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선 발상으로 빛을 선사했던 알버 엘바즈
1961. 06. 12 / 2021. 04. 24
59세. 알버 엘바즈(Alber Elbaz)는 코로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나면서 수십 년간 고혹적이며 시대를 앞서나간 발상으로 빛을 선사해왔던 패션계에 커다란 암흑이 생겼다.
알버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엘바즈 가족은 모로코의 여느 유대인 가족들이 그랬듯 모로코를 떠났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홀론(Holon)이라는 산업도시에 정착했다. 알버는 이스라엘 방위군에서 군 복무를 마쳤고 셴카르 대학(Shenkar College)에서 수학하던 시절 그의 천직을 발견했다. 알버의 어머니는 그가 계속 의학을 공부하길 바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봤고, 뉴욕(이곳에서 알버는 본명인 알버트의 t를 삭제해 미국인들이 발음하기 쉽도록 이름을 바꿨다)에서 패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800달러를 손에 쥐여주었다.
알버는 1989년 제프리 빈(Geoffrey Beene) 스튜디오에 합류하기 전, 웨딩드레스 제작자로 일했다. 까탈스럽지만 세련된 루이지애나 출신의 빈은 마크 제이콥스나 아이작 미즈라히 같은 유망 신예 디자이너 세대에 영향을 미치며 미국 패션 지평에 큰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빈은 알버의 재능을 알아봤고, 그의 제자가 된 알버의 기발한 터치와 창의적 상상력은 1990년대 초 제프리 빈 컬렉션에 뚜렷이 나타났다(엘바즈가 있는 동안의 제프리 빈 라벨에는 핸드 드로잉한 활 마크가 있다). 빈은 아주 엄격한 제작자였으며, 그의 작업 테크닉은 당시 뉴욕의 어떤 아틀리에도 대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또 독특하고 혁신적인 패브릭과 색상의 조합, 곡선을 이용한 패턴에 믿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감각을 지녔고 알버는 이를 빠르고 영리하게 흡수했다. 그 시절부터 알버는 스스로를 늘 ‘드레스메이커’라 칭했다.
1996년 알버는 기 라로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 파리로 갔다. 첫 런웨이 쇼는 쉽지 않았다. 하이힐을 감싸는 수많은 진주 목걸이가 풀리며 런웨이에는 진주알이 위험하게 흩뿌려졌고 모델들이 걷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쇼 마지막에 찰리 채플린 같은 걸음걸이와 손짓을 하며 디자이너가 등장했고, 이 모든 것을 일종의 슬랩스틱 유머의 장으로 만들며 부정적이던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바꿔놓았다. 알버가 기 라로쉬에서 그의 가치를 증명하는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생 로랑의 창업자인 피에르 베르제가 이브 생 로랑의 승인을 얻어, 그동안 주목하던 알버를 생 로랑의 기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스카우트했기 때문이다. 생 로랑과 알버의 만남은 운명과 같았다. 생 로랑은 북아프리카의 태양 아래 태어나 자랐으며, 파리지앵 스타일만큼 생동감 넘치는 컬러와 관능이 넘치는 아랍 복식을 이해하고 있었다.
알버의 컬렉션은 모두 탁월하고 스타일리시했으며, 클로에 세비니 같은 당대 ‘잇 걸’들이 아름답게 선보였다. 하지만 YSL의 유산을 탐구한 시간은 길지 못했다. 한 시즌 후 구찌 그룹이 브랜드를 인수하면서 톰 포드를 수장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알버가 패션계의 무자비함에 학을 뗀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곧이어 랑방을 총지휘하게 됐는데, 랑방은 가브리엘 샤넬처럼 여성용 모자 제작자로 시작해 자기 브랜드를 설립한 잔느 랑방(Jeanne Lanvin)이 만든 오랜 역사의 프랑스 꾸뛰르 브랜드였다. 잔느 랑방은 섬세하고 복잡한 구성의 의상을 만드는 기술로 유명했고, 이는 프랑스 여배우들이나 로맨틱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여성들(이를테면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조지 6세와 결혼했을 때 왕실 재단사 핸들리 시모어가 카피한 중세풍 랑방 스타일을 골랐다)에게 크게 어필했다. 오래 잠들어 있던 이 브랜드는 대만의 인쇄 재벌인 쇼 란 왕(Shaw-Lan Wang)이 참여한 컨소시엄이 인수했다.
그는 랑방에서 마침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았다. “어떻게 하면 여성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늘 알버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여성의 삶을 더 좋고 편하게 만들기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그의 의상은 늘 이 질문에 부합했다. 미리 세탁된 직물, 미완성 밑단, 천 한 폭만으로 제작한 드레스, 넓은 캔버스 리본에 눈에 띄게 세팅된 지퍼 드레스, 얇은 튤로 감싼 진주와 화려한 장식 보석 같은 것들을 통해 창조력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늘 옷감이 직접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제프리 빈에게 배운 것으로 부드럽거나 뻣뻣한 패브릭 한 폭을 영리하게 이용해 절개선을 최소화하고, 입은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식이다. 그가 컬렉션을 발표하고 나면 <뉴욕 타임스>의 패션 저널리스트 바네사 프리드먼은 이런 코멘트를 남기곤 했다. “여성과 여성의 신체에 대한 너그러움이 느껴진다.”
그의 패션쇼 역시 그 자체로 대단했다. 어두운 공간에서 모델들이 스모키한 조명 가운데 빛나는 모습은 매우 드라마틱하게 연출되어 모종의 에너지를 전달했고, 파리에서 가장 빛나는 쇼 중 하나였다. 알버 자체도 그러한 인물이었다. 마음이 넓고 재치 있으면서도 사려 깊고 친절했다. 동료 디자이너의 쇼 전날에는 정성스럽게 그림과 감사의 문구를 손수 그리고 써 넣은 카드와 꽃을 보냈고, 경쟁적인 분위기가 만연한 패션계에서 사랑받았다. 그리고 몇 시즌 동안 알버는 뉴욕에서 리조트 컬렉션을 몇 차례 발표했는데, 여기서는 포토 스튜디오에 아름다운 세트를 마련해 옷을 선보였다. 이는 기발하면서도 즐거운 모놀로그가 포함되어 있었다. 알버 특유의 위트 넘치는 ‘셀프 디스’로 구성해 디자이너가 아니었다면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됐을 법한 면도 보일 정도였다.
알버가 만든 랑방 의상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 틸다 스윈튼이 2007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때 입은 심플한 비대칭 블랙 벨벳 드레스를 통해서였다. 이 드레스는 다른 레드 카펫의 모든 인물이 과한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또 2012년 오스카에서는 메릴 스트립이 <철의 여인>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때의 드레스도 제작했다. 2015년 패션 그룹 인터내셔널 시상식에서 알버에게 슈퍼스타 어워드를 수여한 인물 역시 메릴 스트립이었다. “알버 엘바즈가 만든 랑방 드레스를 입으면, 나 자신이 더 나은 나로 느껴져요.” 메릴 스트립이 청중에게 말했다. “내가 ‘메릴 스트립’이 되어야 하는 어떤 중요한 이벤트가 있죠. 주로 영화계뿐 아니라 세계에서 변화하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거대한 기념행사인데, 이때 알버가 가장 필요합니다. 그는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아요. 제가 가진 걱정, 몸무게, 키, 나이 같은 것들에 대해 말이죠. 그저 아름답게 만들어줄 뿐입니다.”
알버 스스로는 아틀리에 재봉사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누군가를 스타로 만든다는 것은 많은 사랑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패션계를 지적하는 말도 남겼다. “우리 디자이너들은 낭만과 영감, 감성으로 가득 찬 의상 제작자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 ‘크리에이트’, 즉 창조해야 하지만, 대부분은 디렉팅을 해왔죠. 이제는 이미지 메이커가 되어 사진에서 어떻게 하면 잘 나올지 고민합니다. 화면이 소리 지르듯 뭔가 나와야 하는 거죠. 시끄러운 것이 새로운 멋입니다. 하지만 저는 속삭임을 더 좋아합니다. 더 깊이 닿고 오래가니까요.”
그의 생각은 자신이 완전히 새로 일궈온 랑방이라는 브랜드의 방향성에 대한 쇼 란 왕과의 의견 충돌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2015년 알버 엘바즈가 슈퍼스타 어워드를 수상한 후 14년을 이어온 랑방과의 인연은 별안간 이별을 맞이했다. 다른 유명 브랜드가 그를 채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패션계는 더 경악했다. 상처받은 알버는 자신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을지 모른다. 그는 프레데릭 말과 향수 협업을 진행했다. 알버는 ‘드레스 향기나 냄새’를 재현하길 원했다. 내가 알버 엘바즈를 만났을 때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식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무려 두 번째였다. 사실 그는 작위 ‘승격’을 받은 것이다(그는 현재 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등급에 해당한다). “저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거죠.” 내가 재입성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다음에 하고 싶은 게 뭔지, 어떻게 일하고 싶은지, 부족한 것이 무엇이고 패션에서 부족한 것은 또 무엇인지 숙고하고 있어요. 어찌하면 더 좋게 할 수 있는지도 고민하죠.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시스템에 대해서도. 이를테면 이런 쇼를 다 하는 게 맞는 것일까? 1년에 여섯 시즌을 하는 것이? 여성들은 뭘 원할까? 어떤 옷을 입을까?”
“정말 패션이 그리워요.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을 먹기 위해 패션에서 멀어질 필요도 있었어요. 하지만 내 방식대로 하자면… 현재 존재하는 시스템을 계속하고 싶은 것은 아니에요. 현재 시스템에서 잘되지 않았던 무언가를 바꾸고 싶어요. 제 꿈은 한때 의사였고, 뭔가 문제가 있는 부분을 찾아내서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의사죠.” 그러나 알버가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동안, 빠르게 변화하는 세태 속 새로운 세대의 고객은 그의 업적도 유산도 모른 채 성장했다. 알버는 실리콘 밸리로 여행을 떠났고 거기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전통과 기술이 공존할 수 있나?’ 그는 여행 후 자신에게 질문했다. 패션은 여전히 의미 있는 걸까? 대답은 ‘매우 그렇다’였다.
2020년 <보그>가 진행하는 ‘Forces of Fashion Summit’을 위해 나는 파리 리츠 호텔에서 알버와 차를 마시며 스위스 명품 그룹 리치몬트가 지원하는 그의 새 브랜드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눴다. 우리는 꿈에 나올 법한 티 파티 준비를 위해 널찍한 공간이 있는 긴 테이블 끄트머리에 자리 잡았다(알버는 건강 유지 습관에 관심이 많다). 우리는 그 파티에 미셸 오바마, 레이디 가가, 그레타 툰베리, 제인 밤(제임스 본드의 여성판) 등이 참여하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그는 새 브랜드의 이름을 밝혔다. ‘AZ 팩토리’라는 이름은, 그의 이름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따서 만든 것으로 새로운 컨셉과 아이디어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실험적인 브랜드였다. 티타임이 이어지는 동안 알버는 ‘혁명이 아닌 진화이자 새로운 시작’임을 재차 강조했다.“디자이너라는 직업은 단순히 패션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하고 거기에 상상력을 더하는 겁니다. 기능과 패션을 합한 거죠.” 또한 메릴 스트립의 발언을 상기시키듯 그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를 바꾸고 싶지 않아요. 제 힘이 닿는 한, 모두를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뿐이죠.” 그는 올 초 AZ 팩토리의 메시지가 ‘나의 몸’이라고 밝혔다. 이는 인체 공학적이면서, 스포츠에서 영감을 얻은 XXS부터 XXXL에 이르는 모든 몸매와 사이즈를 아우르는 드레스 컬렉션이었다. 자기 몸 긍정주의를 포괄하면서 그는 신기술과 환경에 대한 책임을 수용했다. “영감이 에밀 졸라의 작품 같은 데서 오는 게 아니에요.” 그가 <보그>의 패션 에디터 사라 무어에게 말했다. “센강 근처를 걸으며 조깅하는 사람을 보고 있는 저 스스로에게서 영감을 받아요. 1년 내내 같은 옷을 입고 조깅하는데, 패션은 왜 1년에 네 번 바뀌어야 하죠?” 그가 과연 어떤 것을 보여줄지 기대됐다.
그는 한여름의 열기를 싫어했다. 그러나 모로코와의 깊은 인연은 계속 간직했다. 2015년 F/W 랑방 컬렉션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모순의 나라, 사람의 열기와 향기, 아름다움의 나라’에서 영감을 받았다. 프레데릭 말과 함께한 향수는 드레스 향기와 함께 모로코의 재래시장 수크(Souk)를 떠올리게 했다. 수년 동안 알버와 함께한 알렉스 쿠(Alex Koo)는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앤티크 딜러 고든 왓슨(Gordon Watson)이 탕헤르에 가진 집을 빌리곤 했다. 탕헤르에서는 지중해가 대서양과 조우하는 동시에 대서양을 밀어냈고 여름도 이 바람에 쓸려나갔다. 덕분에 그가 절충적 장소라고 묘사한 상쾌한 날씨에 볕을 즐길 수 있었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여전히 너무 멋져요.” 그는 탕헤르의 매력에 대해 나에게 설명했다. “저에겐 그저 지리적 위치가 아닌, 변화하는 시간대예요.” 알버와 알렉스가 행복한 여름을 수없이 보낸 그 집의 관리자 아누아르 메스바히 타예비가 2018년에 결혼 소식을 전하자, 알버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날 밤 마지막까지 댄스 플로어에 남아 있던 사람은 바로 알버 엘바즈였다.
- 글
- Hamish Bowles
- 일러스트레이션
- Alber Elb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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