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지각변동을 이끄는 24인 Part 2
변화의 색깔은 늘 파랗다. 시대의 지각변동을 이끄는 24인을 소개한다. 언덕을 넘어 바람이 불어온다.
인스타그래머블 예술, 장경린
디저트 내 작품의 키워드는 디저트 이미지, 간접적 자화상, 시각적 ASMR, 색상의 미감 차트, 다양한 감각의 시각화, 물성 연구다. 출발은 디저트 이미지. 2019년 런던 골드스미스대학 파인아트학과를 졸업했는데, 재학 중 한국에서 먹을 ‘먹킷 디저트 리스트’를 소셜 미디어에서 살피곤 했다. 소셜 미디어의 이미지는 색상, 형태, 질감으로 미감을 자극한다. 그중 윤기가 자르르 나는 디저트가 눈길을 끌었다. 디저트 이미지에서 텍스처나 컬러의 대조를 가져와 입체적인 작품으로 구현했다.
간접적 자화상 디저트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초기작에서 나를 더 이입했다. 그날 입은 옷, 기억에 남는 물건의 색을 참고한 미감 차트를 구성했고, 이를 작품에 반영했다.
시각적 ASMR 관람자는 내 작업을 공감각적으로 음미하곤 한다. 작품에서 맛이나 향기, 촉감, 질감 등이 느껴지는 것이다. 또 관객은 ‘예쁘다’로 시작해, 디저트 취향을 공유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관람 후 케이크를 먹으러 갔다는 관객도 있다. 이처럼 작품을 두고 관객의 대화가 흐르는 광경이 좋다. 내 작품이 심각하거나 어렵게 느껴지지 않고, 많은 이에게 편안함과 행복을 주길 바란다.
인스타그래머블 “인스타그래머블한 작품”이란 평을 듣곤 한다. 내 작품이 인스타그램의 디저트 이미지에서 시작됐고, 관객은 내 작품을 사진 찍어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한다. 온라인 이미지에서 영향받은 작업을 내가 현실 세계에서 재구성해 보여주고, 다시금 온라인 플랫폼에 돌아가는 소통 방식이 흥미롭다. 앞으로도 지속되길 바란다.
바닐라 디저트 중에도 바닐라 맛에 관심이 간다. 너무 기본적인 맛이라 지루하다지만, 디저트에서 중요한 요소다. 바닐라의 맛과 색감이 차기작의 일부가 될 것 같다.
협업 케이크 전문 브랜드 ‘케이키’와 함께한 <CAKEY, A Cake is a Key!>가 기억에 남는다. 내 작품을 먹으면 무슨 맛일까 늘 궁금했는데 어느 정도 현실화된 프로젝트다. 관객이 전시 관람뿐 아니라 내 작품을 본뜬 디저트를 직접 만들어 시식했다. 얼터사이드에서 지강 작가와 함께 연 2인전 <The Taste of Violet>도 추억이다. 둘 다 색을 다루는 작업을 해왔고 삶의 방식도 비슷해 전시에서 시너지가 일었다. 앞으로도 다수의 작가와 함께하는 2인전을 기대한다. 궁극적으로는 내가 여러 도움을 받았듯 젊은 작가에게 도움을 주고 계속 소통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
비상한 연출, 설유진
32세의 희곡 내가 뭘 잘하고, 뭘 잘할까 고민하며 주어진 일을 해왔다. 필름 프로덕션 아르바이트생 시절, 하루 종일 사포질을 하다 몰래 들어선 세트장에서 실제가 아닌 허구를 그럴듯하게 만드는 장면을 목격했다. 후에 신생 기획사에서 조연출, 기획, 무대감독으로 연극과 뮤지컬 작업을 했다. 당시 지방 공연을 돌며 희곡 <씨름>을 썼다. 32세인 2014년 서울연극제 희곡 공모전 ‘희곡아 솟아라!’에서 <씨름>이 당선돼 극작가로 데뷔했다. 같은 해에 극단 ‘907’을 창단했고, 2016년 연극 <초인종>의 극작 및 연출을 하며 연출가가 됐다. <초인종>은 ‘ARKO가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 시리즈’ 연극 부문 선정작이다. 이후 <9월>, <나의 사랑하는 너>, <너에게>,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 <어슬렁>, <제4의 벽>, <미국연극/서울합창>, <홍평국전> 등을 선보였다.
비전형성 연극 우리 공연이 전형적 연극의 재현성에서 벗어나면서도 드라마가 분명하다고 한다. 키워드를 꼽자면 ‘시간, 공간, 사람의 주체성과 현존성 그리고 자유와 사랑’.
홍평국전 2021년에 올린 <홍평국전>이 월간 <한국연극>의 ‘2021 공연 베스트 7’으로 선정됐다. 조선 후기 영웅소설인 <홍계월전>이 원작이지만, 천상의 힘과 위정자의 인정으로 승승장구하는 영웅 서사는 나를 일으키지 못했다. 그런 힘과 인정 없이도 별 볼 일 없다고 여기는 이가 영웅이 되길 바랐다. 시스템이 학습시킨 공후작록과 해피 엔딩에 질문하는 사람, 반성하고 다시 살아보는 사람이 영웅이 되고, 그 수가 늘어나면 전보다 살 만하지 않을까. 이를 바탕으로 공연 대본을 바꿨고 교회였던 공간을 무대로 삼아 자연광을 비추고, 배우는 펄펄 날게 하고, 관객은 중앙에 마련된 객석의 360도 돌아가는 의자에 앉아 작품에 동참, 동화하도록 했다.
공간의 확장 대본 작업 때부터 작품이 올라가는 공간의 고유성(소리, 빛, 색깔, 모양, 벽이 접히는 지점, 다양한 시각선, 객석, 단차, 좌석 간격)을 공부한다. 보통 극장에 무대를 세우고 암전으로 전환하고 배경을 바꾸지만 난 그래본 적 없다. 어느새 타인은 그게 내 스타일이라 했다. 기차 장면에서 기차 모형이 등장하는 식의 사실적 재현의 한계를 넘고 싶어서, 관객이 서사를 바탕으로 이뤄내는 상상을 시청각적으로 제한하고 싶지 않아서다. 관객이 스스로 공연의 점을 이어 깊이 사유하길 바란다.
2021 두산연강예술상 이 상을 받기 전에도 내가 원하는 연극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 공연은 매회 매진이지만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돈은 못 벌 것이다. 나는 이미 꿈을 이뤘다. 더 이루고 싶은 바는 딱히 없고, 주어진 작업을 충실히, 계속해서 정성껏 하고 싶다.
함께하는 카메라, 황예지
유기체 사진가 ‘가족사진이나 초상 사진을 주로 작업하며 위로를 전하는 사진가’라는 얘기를 듣곤 한다. 사진집 <Season(절기)>를 비롯해 초기작의 대상이 가족이니 당연하다. (<Season(절기)>는 부재한 엄마를 대신해온 언니와 10년 만에 돌아온 엄마의 모습을 담고 있다.) 나에겐 가깝지만 사소한 주제였는데 이걸 매개로 연락 오는 사람들이 생겼고 연결되는 일이 많아졌다. 개인 서사가 사람들이 공유하는 뭔가가 된 것 같다. 가족뿐 아니라 내가 품을 단어는 언제든 바뀔 것이다. 나는 유기체다. 하나로 명명되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때 하는 사람이고 싶다.
감정, 사진, 젠더 요즘 이런 단어가 주된 과제처럼 느껴진다. 감정이 어떻게 흐르고, 사진 이미지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관심이 많다. 내가 사진을 하는 여성이기도 해 이들을 연결해 사고하고 싶다.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 암 투병하는 친구를 돕고자 시, 소설, 에세이, 만화 등 창작자 30여 명이 메일로 작품을 전송하던 프로젝트다. 작가당 한 달에 한 편씩, 6개월간 총 6회 연재했다. 나는 작업의 원천이자 아픔인 가족 서사를 에세이로 썼다. 메일을 읽은 이들이 출근길에 울었다, 공감한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한 출판사가 책으로 확장하길 바랐고 가족과 슬픔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공유하는 산문집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을 펴냈다. 책을 마무리하면서 다음 작업을 할 수 있는 자신감과 체력이 생겼다. 이 산문집이나 <Season(절기)> 모두 나의 필요에 의해 이뤄진 작업처럼 여겨진다.
다매체 블랙코미디 사진, 죽음, 젠더를 소재로 블랙코미디를 만들어보고 싶다. 관련 시나리오를 쓰고 사진과 영상 촬영을 함께 하는, 단편영화+사진+픽션 에세이 프로젝트다.
꾸준한 걸음 효능감과 효용성에 빠져 결과에 집착하기보다 꾸준함으로 연구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지킬 수 있길. 기존 사고방식을 계속 업데이트하며 유연하길. 재치 있고 농담 잘하는 사람이길.
전자음악의 감정, 라디오피어
패션에서 음악으로 런던에서 패션을 공부할 때 런던과 베를린 등의 클럽 문화를 접하고 매료되었다. 현지에서도 디제잉하다 4년 전쯤 귀국해 더 아키텍츠 레코드(The Architects Records, 서울 언더그라운드 신의 전자음악 기반 레이블) 소속 멤버로 컴필레이션 앨범 <HYPER ROMANCE Vol. 1>에 첫 프로듀싱한 곡 ‘Robotic 4000’을 선보이며 디제이뿐 아니라 프로듀서로 활동 중이다.
두려움과 창의성 라디오피어(Radiofear)란 이름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라디오는 여러 사람의 대화가 오가는 대중매체다. 그런 것들을 피하고 무서워했다. 사실 붐비는 클럽에서의 디제잉이 쉽지 않을 때도 많다. 혼자 작업실에서 창조하는 과정이 더 편하다. 또 라디오피어는 대중성보다는 나만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은 의미도 있다.
이모셔널 일렉트로니카 흔히 전자음악은 보컬이 없다 보니 지루하거나 무엇을 느낄지 경직된다는 반응이 있다. 나는 이모셔널 일렉트로니카(Emotional Electronica), 즉 사운드에서 ‘감정이 드러나는 음악’을 하고 싶다.
데이터스페이스 데뷔 EP <Dataspace>는 스토리텔링이 있다. ‘Data’와 ‘Space’를 합친 데이터 공간이란 음반명에서 지향점이 드러난다. 전자음악은 음률 이전에 소리를 다루는 작업에 가깝고, 그 소리를 대하는 절차는 연주와 별개로 데이터를 취급하는 일과 흡사하다. 신시사이저 프리셋을 눌러보든 파라미터 간의 상호 관계를 따져가며 소리를 다듬든 수집과 관찰의 절차를 거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벌이는 가상 공간을 가정했다. 그곳에서 나는 도시를 항해하는 외계 기체의 기장이며, 그 기체에는 수많은 데이터가 탑재된다. 수록된 네 곡은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시간의 음악적 재현이다. 첫 트랙 ‘Ice’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공간을 지나며, 두 번째 트랙 ‘Dataspace’에서 데이터를 나열하고, 이어서 ‘Vortex’의 소용돌이를 마주하다가 마지막 트랙 ‘Levitation’으로 공중에서 유유히 사라진다.
종합예술 앨범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관련 전시를 기획했다. 이번 앨범은 어두운 우주 공간에 비치는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이다. 전시도 화이트 큐브 같은 공간에서 열었다. 해가 지면 그곳만 홀로 존재하는 듯하다. 전시장에는 한정 발매된 카세트테이프 버전 100개가 노이즈와 함께 흐르고, 데이터스페이스 기체를 형상화한 세라믹 작품과 관련 의상이 함께 자리한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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