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진이 감행하는 변화에 대하여
도태되지 않기 위해 김여진이 감행하는 변화는 천국보다 낯설다.
넷플릭스, VOD 없이 TV 드라마가 전 국민의 공통 여가였던 시절, 악역을 연기한 배우는 식당에 갈 때 ‘등짝’을 조심해야 했다. 착한 주인공에게는 반찬 서비스가 주어졌지만, 악역에게는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서슴없이 등짝을 갈겼기 때문이다. <빈센조>에서 김여진은 등짝 스매싱 대신 “꼴 보기 싫다”, “꼭 좀 죽었으면 좋겠다” 같은 댓글을 두 팔 넘치게 받았다. 그리고 홍유찬 변호사(유재명 분)를 죽인 다음 날 아침, 김여진은 시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앞도 뒤도 없이 사람을 그리 죽이나!” 시어머니는 온 국민을 대신해 화를 버럭 내셨다.
김여진이 연기한 최명희는 정말이지 기이했다. 검사 출신 변호사라는 탄탄한 이력을 지닌 채 파마머리에 안경을 쓴 일상적인 외모로 살인을 사주했다. 그러고 정작 본인은 게걸스럽게 생선초밥이라거나 쌈을 먹어 치웠다. 서울 말투가 섞인 듣기 싫은 사투리를 쓰며 사무실이든 빨래방이든 줌바댄스를 췄다. 강자에게 90도보다 더 깊이 허리를 굽혔고 약자에게 함부로 했다. 증거를 조작하고 여론을 호도했다. 신발을 벗고 발가락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물렀다. 무엇보다 이 악랄한 행보에 이유가 없었다. 한결같은 악, 더럽고 뻔뻔한 악.
기괴하고 낯선 느낌이 ‘여자’, 그것도 ‘중년 여자’이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살인 교사를 하고 상추에 고기를 척척 얹어 싸 먹으며 낄낄 웃는 김여진의 얼굴을 봤을 때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내 머릿속 한구석이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 숱한 영화, 드라마에서 중년 남자가 했던 악한 행동이 ‘꽁꽁 뭉쳐서 튀겨져’ 있었다. “작가님이 싫어하는 군상을 합쳐놓은 캐릭터 같아요(웃음). 게다가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정말 뭣도 없이 극한까지 치고 나가니까 거기서 오는 충격성이 있어요. ‘여자가 나빠봐야 얼마나 나쁘겠어’라고 하는 게 있어요. ‘여자가 대단한 일을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의 반대급부적인 생각이죠. ‘저렇게까지 한다고?’ 이면에 ‘여자가?’가 있어요. 젊고 섹시한 여자도 아니고 힘센 근육질의 여자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중년의 여자가 저렇게까지 나쁜 짓을 한다고? 그걸 뛰어넘어주는 거죠.” 김여진은 낯섦의 지평을 넓히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중년 여성’ 하면 대부분 엄마를 생각해요. 일하는 여자라도 자식이 있다고 생각하죠. 최명희는 그 나이로 나오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이런 여자가 사회에 존재하거든요. 그런데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보여준 적이 별로 없어요. 평범해 보이는 여자가 악역으로 등장한 것도, 이렇게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도 처음 같아요. 여성에 대한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고 상상력을 높여줬어요. 그래서 재미도 있었고요.”
이겨야 한다는 욕구로 미쳐 날뛰는 괴물 같은 최명희에게는 ‘악녀’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았다. 그녀는 깔끔하게 ‘빌런’으로 불렸다. 그동안 ‘악녀’는 공식화할 수 있을 정도로 공통점이 있었다. 섹시하고 치명적인 외모, 이간질을 비롯한 치사한 수법, 악해질 수밖에 없는 개인적 사연 등이 그것이다. 악녀는 극의 재미를 부스터로 끌어올렸지만 우리가 여자를 바라보는 선입견을 공고히 했다. “여자 캐릭터는 청순한 캔디형과 화려하며 시기심 많고 이기적인 배역으로 양분화되곤 했어요. 여자의 적은 여자 프레임이 반복되고요. ‘악녀’에는 여자가 지닌 여러 특징 중에서 사회가 싫어하는 면을 뭉쳐놓았어요.” 김여진은 악녀를 그리는 방식이 우리를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여자로 살아야 한다는 프레임에 가둬놓는다고 지적했다. “엄마 악녀는 아이를 무시하거나 아이한테 1등 하라고 집착해요. 좋은 엄마는 집에서 요리하고 아이를 챙기는 모습이고요. 하지만 둘 다 가져갈 수 있거든요. 둘 다 하면서도 나쁠 수 있고요. 나쁜 아빠, 좋은 아빠라고 안 그러잖아요. ‘악녀’는 우리의 행동과 사고의 범위를 좁혀요. ‘너 그렇게 하면 나쁜 여자야.’ 이렇게 작동하죠.” 어떤 문제의식이 생겨서 새로운 여자 악역이 등장한 건 아니라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재미가 없으니까요. 너무 많이 나오니까 뻔하고 식상해서 벗어난 거예요. 클리셰가 반복되니 다른 캐릭터가 나오기 시작한 것 같아요.”
‘악녀의 공식’을 익히 알고 있던 우리는 사실 <빈센조> 마지막 회까지 최명희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풀리길 기다렸다. 하지만 최명희는 일관성 있게 악랄하게 굴다가 발톱이 모두 뽑힌 채 의자에 묶여 불에 타 죽는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여자’를 몸소 표현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 인물을 어떻게 이해해야 했을지 몹시 궁금했다. “어려서부터 사랑과 보살핌을 받기보다 계속 경쟁에 내몰리던 사람 아닐까 생각했어요. ‘이기면 살고 지면 죽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어’ 가르치는 부모 아래서 자라지 않았을까 하고요. 약육강식만 주입받으며 싸움을 해왔을 거고 어느 순간 선을 넘었겠죠. 증거를 조작하고 증인을 죽이며 이기기 위한 선을 한 발 한 발 넘어온 사람. 한편으로 굉장히 약한 사람이다 싶었어요. 약한 존재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계속 악을 쓰죠. 많이 짖는 개가 사실 겁이 많잖아요. 생긴 대로 살 거고 제일 꼭대기까지 갈 건데 방법이 장준우(옥택연 분)와 함께였던 거죠. 더 강력해질 수 있으니까. 사는 게 재미없고 다른 희열이 없던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의리가 있어서 배신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드라이한 사람이죠.”
최명희의 이런 면은 연기하는 내내 김여진에게 ‘두려운 감각’으로 따라다녔다. “명희가 느끼는 감정 중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하는 건 허무함이에요. ‘난 아무것도 아니야.’ 그 감각이 계속 쌓이더라고요. 최명희의 중심이 거대한 싱크홀처럼 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고 되게 무서웠어요. 마지막에 본인까지 집어삼키겠구나 싶어서. 사실 누구에게나 있어요. 산다는 게 별거 없고 아무것도 아닌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 느낌이 쌓이면서 홀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어요. 어떤 사람은 중독되거나 자기를 파괴하는 쪽으로 간다면 이 여자는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쪽으로 간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를 죽이고 밟았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는 최명희를 떠나보내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고 했다. “얼른 가” 인사를 건네며 안녕을 고했다.
무례한 캐릭터 성격 덕분에 맛본 쾌감도 있다. 김여진은 ‘아저씨스러움’이라고 표현했다. “대본에 적혀 있지 않았지만 하다 보니 아줌마보단 아저씨에 가까웠어요. 아저씨스러움이 뭘까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조금도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야 ‘왜 저래’ 싶은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어요. 거기에서 오는 쾌감이 있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구도 상관하지 않아본 적이 있었나. “지구에서 여자로 살면서 그러기 쉽지 않거든요.” 김여진도 재미있었다고 웃었다. “사람을 업신여기는 데서 오는 쾌감이 있죠. 힘센 사람이 된 것 같고, 다 내 밑인 것 같고요. 한승혁 역할 맡은 조한철 배우나 곽동연이 귀엽게 해줬어요. 화면에 다 나오진 않았지만 진짜로 쫄아주고 하찮게 굴어서 웃길 때가 너무 많았어요. 키 크고 멀쩡한 승혁이가 조그맣게 보이는 순간들이었죠.”
<빈센조>에 앞서 김여진은 영화 <헤븐: 행복의 나라로>에서 중년 남자의 서사를 비트는 새로움을 미리 맛봤다. 코로나로 인해 개봉 시기는 예측할 수 없지만 영화에서 그녀는 펑 튀긴 파마머리를 하고 ‘나시’ 한 장 입고 등장한다. “악역은 아니고 선한 편인 경찰서장이에요. 그래도 최명희보다는 약간의 여성성과 섹시함이 있어요. 원래 남자로 쓰인 역할인데 마지막에 번뜩 여자 배우에게 맡겼어요. 말을 권위적으로 하지 않지만 지위가 있으니 조사실에 들어가면 남자들이 쫙 조아리죠. 차분한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에요. 감독님이 너무 정성껏 찍어주신 장면이 하나 있어요. 차에서 내리면 전 뒤도 보지 않아요. 그냥 팔만 이렇게 뒤로. 부하들이 옷을 가지고 쫓아오면 전 팔만 넣고 앞으로 걸어가요(웃음).”
최근 우리는 여성의 서사가 확장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누구 엄마, 누구 여자 친구가 아닌 온전한 주체로 활약하는 여성들이 등장했다. 김여진이 연기한 두 인물은 그 흐름에 흥미로움을 더해줬다. 하지만 중년 여성의 서사를 보여주고자 하는 변화를 느끼는지 물었을 때 김여진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이만큼이라도 있어서 너무 다행이다 싶은 정도예요. 전 아직 많이 배고파요(웃음). <빈센조>만 봐도 그 많은 캐릭터 중에서 여자 배우는 다섯 명 나올걸요. 그래도 의미가 있다면 예전보다는 캐릭터가 새로워요. 인구의 반이 여자인데 다양한 여자가 나와야 하지 않나요. 어떤 걸 풀어나가고 어떤 걸 해나가는 여자 캐릭터를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김여진의 행보는 자유롭다. 감정의 결을 가만가만 쓰다듬는 독립영화 <살아남은 아이>는 물론 연극 <리차드 3세>, <마우스피스>에서 <마녀의 법정>, <인간수업> 같은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도드라지는 드라마까지 어떤 이미지에도 갇히지 않고 성큼성큼 넘나든다. “진짜 들어오는 대로, 가리지 않고 해요. 코미디도 하고 호러도 하고요. 여기서 경계하는 건 ‘나 편한 대로 하지 않는다’예요. 최명희를 편한 대로 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사연 있는 것처럼 아니면 정제해서 연기하면 잘할 수 있어요. 보는 사람도 눈에 익숙해서 편하고요. 아니면 작가님을 졸라서 사연을 만들어서 포장해달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렇게 안 했어요. 일단 주는 대로 해요. 어색하더라도 안 해봤던 걸 해보려고 해요. 저도 이십 몇 년 연기했지만 보는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했던 걸 또 하면 계속 볼 이유가 없어요. 새로운 배우들은 계속 등장하는걸요.” 연기하는 인물의 이미지가 생기는 건 배우의 숙명이지만 김여진에게는 인물이 쌓여갈 뿐 정체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김여진이 감행하는 변화는 그녀를 새롭게 감각하게 한다.
“예전에는 비슷한 느낌으로 어머니, 아버지 역할을 쭉 하는 배우들이 드라마에 안정감을 줬어요. 지금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연속극을 보지 않아요. 매체가 다양해졌고 드라마는 계속 진화하고 있어요. 똑같이 해서는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이번 작품 해서 주목받았잖아요? 비슷한 역할이 들어오고 비슷하게 연기를 하게 돼요. 그렇게 한 번, 두 번 하다 보면 그다음부터는 안 찾아요. 살아남기 위해서 저도 새로운 걸 해보고, 새롭게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예전과 작품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요즘은 저항감이 드는 작품도 다시 봐요. 며칠 뒀다가 다시 보고 마음을 열려고 노력해요. 연기는 다양하게 해야 늘어요. 작품이 들어왔는데 안 하면서 다른 작품을 기다리는 건 어리석어요. 피아니스트도 계속 연주하고 무대에 서야지, 2~3년 쉬면 아무도 안 찾거든요. 어느 예술이나 다 그래요. 현직에서 직업이고 밥벌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해내야 하는 것 같아요.”
지난해 연극 <마우스피스>에서 김여진은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는 중년의 극작가 ‘리비’를 연기했다. 40대 여성이 겪는 고독, 불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모두 녹아 있었다. 김여진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마우스피스>를 할 때 그 고민이 되게 컸어요. ‘더 이상 사람들이 날 찾지 않으면 어떡하지?’ ‘20년을 했는데 새로운 나를 보여줄 게 남아 있을까? 두 가지가 다 공포였어요.” <마우스피스>의 리비는 젊어서 천재로 불리며 각광받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은 그녀의 글에 시큰둥해진다. 그리고 더 이상 쓸 게 없다고 느껴지는 재능의 고갈 상태를 맞이한다. 김여진은 정확하게 짚었다. “그대로인 것 같지만 자기도 모르게 시대로부터 밀려난 거죠. 이 공포는 예술가도 공무원도 누구나 갖고 있어요. 한 가지 일을 20년 이상 한 사람은 이걸로 계속 먹고살 수 있을까? 고민이 세게 찾아오고 실제로 현실로 나타나요.” 리비는 미술에 재능이 있는 어린 소년을 만나면서 변화를 맞이한다. “다시 글을 쓰기까지 과정이 정말 고통스러워요. 리비가 가졌던 고민의 틀과 삶을 깨부수는 과정인 거예요. 아주 노련하고 옛날보다 훨씬 돈도 많이 받고 대우도 받아요. 그런데 알고 있죠. 곧 아무도 찾지 않을 거라는 것을. 나를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오지 않으면 그 안에선 썩을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할 것인가. 저 역시 고민을 계속하고 있어요.”
삶에서 일만 계속해나갈 수 없다. 우리 삶에는 결혼, 출산과 같은 변수도 생긴다. “살아보니까 아주 단순해요. 일과 사랑이에요.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뤄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쉽지 않아요. ‘저글링’에 가까워요. 지금도 잘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약간 깨진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둘 다 포기할 수 없다고 봐요. 같이 가져가려고 애쓰는 수밖에 없죠.” 아이를 낳고 길렀던 경험이 연기에 분명 녹아드는 게 있다고 말했지만 김여진은 그보다 바탕이 되는 얘길 꺼냈다. “두려움과 조급함에 조금 초연할 수 있어요. 배우는 빛과 그림자의 농도가 크게 차이가 나는 직업이라 자연인인 내가 있어야 해요. 친구,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해요. 일이 나라고 생각하면 망가지기 쉬워요.”
김여진의 ‘알 깨기’는 일상에서도 진행 중이다. ‘요즘 재미있게 느끼는 것들’을 질문하니 잠시 대답을 고르고 ‘먼저 전화해서 만나기’라고 말했다. “이제야 해보고 있어요. 정말 ‘집순이’라 작품 마치고 한번 보자 해도 잘 안됐거든요. 조금 애써서 먼저 밥 먹자고 전화하고 있죠. 그런데 재미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세계를 넓히는 중이다. “여행을 가잖아요? 가서도 저는 그냥 저더라고요. 환경만 달라질 뿐 원래 하던 거 하고 있어요(웃음). 책이나 유튜브, 영화 보거나 그림 보러 가고요. 내가 달라질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했을 때 사람 만나기더라고요. 만남에서 새로운 자극을 많이 받아요.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저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해요. 책이나 영화는 취향이 강화되는 쪽이라면 사람 만나는 건 다른 자극이에요.”
김여진은 움직인다. 손수 몸소 움직인다. “어른이 돼야 하는 입장”으로서 “기부를 하든 제도 만드는 데 일조하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하고자 한다. 배우로서 일 외에도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성평등소위원회 위원장, 한국여성재단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요즘 고민은 영화나 방송 쪽 여성들의 경력 단절이다. 결혼과 육아로 일을 놓으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단시간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일단 김여진은 전수조사를 나가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하며 귀를 기울인다. “맨 처음 해야 할 일은 수면 위로 올리는 거예요. 이게 문제라고 알릴 필요가 있어요.”
김여진을 연기의 길로 이끌었던 연극의 제목은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찾았던 극장에서 그녀는 지구가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고 곧바로 진로를 틀어 단원으로 들어갔다. 포스터를 붙이고 전단을 나눠주며 매일 무대를 바라봤고, 어느새 대사는 머릿속에 저장됐다. 갑자기 대타 배우가 필요했을 때 김여진은 거절하지 않고 무대에 올랐다. 드라마처럼 영화처럼 김여진은 그렇게 배우가 됐다. 배우가 될 운명이었던 그녀에게 첫 연극의 제목을 마지막 질문으로 던졌다. “아까 일과 사랑을 말했는데 제게 더 큰 의미를 갖는 건 사랑이에요. 일도 자신의 인생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의 반대말은 두려움이에요. 서울에서 벗어날까 봐, 일을 못할까 봐, 결혼을 못할까 봐, 애를 잘못 키울까 봐, 이 두려움을 내 인생의 근간으로 삼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거죠. 일을 사랑해서 아이를 사랑해서 이곳을 사랑해서 살아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요. 분명 태도가 달라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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