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리스 모델들
요즘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성숙함에 동반되는 연륜과 자신감은 기탄없이 치하해야 마땅하다. 패션 세계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18세의 저는 뜬구름 잡는 듯한 생각을 주로 했고 그건 정말 멋졌어요. 이제 45세가 된 저는 현실적인 생각을 하며 일에 매진하죠. 그것들이 제게 힘을 실어주고 있어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모델 조지나 그렌빌(Georgina Grenville)이 파리에 있는 집에서 화상으로 말했다. 톰 포드가 이끌던 구찌에서 매끄러운 실크 저지 커터웨이 드레스와 최신 유행 미니스커트를 입은 섹시하고 짓궂은 용모의 미녀로 이름을 날리던 그렌빌은 얼마 전 카멜 컬러 팬츠와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에르메스 런웨이에 섰다. 그녀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여전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한층 더 매혹적인 자태를 뽐냈다.
“그 당시 저는 예쁜 모습을 내세워 일했죠. 그리고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니 뭔가 더 편해졌어요. 그리고 이제는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려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요.” 그렌빌이 설명했다. 그녀는 세 아이를 둔 엄마지만 베르사체 2020 프리폴 캠페인 영상에도 출연했다. 10대 자녀들이 엄마 몰래 요란한 파티를 열고 있는 가족 별장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기 센 여장부를 연기한 것이다.
현재 그렌빌은 패션의 중심 프레임에 들어선 40세 이상의 모델 중 한 명이다. 그들은 더 이상 카메오 역할을 하거나 전형적인 ‘나이 든 사람’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패션 현장에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젊은 여자들이 그들을 우러러보고, 동년배들은 그들을 인정하며, 디자이너들은 그들의 연륜, 스타일, 이미지 메이킹에 관한 지식을 높이 산다.
“각기 다른 세대로 올봄 시즌을 구현하려다 보니 압박감이 크더라고요.” 42세의 에르메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나데주 바니 시뷸스키(Nadège Vanhee-Cybulski)가 말했다. 그녀는 여성성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캐스팅 디렉터 마이다 그레고리 보이나(Maida Gregori Boina)와 함께 작업했다. “여성에 대한 표상을 심화하고 인생의 각 단계마다 관능미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길 원했어요. 젊은 세대에게 영감을 주고 싶었죠. 세월이 흐르면서 여성들의 매력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어진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 세대나 그 이상 세대의 여자들에게 그들이 언제나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도나텔라 베르사체, 샤넬의 버지니 비아르,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 끌로에에 새로 임명된 가브리엘라 허스트처럼 나이 많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비롯해 에이전트, 에디터, 스타일리스트까지 이런 책임감을 통감한다. 캐스팅 디렉터 피에르조르지오 델 모로(Piergiorgio Del Moro)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패션 시스템에서 다양성뿐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런웨이에서 다양한 삶의 단계를 표현하는 것 역시 아름다움에 관한 강력한 메시지를 투영합니다.”
이는 매출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소셜 미디어에서 ‘실제적인’ 반전문가 혹은 비전문가인 여성 인플루언서가 부상하자 젊은이들로 고정되던 연령대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팬데믹으로 인해 럭셔리 패션 마켓이 다소 위축됐다. 하지만 35세부터 64세까지 여성들, 특히 50세 이상 베이비 붐 세대가 엄청난 구매 파워를 보여준다(마케팅 플랫폼 쉬-코노미(She-conomy)에 따르면, 이런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더 큰 파워를 지닌다). 더구나 직접적 소비뿐 아니라 이 여성들이 미치는 영향력까지 포함하면 이들의 실질적 구매 파워는 70%에 달하는 듯하다. 종종 자신들뿐 아니라 가족을 위한 결정까지 내리기 때문이다. 높은 연령대의 여성들은 건강, 만족, 품질 그리고 그들이 신뢰하는 브랜드를 찾는다. 실제로 로레알은 2014년 에이지 퍼펙트 코스메틱 라인의 광고 모델로 헬렌 미렌(Helen Mirren)을 내세웠다(현재 75세인 그녀는 15년간 이 브랜드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83세의 제인 폰다와 함께 그 자리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77세의 로렌 허튼 역시 스트라이벡틴(StriVectin)의 홍보 모델로 활약 중이다.
탱탱한 가슴과 팽팽한 피부를 요구하는 하이패션계는 연령 변화에 다소 더디게 반응해왔다. “2000대 초에는 새로운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죠! 모델들도 교체될 수 있었어요. 출신에 따라 정의되는 빈 캔버스 같았죠. 벨기에, 미국, 브라질 등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있었어요.” <보그> 패션 부킹 디렉터 로지 보겔 에데스(Rosie Vogel-Eades)가 말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인종의 다양성을 이끌던 추진력이 사이즈와 연령의 다양성을 위한 길을 여는 데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제 그것은 하나의 독특한 견해가 아니에요. 게다가 건강한 것이죠. 여러모로 굉장히 불확실해진 요즘, 단지 새것만 보고 싶지는 않은 듯합니다.”
델 모로는 다양성을 추구한 캐스팅계의 개척자다. 올봄 펜디 패션쇼를 위해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와 협업해 그녀가 제시한 가족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 세대별 캐스팅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야스민 르 봉, 카렌 엘슨, 에바 헤르지고바, 세실리아 챈슬러와 그녀의 아들, 그리고 에디와 올림피아 캠벨이 펜디 무대에 섰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71세 페넬로페 트리의 등장이었다. 그녀는 젊은이들의 반란이 솟구치던 1960년대에 비트족다운 시크함의 대명사이자 <보그> 모델로 활동했다. 블랙 수트를 입고 트레이드마크인 앞머리를 내린 페넬로페는 모두가 선망하는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령의 다양성을 포용한 또 다른 디자이너로 코치의 스튜어트 베버스를 꼽을 수 있다. 그는 팝 아이콘 데비 해리와 케이트 모스 그리고 팔로마 엘세서와 렉시 볼링을 캐스팅했다. “저는 늘 캐스팅을 통해 다양성이 살아 있는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싶었어요. 나이는 숫자적인 것보다 진정한 영감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과 더 관련 있습니다.” 베버스가 말했다.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정말 근사하죠. 패션 비즈니스는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빈 캔버스를 찾는 데 집중하기보다, 스피릿과 개성을 전하는 모델들과 비모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일하는 데 더 열중하고 있어요.”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관중이 직접 우리가 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패션의 의미를 런웨이 너머까지 부여하는, 진정한 연관성을 만들도록 돕습니다.”
한편 40대 초반인 비비안 솔라리와 알렉 웩 모두 루크와 루시 마이어가 만든 질 샌더의 감성적인 캠페인 시리즈에 등장했다. 피비 잉글리시는 자신의 엄마이자 시인이며 아티스트인 웬디(Wendy)를 디지털 프레젠테이션에 모델로 세웠고, 에밀리아 윅스테드(Emilia Wickstead)는 매치스패션 설립자인 59세의 루스 채프먼(Ruth Chapman)을 캐스팅했다. 얼마 전에는 40세의 마리아칼라 보스코노가 발렌티노 꾸뛰르 쇼의 포문를 열었으며, 펜디는 데미 무어, 파리다 켈파, 나오미 캠벨, 크리스티 털링턴 등을 런웨이에 세워 추억을 소환했다.
경험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입증된다. 60대 저널리스트이자 FACE(Fashion Academics Creating Equality, 평등을 만들어내는 패션 아카데믹스)의 멤버 카린 프랭클린(Caryn Franklin)이 올리브색 트렌치 코트에 컴뱃 부츠 차림으로 회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야외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준수하며 진행된 아트 스쿨(Art School)의 올봄 프레젠테이션에서 워킹을 선보였다. 그녀는 연령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시대의 이면에서 심오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한다. 수십 년간 패션 화보를 장악하던 백인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다시 말해 모델들이 과하게 성적으로 부각되고 소녀화되는 그런 풍경으로부터 탈피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 패션은 개개인이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다. “그 화창한 날 굉장히 광범위한 인간의 정체성을 보여주었죠.” 아트 스쿨 패션쇼에 섰던 프랭클린이 말했다. “연령, 사이즈, 피부색과 성 정체성 등 다양한 신체적 차이가 모두 존중되고 일반화됐습니다.”
포토그래퍼는 건강한 이미지 창출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특히 소셜 미디어 피드를 장악하는 시간 왜곡, 즉 타임 워프 필터를 쓰지 않고 더 정직한 방식으로 높은 연령의 여성들을 렌즈에 담는 데 능숙한 여성 이미지 메이커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LA에서 활동하는 조 게트너(Zoë Ghertner)가 좋아하는 피사체로는 앰버 발레타, 말고시아 벨라, 기네비어 반 시누스 등이 있다. 모두 40대다. “지금 패션 비즈니스에는 엄청난 기회와 개방성이 있어요. 저에게 그건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한 진실과 맞닿은 것이죠.” 게트너가 설명했다. “젊은 모델들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어요. 그것이 바로 나이 많은 모델들과의 차이점이죠. 그들은 이미 ‘나다워지는 법’을 알고 있거든요. 저는 여성들에게 그들의 가림막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해요. 때로 굉장히 힘든 일이죠.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얼굴들을 보고 싶어요. 그런 얼굴들을 마주하면 현재의 제 자신이나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더 좋은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패션이 선사하는 변화의 마법을 환기시키면서도 친밀한 제스처와 표현을 포착해내는 게트너의 능력은 매우 매혹적이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과거 이미지 메이커의 영향을 떨쳐버리는 데 수년이 걸렸다고 한다. “우리가 보고 배울 만한 대단한 여성 포토그래퍼들이 있어요. 많진 않죠. 저는 커리어 초창기부터 이네즈 반 램스위어드, 비비안 사센(Viviane Sassen), 카차 랄베스(Katja Rahlwes), 코린 데이(Corinne Day), 20세기 초에 활동한 이모젠 커닝햄(Imogen Cunningham)을 존경했죠. 지금도 그렇고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디자이너가 다양한 연령대를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것은 굉장히 자극적인 일로 그들에게 활력소가 된다. 세 번째 봉쇄령이 내려지기 전, 비엔나에서 활동하며 미니멀리즘과 우아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페타르 페트로브(Petar Petrov)가 말고시아 벨라와 79세 포토그래퍼 엘피 제모탄(Elfie Semotan)과 함께 리조트 캠페인 촬영차 오스트리아 외곽으로 나섰다. 한때 모델로 활동했고 1990년대에 헬무트 랭과 협업했던(그들은 종종 패션쇼에서 여러 연령대를 뒤섞었다) 제모탄은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줬다. “엘피는 두려움을 몰라요.” 페트로브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늘 ‘누구도 삶이 언제 끝나는지 말해주지 않아’라고 말하죠.”
수많은 여성들이 그 활기찬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페넬로페 트리는 반자전적 책을 집필 중이다. 포기할 줄 모르는 로렌 허튼은 여전히 광고계 스타다. 이만 역시 코스메틱 라인을 운영 중이다. “나이 들어 퇴출되는 것은 없어요.” IMG에서 셀러브리티 매니저를 맡고 있는 크리스틴 포춘(Christine Fortune)이 말했다. 안젤라 린드발, 브룩 쉴즈, 스테파니 세이모어, 케이트 모스, 앰버 발레타, 캐롤린 머피 등이 여기에 소속되어 있고 다들 나이 제한 없이 메인 무대에서 여러 활동을 보여준다. “이 여성들은 중요한 인물로 계속 남아 전진하고 싶어 하죠.” 집에서 혹은 원격으로 줌을 통해 디렉팅한 사진을 촬영하면서, 팬데믹 기간에 모델 일이 변화하고 있다. 1990년대에 성장한 세대가 그 길을 선도한다. “그들은 조명, 메이크업, 헤어, 패브릭과 움직이는 방법 등을 잘 알고 있어요. 이것들은 좋은 모델이 되기 위한 필수 요소죠.” 델 모로가 말했다. 그리고 보겔 에데스가 이렇게 말을 보탰다. “그들은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옷을 스타일링하고 있어요. 여성이라면 그것들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실제로 한때 여성들에게 ‘연령에 적합함’을 추구하던 제한적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 자신에게 편한 것이 영감을 주고 동경의 대상이다. “우리 엄마는 ‘엄마’처럼 보였죠. 하지만 요즘은 그 틀에 맞출 필요가 없어요.” 습관적으로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스니커즈를 즐겨 신는 그렌빌이 말했다. “저는 일 때문에 몇 시간 동안 거울 앞에 앉죠. 그러다 보니 작은 변화도 굉장히 큰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 나이를 받아들이고 순리대로 살고 싶어요.” 그녀가 꿀팁을 알려줬다. 바로 명상, 창의적인 시각화, 기공 체조와 찬물 샤워가 그 비법이다. 나이와 경험이라는 프리즘이야말로 정말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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