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시라는 이름 그대로
이름 그대로 예담 고민시의 뜻은 ‘높고 평평한 곳에서 하늘을 보며 나아가라’.
고민시의 호는 예담이다. 나아갈 예(詣), 평평한 땅 담(埮)으로 4년 전 스님이 지어줬다. 고민시가 높을 高, 하늘 旻, 보일 示를 한자로 써 ‘높은 곳에서 하늘을 보라’인데, 예담까지 더해져 ‘높고 평평한 곳에서 하늘을 보며 나아가라’는 의미다. 호 덕분인지 2018년 <마녀> 이후로 <스위트홈>, <좋아하면 울리는>, <오월의 청춘> 등 대중에게 가까이 가는 작품을 만났다.
대전에서 태어난 고민시는 웨딩 플래너로 일하다가 ‘내 삶 이대로 괜찮을까’ 싶어 어릴 적 꿈인 배우가 되기 위해 사표를 내고 상경했다. 데뷔작은 2016년 <72초 TV>의 웹드라마다. 소속사도 없었고 자기 옷을 챙겨 버스를 타고 현장에 갔다. 이 시리즈는 고민시의 시작을 보고 싶은 사람들로 유튜브에서 ‘역주행’되고 있다.
최근작은 지난 6월 8일 종영한 KBS2 <오월의 청춘>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청춘(고민시, 이도현, 이상이, 금새록)의 우정과 사랑이 펼쳐지는, 요즘 보기 드문 정통 멜로드라마다. 역사가 스포일러이기에 더 슬펐던 작품. 아직 완벽히 정리되지 않은(될 수 없는) 근현대사를 가져온 작품이라 신예 배우로서 선택이 쉽지 않았을 거다. 고민시는 무조건 하고 싶었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지만, 역사로 이들을 데려오자 벌어지는 사건이 너무 충격이었어요. 흥행 여부를 떠나 이런 드라마는 제작되어야 한다고 여겼어요. 배우의 매력은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작품은 남는 것이죠. 이런 작품은 길이 남을 가치가 있었고, 그 일부가 된다니 자랑스러웠어요.”
고민시는 5·18 관련 책과 영화, 다큐멘터리로 시대 배경을 공부했다. 그중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고민시에게 많은 눈물과 생각을 남긴 작품. “친할머니께서 작년 말에 돌아가셨고, 외할머니께서도 반년 뒤에 떠나셨어요. 나는 이별이 너무나 힘든데, 5·18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아팠을까. 매년 5월이 돌아오면 살아남은 이들은 여전히 슬픔 속에 있겠구나, 그 시대가 아니면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던 분들인데… 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오월의 청춘>을 촬영할수록 청춘이란 단어가 더 아프게 다가왔어요.”
최근 고민시는 5·18기념재단에 1,000만원을 기부했다. “다른 셀럽들이 기부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본받고 싶었어요. 나중에 돈을 더 많이 벌면 하기보다 지금 나이에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하려고요. 비밀로 하려 했는데, 재단 측에서 기부 내용을 광주 신문에 내고 싶어 하셨어요. 이렇게 크게 알려질 줄 몰랐어요.”
<오월의 청춘>은 주연배우 네 명이 모두 신인에 가까운 젊은 배우였고, 감독과 작가도 데뷔작이었다. “흔히 말하는 플러스 요인은 없는 상황이었어요. 톱스타도 없고 예산도 적었고요. 하지만 하루살이처럼 모두가 똘똘 뭉쳐 하루하루를 진심으로 열심히 보냈어요. 상대역인 도현 씨는 제가 감히 얘기하지만 너무나 잘하고 열심히 해서 질투가 날 정도였죠. 다른 스태프도 마찬가지고요. 진심이 통했기에 좋은 작품이 나왔어요. 코로나 때문에 같이 밥 한 번 못 먹어서 아쉽지만, 다들 저처럼 자랑스러울 거예요.”
다른 또래 배우들은 <오월의 청춘>을 다른 면에서도 부러워했을 거다. 요즘 드라마는 특정 사건을 추리해가는 장르물, 좀비나 괴물, 초능력, 시간 여행 등 특이한 설정의 스타일로 끌고 가는 작품이 많다. OTT의 영향으로 미드, 영드의 장르물에 대중이 익숙해지고 그런 작품을 선호하면서 한국 드라마도 그런 실험이 이뤄지는 중이다. 그만큼 정통 멜로드라마가 줄었기에 <오월의 청춘>이 반갑다. 고민시가 연기한 외유내강형 비련의 여주인공(명희)은 배우라면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역할일 거다. 카메라는 섬세한 감정을 담아내려고 클로즈업을 많이 했다. 고민시의 깜빡이는 눈, 손짓 하나가 의미 있게 담겼다. “저는 삶을 강하게만 헤쳐온 명희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서 미묘하게 변해가는 지점이 좋았어요. 진짜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지켜주고 싶고 그를 위해 기도하죠. 아직 저는 스물 몇 해밖에 안 살아봤지만 이런 감정을 요즘 시대에 느끼기는 힘든 것 같아요.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더 애틋하고 예쁜 청춘이었고, 그런 여주인공 연기를 할 수 있다니 축복이었어요.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의미로 농도가 짙어져요.”
고민시의 다음 드라마는 김은희 작가의 <지리산>이다. 코로나로 지난해 11~12월 두 달간 촬영이 중단되었지만 현재는 열심히 산을 타며 촬영 중이다. 고민시는 지리산 천왕봉을 처음 올라가봤다. 수묵화 같은 풍경에 넋을 놓았고, 그제야 김은희 작가가 이 드라마의 목적 중 하나가 힐링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았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산세를 시원하게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활약하는 레인저(산악 구조대)와 등산객의 미스터리한 관계가 펼쳐진다. 고민시는 선배 레인저 전지현과 함께 활동하는 ‘병아리 레인저’로 나온다. 그는 평소에도 산을 즐겨 타 인스타그램에는 정상 등반 기념사진이 많다. 하지만 잦은 산행으로 무릎에 무리가 오면서 지리산 촬영을 위해서라도 등산을 멈춘 상태.
<지리산>이 우리에게 힐링을 줄 예정이라면, 고민시는 평소에 어디에서 위안을 얻을까. 우선 힘든 일에도 잘 대처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을 위해 좋은 습관을 들이려 한다. 아침이면 아보카도와 견과류, 유산균과 영양제처럼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발레와 요가도 꾸준히 한다. 슬픈 일이 생기면 더 어두운 책을, 울고 싶으면 옆에서 툭 건드려 울게 만드는 책을 읽고 그 안에 매몰되어 기운을 차리는 편이다. 와닿은 구절은 사진으로 찍어두고 때때로 꺼내 본다. 인스타그램에는 이런 문장이 올라와 있다. “아, 같은 삶을 한 번만 더 살아봤으면, 새로 얻은 지식을 기반으로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창밖 풍경에 무심한 기차 승객처럼 삶을 지나쳐 가지 말고 온전히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당시는 <좋아하면 울리는> 시즌 2의 촬영이 끝나고 쉬던 때다. “차기작이 정해져 있었음에도 불안했고, 부모님과 한 약속을 지킬 수 없을까 봐 고민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이 구절이 와닿았나 봐요. 만약 시간을 돌리면 내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모진 순간을 거치면서 불완전한 삶에서 완전한 삶을 향해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이 많아졌죠. 평소에도 삶과 죽음을 많이 떠올려요. 어릴 때도 사후 세계, 존재의 의미 등에 관심이 많았고요.”
고민시는 삶의 면면이 납득이 되어야 하기에 자꾸 질문을 던지고 어려운 주제일지라도 계속 생각한다. 배역도 왜 그런 대사와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되어야 연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스위트홈>의 은유는 성격이 왜 그렇게 날카로운지 감독에게 여러 차례 물었다. 은유의 성격을 만든 배경 사건이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작품 역시 감독과 작가들에게 자주 연락한다. “답을 구하려고 귀찮게 해드리는 편이죠. 캐릭터가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이전 삶을 시뮬레이션해요. 그 후에 촬영 대본을 보면서, 아, 그는 이런 사람이기에 이 장면이 연출됐겠구나, 이렇게 연기해야겠다 이미지 메이킹을 하죠. 그렇게 하나하나 추가해 인물을 완성해가요.”
생각이 많은 만큼 글도 자주 쓴다. 40대 즈음엔 단편 모음집을 내보고 싶다. 아이디어 노트도 있다. 예를 들어 시선에 대해 얘기하고 싶으면 망원경 같은 키워드를 모아 문장으로 만들고 이어 장면을 글로 묘사해둔다. 2016년에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단편영화 <평행소설>이 ‘제4회 SNS 3분 영화제’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라라랜드>의 여주인공이 오디션에서 자꾸 떨어지면서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대신 자신이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린 것처럼, 고민시도 배우의 시작점에서 불안하던 차에 하고 싶은 얘기를 직접 영화로 만든 것이다. <평행소설>엔 남자가 소설을 써 내려가자 그 내용대로 행동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마지막엔 반대가 된다. 고민시는 이 작품에 대해 “두 인격이 평행선에서 만나는 이야기로 ‘평행 세계의 또 다른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게 어디선가 활발한 연기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어요”라고 말했다.
언젠가 영화를 또 만들고 싶다. “문소리 선배님처럼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재치 있고 감동을 주는 영화를 연출하고 싶어요. 특히 사회에 대한 시선이 잘 드러나면 좋을 거 같아요.” 고민시는 시선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한다. 얼마 전 크랭크인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밀수>를 말할 때도 그랬다. 함께 출연하는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선배의 연기 시선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열려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하나의 시선이 아니라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오. 뒤집어도 보고 밑에서도 보고 이런 다양한 시선이 합쳐지면 또 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겠죠. 그러기 위해 매사에 연구하고 배우려고 해요.” 예담 고민시는 그 이름처럼 가는 중이다.
-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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