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그 우울함에 대하여
연말의 빛이 밝아지고 활기를 띨수록 내면의 우울은 깊어진다. 젊은 여성의 우울증은 최근 일어난 현상으로 비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의사도, 상담사도, 가족도 풀지 못한 ‘여성 우울증’을 당사자의 눈을 통해 바라봤다.
지난 9월 나는 첫 단독 저서 <미쳐 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미괴오똑)>을 펴냈다. 이 책은 여성 우울증을 다루는 과학 기술학 연구서이기도 하고, 31명의 인터뷰이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모은 르포이기도 하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기도 하다. 누군가 간략히 책 소개를 부탁하면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위로와 사과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찾아나선 여자들의 이야기예요.”
요즘은 출간 이후 책을 알리기 위한 홍보 일정을 소화하며 지낸다.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책 맨 앞 장에 사인과 함께 짧은 글을 적는다. “사랑과 광기를 담아, 하미나”라고 쓰기도 하고, “나는 당신의 광기가 좋아요, 하미나”라고 적기도 한다.
친한 친구인 준에게 이 책을 선물할 땐 조금 떨렸다. 한 번도 그에게 나의 우울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본 적이 없어서다. 준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인데도 그랬다. 그간 밝고 명랑한 것만 나누던 우리 사이에 우울과 불안과 같은 어두운 것을 나누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두렵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가진 진지함과 어두움이 우스워질까 봐.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상처받는 경험을 하게 될까 봐. 책을 선물하던 날 나는 준에게 줄 책에 용기를 내어 이렇게 적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준에게.
준, 내가 오랫동안 간절하게 찾아 헤매던 것이 있었거든. 아무리 찾아도 찾아지지 않아서 자주 외롭고 무력했는데, 어느 날 알게 된 거야. 찾지 못하면 내가 만들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뜻밖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앞으로도 준과 인생의 다양한 단계를 건너고 싶다. 사랑해.
나는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우울과 불안을 함께 겪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도 초등학생 때였다. 그 시기에는 거의 매일 밤 울면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을 사람들과 나누고 위로받는 법보다 는 감추고 없는 듯이 행동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어두운 감정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고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쉽게 지겨워했다. 무엇보다 웃지 않는 여성, 화내는 여성은 덜 매력적인 존재로 여겼다.
밝고 활기차며 곁에 있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회적 자아와 집에 돌아와 홀로 편안하게 우울해하고 불안에 떠는 내적 자아를 동시에 지닌 채 오랫동안 지내왔고, 지금도 대체로 그러고 있다. 이 태도를 버리기가 쉽지 않다.
여성 우울증을 탐구하기 시작하며 만난 20~30대 여성들도 나와 비슷했다. 이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괜찮은 척의 달인들이다. 자신의 우울을 말하기 위해 만난 인터뷰 자리에서도 친밀하고 다정한 사회성을 잘 유지한다. 그것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럴 때마다 느낀다. 여자들은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존재로 자란다는 것을. 우울증을 취재하기 위해 만난 많은 여성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우울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분노였어요.” 한 정신의학과 전문의 선생님은 내게 “분노가 바깥을 향하지 못하고 내면을 향하게 될 때 그것이 우울이 된다”고 말했다. 또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보다 분노를 표출하기 어렵게끔 양육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화내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그러나 감정이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막고 싶다고 해서 막아지지 않는다. 우울이나 분노를 느끼는데 그것을 자꾸 감추고 억압하게 되면 어느 날 어디선가 이상 신호가 오기 마련이다.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도록 이런 감정은 속에서 펑 터져버린다. 몸에서 먼저 신호가 오기도 한다. 극심한 편두통, 원인을 알 수 없는 섬유근육통, 일상을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의 생리통, 입을 벌릴 수 없을 정도의 턱관절 장애, 밤에 찾아오는 간지럼증, 삶의 기쁨을 앗아가는 소화 장애, 귀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나는 이명, 손떨림, 호흡곤란, 불면, 과다 수면, 급격한 체중 감소나 증가 등. 인터뷰이 모두가 우울이나 불안 같은 정신 질환뿐 아니라 신체 증상을 함께 겪었다.
최근 젊은 여성의 우울과 자살이 증가했다고들 말하지만, 이것은 ‘최근’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문제가 이제야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뿐이다. 젊은 여성의 우울이 이들만의 문제인 것도 아니다.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극심한 우울을 겪고 있을 때는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도 문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엄마 말이다. 젊은 여성의 우울을 들여다볼수록 이것이 세대를 지속하며 쌓여온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20~30대 여성의 우울을 쓰면서 원한 것은 “이들의 고통을 보아달라”라기보다는 “이들의 눈을 통해 보아달라”에 가깝다. 이들은 아픈 여자이기도 하지만, 열심히 성찰하며 고통을 들여다보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목격자니까.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 사회가 외면해온 고통과 애도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
세상은 고통을 선별적으로 인식한다. 어떤 고통은 더 아파하고, 어떤 고통은 덜 아파한다. 어떤 고통에는 더 공감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떤 고통에는 덜 공감하고 이것을 푸는 건 개인 차원의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고통을 더 중요하게 다루는가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누구의 목소리에 더 힘을 실어주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알아주지 않는 고통, 홀로 고립되어 싸워야 하는 고통은 고통을 더 심화시키며 종국에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정신의학 교과서에서는 신체화 장애(정신적 문제가 신체적으로 나타나는 장애)를 소개하며, 이 장애의 환자군에는 여성, 교육받지 못한 계층, 가난한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괴오똑>은 말하자면 지금껏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서 쓴 책이다. 그리고 그들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나 역시 내가 지닌 고통의 편을 스스로 들어주기 위해서 쓴 책이다. 신경정신과에서도, 상담 센터에서도, 가족에게도, 애인에게서도, 직장에서도, 또 광장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던 여성들을 위해서 말이다. <미괴오똑>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마무리한다.
인터뷰이들은 아픈 상태에서도 수천 번 자기 경험을 곱씹고 재해석하며 성장했다. 이들은 가정 폭력 혹은 성폭력의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피해를 고발하고 뭔가를 바꿔보려 한 생존자이다. 이들은 스스로 이상을 감지하고 제 발로 병원을 찾아간다. 이들은 돌봄이 필요하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돌봄을 제공해왔다. 이들은 도움받는 위치에만 머무는 것을 불편해한다. 이들은 온전히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 의사와 상담사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해석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말이다. 이야기에는 모순과 혼란이 있다. 진공 속 피해자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나였지만, 끝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내가 만난 여자들을 우울증, 불안 장애, 경계성 성격 장애 같은 딱지를 붙여 구분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옹호자이고 싶다. 자기 삶의 저자인 여자는 웬만큼 다 미쳐 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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