정신없이 보냈다. “집안일을 하고 나서 결과물을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렸죠.”
그녀가 마스크를 쓴 사람으로 가득 찬 파리와 그녀의 스튜디오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2021 봄 컬렉션 작업에 뛰어들었다. 이 컬렉션은 그랑 팔레의 아르누보 스타일 철제 구조물 아래 설치한 상징적인 ‘HOLLYWOOD’ 사인을 흉내 낸 ‘CHANEL’이라는 대형 글자판 무대에서 공개되었다. “이번 시즌은 정말 기존과 다르죠. 그렇지만 우리는 적응해야 합니다.” 이 패션쇼의 프로듀서인 에티엔 루소(Etienne Russo)가 말했다. 힘을 보태고자 그곳에 함께한 파이요는 데이타임 턱시도 밑에 스키니 블랙 가죽 진과 후디를 매치해 록 스타 같은 멋을 뽐내고 있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호리호리한 블랙 샤넬 코트에 내로우 팬츠와 에나멜 가죽 첼시 부츠를 매치한 비아르는 초자연적으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녀는 전에 이런 무대를 여러 번 경험했다. 이 샤넬 전문가는 심지어 지원팀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모델들이 코로나 검사를 받는 기간에조차 모든 일이 시계같이 정확하게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 컬렉션은 크리스토프의 음악을 배경으로 영화처럼 시작했다. 이 음악은 옛 영화에서 가사를 차용하고 있었고, 비아르는 막스 오퓔스(Max Ophüls) 감독의 1955년 작품 <Lola Montès>가 그 영화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모니터로 지켜보던 비아르는 재즈 시대의 흑백 앙상블이 마지막 부분에 등장해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의 세련된 연출을 떠올리게 하자 너무나 황홀해했다.
소셜 미디어를 거부하고 여전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살아가는 그녀는 짧은 인사를 건네기 위해 무대 앞으로 나가기 전 살짝 움츠린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자신보다 자신의 작품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길 원하죠. 그런 점이 굉장히 모던하다고 생각해요.” 드 메그레가 말했다.
백스테이지에서 비아르의 지인들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정말 화려하고 매력적이었어요.” 뮤지션 세바스티앵 텔리에(Sébastien Tellier)가 말했다. “또 굉장히 즐거웠어요. 가벼우면서도 정말 사랑스러웠죠.”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대서양 건너에서 그 무대를 지켜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정말 자신을 찾아가고 있고, 예술가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투영시키고 있어요. 그 소리가 분명하고 크게 들려요!”
- 글쓴이
- Hamish Bowles
- 포토그래퍼
- Anton Corbijn
- 시팅 에디터
- Suzanne Koller
- 헤어
- Delphine Courteille
- 메이크업
- Lucia P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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