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의 선댄스 리포트
배우 하정우가 영화 <네버 포에버>로 1월 18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22회 선댄스 영화제에 초청됐다. 그가 지독하게 추웠고, 놀랄 만큼 소박했다는 선댄스의 풍경을 <보그>에 전한다.
선댄스 영화제의 고향, 파크 시티에 도착했다. 세련된 진보의 영화 취향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증명하는 영화들과 관객들의 흔적으로 몸을 녹이는 혹한의 도시. 산소가 부족한 고산지대라 그런지, 감격 때문인지 어지럼증이 일었다. 날 이곳에 데려다준 건 <네버 포에버>다. 한국 배우가 출연한 영화로는 처음으로 미국 극영화 부문 후보에 올랐다는 이유로 화제가 된 그 영화. 특히 미국 극영화 부문은 <메멘토>, <저수지의 개들>, <헤드윅>, <슈퍼 사이즈 미>,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 등 수많은 화제작을 발굴했다. 게다가 매년 미국에서 제작되는 수백 편의 영화 중 단 16편만이 선정되는 영광의 자리다.
나는 그중 한 작품의 숨을 쉬게 만든 배우로 이곳에 온 것이다. <네버 포에버>의 월드 프리미어 상영관인 라켓 클럽 앞에 길게 줄지어 있는 관객들을 만날 땐, 묘한 느낌으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난 그들만큼 설레었다. 지난 여름, 뉴욕에서 7주 동안의 촬영을 마친 후 완성된 <네버 포에버>와 첫 대면하는 자리였으니까. 집행위원장 제프리 길모어가 6백여 개의 객석이 매진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직접 작품을 소개했다. 관객들은 한국인(데이비드 맥기니스)과 결혼했지만 외로운 여자(베라 파미가)와 가진 거라곤 몸뚱아리밖에 없는 한국 남자(하정우)의 러브스토리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거대한 맨해튼에 숨은 동양적인 미학을 찾아내듯이.
5개월 만에 만난 동료들, 김진아 감독과 데이비드 맥기니스, 그리고 베라 파미가와의 재회는 선댄스가 내게 준 또 다른 선물이었다. 특히 <디파티드>의 홍일점으로 한국에서도 얼굴을 알린 베라는 미국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라이징 스타’ 다. 4일 간 머물면서 난 미국판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피플>, <MTV> 등 10개 매체의 인터뷰 촬영을 했는데, 한결 같이 그녀와의 연기 호흡을 궁금해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부모에게 하얀 피부와 금발을 물려 받았지만 실은 정적인사람이었고, 그래서인지 처음부터 낯설지 않았다. 베라는 “극중이었지만, 하정우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날 칭찬했지만, 그건 내가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세 시간씩 자고 일어나는 강행군 덕분에 아쉽게도 다른 상영작은 한 편도 보지 못했다. 올해 선댄스는 개막작 <시카고 10>을 비롯해 반전, 환경, 인종차별 문제를 도마 위에 올렸다. 하지만 파크시티 곳곳의 정치 색은 과장되지 않은 채 관객들의 털모자와 따뜻한 커피잔에 녹아 있었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선댄스 연구소가 영화제를 주최한 이후 지난 22년 동안 ‘스몰 할리우드’ 영화제로 비판받은 것도 사실. 재미있게도 바로 옆에서는 선댄스의 상업화를 반대하는 슬램댄스 영화제가 열렸는데, 재미교포 그레이스 리 감독의 <아메리칸 좀비>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난 자신의 존재를 비판하는 상대와 시공간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여유에서 선댄스의 노련미를 실감했다.
서울로 돌아온 지금, 난 강원도 횡계에 다녀 온 기분이다. 지독하게 추웠고, 놀랄 만큼 소박했던 영화제. 파크시티는 인구 8천 명 남짓한 작은 리조트 동네다. 우리 일행은 리조트를 등지고 노는듯 즐길 수 있는 영화제를 만들고 싶다는 담소를 나누곤 했었다.
난 매일 미국 액터스 길드, 아시아 독립영화, 영화진흥위원회 등이 마련한 파티에 참석했지만, 한번도 정장을 입은 적이 없었다.20대 배우부터 60대의 제작자들까지, 이들은 모두 캐주얼하게 맥주를 마셨고 영화라는 공통어만으로 마음을 터놓았다. 칸에서도, 카를로스바리 영화제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경.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영화는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만들고, 연기하고,공유하는 과정이다. 나는 할리우드가 화려하게 건재할 수 있는 건, 순진한 선댄스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아쉽게도 <네버 포에버>는 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댄스는 신인인 내게 과분한 책임감과 함께 감도가 맞는 영화라면 언제든 도전해 볼 수 있다는 패기를 안겨주었다. 영화로 불 밝혀 해가 지지 않는 동네, 선댄스에서 난 한동안 잊고 지낸 영화의 본 모습을 목격했다.
- 에디터
- 윤혜정
- 기타
- 글 / 하정우, PHOTO / COURTESY OF NOWF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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