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지각변동을 이끄는 24인 Part 5
변화의 색깔은 늘 파랗다. 시대의 지각변동을 이끄는 24인을 소개한다. 언덕을 넘어 바람이 불어온다.
실험적 소설가, 서이제
(그)곳에서 스도쿠 형식으로 쓴 소설인데 스도쿠는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것 같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는 패턴이 보인다. 이 소설을 쓰며 파편적으로 쪼개놓되 나름의 다른 체계가 있는 소설이 나의 말하기 방식과 맞는다는 것을 느꼈다. 들인 시간도 길고 쓰는 방향성을 찾은 작품이라 애정이 크다. <두개골의 안과 밖>은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면서 쓴 살처분 관련 소설이다. 화자가 수십 명이 나오는데 형식에 관한 고민이 컸다. 많은 고민과 질문을 남겼기에 역시 의미가 크다.
영향을 받은 인물 정지돈, 한유주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한국 문학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이 깨졌다. 디지털 영화를 보다가 필름 영화를 본 경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요나스 메카스의 전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늘 표현하고 싶었던 시간성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1인칭 서술 영화를 전공했는데 영화는 카메라 시선으로 걸러져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면, 소설은 1인칭 서술로 내밀한 언어를 다룰 수 있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한편 내가 쓰는 문장이 영화 몽타주 편집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실제로 쓸 때는 음악에서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하지만 영화 편집도 음악의 서사에서 영향을 받았고 리듬 몽타주가 있으므로 결국 모두 이어진 게 아닐까 한다.
동시대 예술이 준 영감 이제 독서를 한다는 건 책만 읽기보다 스마트폰을 같이 사용하면서 읽는 것이다. 읽다가 음악을 찾아서 들을 수 있고 영화도 틀 수 있다. 소설 속에 동시대 예술이 들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으면 한다. 국가가 나뉘어 있고 사회제도에 묶여 있긴 하지만 예술은 그를 뛰어넘는 공동체다. <0%를 향하여>에 할머니를 등장시킨 이유도 영화를 좋아하면 연령을 뛰어넘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느낌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물성의 확장 <임시 스케치 선>에 QR 코드를 담았고 찍고 들어가면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연결된다. 인스타그램을 넣은 건 하나의 연극의 장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자기 연출된 모습이고 자기 일상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건데 소설 속 인물에게도 그런 서사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실존 인물이나 실화인지 여부를 고민하게 만들고 싶기도 했다.
지양하는 것 소설에서 성별과 외적 묘사를 넣지 않으려고 한다.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고민하다가 말하기 방식이 이 사람을 표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소설 전공이 아니라서 아무것도 모르고 저렇게 쓴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이렇게 쓰는 게 재미있고 여러 편 발표하다 보니 독자의 반응이 다양했다. ‘문학은 무엇이다’라고 고정해놓기보다 문학이 뭘까 고민하게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현상을 만들어가고 싶다.
사라진 술을 복원, 복술복술
복원하는 술 ‘우리 술 문화를 계승하고 만드는 팀’이다. ‘복’원하는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해서 ‘복술복술’이다. 사장된 술을 고문헌에서 발굴해서 우리의 술 문화를 계승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금의 술 문화를 만들고자 한다.
조리서 영인본 한자를 다 읽고 해석하기 때문에 ‘복원’이라는 말을 붙여서 쓰고 있다. 현재 제일 오래된 조리서가 1450년에 편찬된 것이니 나라의 굴곡을 거치면서 많은 술이 사라졌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주세가 생기면서 집집마다 빚던 술이 사라지고 국가에서 관리하는 하나의 레시피만 남았다. 당시 술 문화를 이해하고 술에 담긴 가치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문헌을 따라 술을 빚고 시음회를 통해 그 맛을 알리고 있다. 사라져가는 무형문화재도 공부하고 있는데, 올해는 해방촌에 술과 음식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열 예정이다.
가양주 지난해에 공주시와 함께 집집마다 담그는 술 ‘가양주’를 복원했다. 가양주를 빚는 할머님들을 찾아뵀는데 술을 통제했던 과거 때문에 술 빚기는 몰래 해야 하는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자식에게 전수하지 않았고 잊혔다. 그런 부분이 안타까워서 더 발굴하고 더 기록해두고자 한다. 시음회를 하며 느끼는 건 어떤 술이 절대적으로 맛있다기보다 모두 입맛이 다르다는 것이다. 가양주가 내려온 이유도 각자의 입맛대로 술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화주 지금까지 50~60가지 술을 만들었는데 각자 멤버가 빚은 술까지 합치면 100가지가 넘는다. 이화주의 경우 공방에서 돌아가며 사흘 밤을 새워서 누룩을 띄워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술에 샤인머스캣과 블랙사파이어를 넣고 홍시로 맛을 냈는데 맛이 좋았다.
재해석 ‘이화주’는 ‘이화곡’이라는 누룩을 써야 한다. 하지만 이화곡을 만들 때 용수를 어떻게 쓰라는 내용은 문헌에 없다. 우리는 그런 부분에 범용성을 발휘해서 홍시즙을 활용하는 식으로 재해석한다. 술의 가치는 문헌 속에 있고 그 외의 것들을 현대인에게 익숙한 재료를 활용해서 만든다.
술 빚기 어떤 술은 하루 만에 완성되고 어떤 술은 1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구하기 힘든 재료도 많은데 재료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간다. 출장 가서도 길 가다가도 풀을 채집하고, 계절마다 꽃 따러 지방에 간다. ‘누룩 띄우는 데 필요한 풀이 인왕산에 있대!’ 누군가 소식을 전하면 다 같이 마대 자루 들고 간다.
온고지신 우리가 하는 일이 과거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치기도 하는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토대를 단단히 만들고 있을 뿐이다. 더 잘 알아야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고 새로운 것도 탄생시킬 수 있다. 현대에서 즐기는 전통주 문화를 만들기 위해 잘 엮어가고 싶다.
대범하고 새로운 움직임, 이서영
스턴트우먼 배우의 대역을 맡는다. 주로 배우의 뒷모습 그리고 ‘풀 샷’이다. 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라면 경주하는 차도, 그 사이의 일반 차도 우리가 맡는다. 좀비나 괴물 역할의 경우, 뛰다가 넘어지거나 총을 맞아야 할 때는 우리가 한다. 위험하다 싶으면 스턴트맨이 한다고 보면 된다. 그뿐 아니라 지문에 ‘주인공 둘이 엎치락뒤치락 싸운다’고 적혀 있다면 이 한 문장을 갖고 무술 감독님과 시퀀스를 만드는 일 역시 우리의 몫이다. 흔하지 않고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새로운 동작으로 짜려고 한다. 지금까지 <유령> 박소담, <경이로운 소문> 김세정, <백두산> 수지, <지옥> 김현주, 원진아 배우 등의 스턴트를 맡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막내 시절, 영화 <VIP>의 요트에서 넓은 바다로 뛰어드는 액션이었다. 겁이 났지만 “액션!” 하자 ‘에라 모르겠다, 해보자’ 하고 뛰어들었다. 바로 “컷!” 소리가 났고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며 “진짜 멋있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닷속에서 그 상황을 보는데 마냥 신기했고 희열감이 찾아왔다.
스턴트우먼의 매력 원래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데 스턴트우먼은 하는 일이 아주 다양하고 할 때마다 새롭다. 어느 날은 그냥 맞고 끝나면, 어느 날은 미끄러져서 넘어지고, 어느 날은 떨어져서 넘어진다. 맡은 캐릭터마다 성향이 다 다르고 움직임도 달라서 지루할 틈이 없다.
다채로워진 여성 캐릭터 극 중 싸움은 남자 배우 위주로 돌아갔고 여자는 머리채를 잡고 싸우거나 정적으로 총을 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힘캐’뿐 아니라 약삭빠르게 움직이는 여자 캐릭터까지 다양해졌다. 예전에는 여자 대역마저도 남자 스턴트맨이 맡기도 했으나 지금은 여자 배우의 대역은 무조건 여자가 맡는 분위기다.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스턴트우먼이 설 자리가 늘었다.
대범함 스턴트 일을 시작하고 MBTI가 바뀌었다. 내향적이었는데 기강이 있는 곳이다 보니 말이 세지고 멘탈도 강해졌다. 높은 곳도 무서워하는 겁쟁이였는데 지금은 눈물도 잘 흘리지 않는다. 안 해본 게 많으면 무서운 법인데, 이젠 경험이 많다 보니 남들보다 자신감이 있다.
꿈 무술 감독님이 찾는 건 당연하고 연출 감독님이나 배우들이 ‘이서영 아니면 안 해’라고 늘 찾아주는 스턴트우먼이고 싶다. 이 꿈을 이루고 나면 다음엔 어떤 꿈을 꿀지 모르겠다.
최고난도 액션 와이어 없이 맨몸으로 떨어지는 모션 캡처를 찍은 적 있다. 사다리차를 타고 4~5층까지 올라가서 에어 매트로 떨어졌다. 사실 이 일은 하면 할수록 무서움이 커진다. 다치는 상황을 많이 보고 겪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장면을 찍을 때마다 그 직전까지 너무 무섭지만 “레디!”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신기하게도 무서운 마음이 싹 사라진다.
감각의 공감을 일으키는 디지털 페인터, 람한
디지털 페인터 디지털 작업이지만 회화의 영역에 들어간다고 본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시작했지만 디지털 캔버스를 켜놓고 작업에 집중할수록 디지털 툴에도 회화 요소가 작동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내 작업을 디지털 회화로 바라보기 때문에 개인 작업을 디지털 페인팅이라고 명명한다.
영감 표현하려는 방향이 비현실적 차원이다 보니 인풋은 매우 현실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리는 과정에서 상상력이 추가되고 재질적인 부분이나 장난스러운 연출, 판타지를 가미한다. 예전에는 감정 자체에 집중했는데 이제는 어떤 감정 상태에 빠져 있는 나 혹은 나를 대변하는 캐릭터를 상상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이 감각으로도 옮겨갔다. 관심이 전환된 이유로는 미디어의 영향도 있다. 휴대폰으로 보는 것 자체가 일상적 자극이고 휴대폰을 통해 여러 감각적 인풋을 많이 받는다. 몇 년에 걸쳐서 미디어 자체가 감각을 전달하는 차원이 더 깊어졌고 나 역시 거기 반응하는 것이다.
초현실적 나에겐 초현실적으로 표현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차원이 있다. ‘Souvenir04_F’의 경우 친구랑 비행기 추락 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시작했다. 비행공포증이 살짝 있는데 그 공포와 애니메이션의 비행 물체, 세상이 멸망하는 시나리오 판타지 같은 걸 결합하면서 그린 작품이다. 가상에 대한 이야기지만 현실에서 느낀 감각에서 시작해 생각을 발전시킨다.
유령팔 2018년 초 <유령팔> 전시에서 선보인 라이트 패널 작품이 회화적인 연구를 하면서 작가로 계속 활동하고 싶은 계기가 돼 의미가 크다. 새로운 형태의 창작을 하는 사람으로 봐준 전시였고, 새로운 스테이지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VR과 메타버스 단어 자체에 정복당한 거 같아서 싫지만 자연스럽게 관심이 간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그동안 내가 느낀 답답함에 부응하는 느낌도 든다. 현실 차원의 물성을 가진 작업을 내 작업이라 생각하기보다 파일 상태로 완성된 디지털 파일 상태를 원본이라 여겨왔기 때문에 내가 상상하는 세상이 어쩌면 도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된다. 앞으로 하게 될 프로젝트 중 많은 부분이 아예 가상에서 시작해 가상으로 끝나는 형태거나 온라인에서 열리는 전시가 될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학교에서 맨 뒷자리에 앉아 고개 푹 숙이고 연습장에 뭔가를 끼적거리는, 반에 꼭 한 명 있는 애가 나였다. 그림은 ‘매일매일’이고 작업 자체가 행복이다. 처음 보는 그림이라도 ‘이 감각은 익숙하다’고 느끼거나 혹은 구체적인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을 하고 싶다. 감각적 차원에서 공감 말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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