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 한국의 트레킹
지금은 걸을 때. 자고 일어나면 길이 생긴다. 국내 트레킹 코스만 2,000여 개다.
1월 19일, 강원도 원주의 섬강 자작나무숲 둘레길이 개통했다. 섬강을 따라 걷다 자작나무 군락을 만나는 4.5km 코스다. 평일에도 배낭을 메고 이곳을 찾은 무리가 꽤 있었다. 원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탄 택시도 헤맨 이곳을 벌써 어떻게 알았을까.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에 따르면 대한민국 인구 절반이 트레킹을 한다. 등산 인구는 3년 전보다 8.5% 감소했지만 트레커는 9.3% 증가했으니, 야외 활동 유행이 바뀌고 있다고도 한다. 제주올레도 2021년 완보자가 4,014명으로 2년 전보다 세 배 증가했다.
이들이 트레킹을 하는 이유는 첫째가 건강이지만, 나머지는 좋은 경치를 보려고, 그냥 걷는 게 좋아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다. 답변에서 보듯 트레킹은 목적지 도착이 아니라 걷는 과정에 의미를 둔다. 사회학 교수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은 “걷기는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다”로 시작한다. 자동차는 우릴 단번에 멀리 데려가지만 수동적으로 만든다. 걸어야 생각과 감각이 살아난다.
자작나무숲 둘레길은 섬강의 졸졸 흐르는 물소리부터 들린다. 사람에 놀란 새들이 푸드덕하는 소리, 바람에 나뭇잎끼리 부딪치는 소리까지 선명하다. 트레킹은 침묵으로의 여행이다. 현대는 소란스럽다. 계속 울리는 카톡, 지하철 옆자리의 통화, 카페 안의 웅성거림과 멜론 톱 100 가요. 여기서 벗어나 침묵으로 가려고 트레킹을 떠난다. 지친 나는 물, 바람, 새 같은 ‘침묵의 소리’를 들으며 기운을 차린다. 시야는 섬강, 자작나무 등 풍경을 통과할수록 안경 도수를 새로 맞춘 듯 맑아진다. 둘레길 바닥은 흙, 나무 데크, 코코넛 열매껍질로 만든 푹신한 매트가 교차한다. 밑창이 두꺼운 트레킹화라도 바닥 질감이 느껴진다. 트레킹은 소리, 풍경뿐 아니라 감촉도 달라진다.
<월든>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저서 <일기(Journal)>(1837-1861)에서 혼자 걸어야 이를 더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혼자 트레킹을 하는 사람은 30%로 2008년 이후 계속 증가했다. 물론 동행과 떠나도 좋다. ‘길 카페’에선 가만히 앉아서는 나오기 힘든 대화가 오간다.
트레킹은 시간 부자로도 만들어준다. 자동차를 타면 시간 단위로 계산하지만, 걸으면 1년, 수십 년 후를 생각한다. 좋아하는 풍경에 머물고, 옆길로 빠져 마을을 구경할 수 있다. 벤치에 앉아 졸아도 된다. 서두를 때는 해 지기 직전 혹은 배고플 때뿐이다. 내 시간은 늘 남의 것이었는데, 비로소 주인이 된다.
한국은 지금 없던 길도 생기고, 있던 길도 새 이름을 얻는 중이다. 한국관광공사의 걷기·자전거 여행 정보 사이트 ‘두루누비’에 등록된 트레킹 코스는 2,188개다. 최근 슈퍼스타는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길이다. 지난해 11월 19일에 개통한 뒤로 주말에는 7,000~8,000명이 찾는다. 봄이 와 암석 사이로 진달래가 피면 더 붐빌 거다. 코스는 3.6km에 불과하지만 고소공포증 환자라면 익스트림 스포츠에 가깝다. 지상에서 30m가량의 절벽에 다리를 매달아 길을 냈다. 어떻게 설치했을까 싶을 정도인데, 235억원을 들여 꼬박 4년이 걸렸다. <클리프행어>가 떠오르는 출렁다리 13개, 밑이 훤히 보이는 유리 바닥의 전망대도 있다. 협곡 사이에 붕 떠 있는 기분이 시원하다가도 발을 헛디딜까 예측 가능한 일상에선 쓰지 않는 감각이 곤두선다. 여긴 한번 들어서면 중도 포기할 수 없어 왔던 길을 돌아가지 않는 이상, 도착 지점인 순담계곡 매표소까지 가야 한다. 주상절리길이 끝나면 한탄강에 띄운 부표를 따라 고석정까지 걸을 수 있다. 절벽에 매달려 걷다가 이번엔 물 위를 걷는 여자가 됐다. 워낙 절경이라 드라마, 영화 촬영이 잦다. <미스터 션샤인>에선 단골로 나온다. 두 길 각각 입장료 1만원으로, 이 중 절반은 철원사랑상품권으로 돌려준다. 요즘 캠퍼, 차박 여행자 중 경치만 보고 지역 상생을 위한 소비 없이 쓰레기만 남기는 이들이 문제가 됐는데, 최소한의 방지책이다.
트레킹계 뉴스 중 하나는 서해랑길이다. 그 이름처럼 땅끝 해남에서 인천 강화까지 서해를 따라 걷는 길이다. 오는 3월 최종 연결된다. 그중 태안해변길 5·6코스를 걸은 적 있다. 계속 바다를 끼고 걷고 싶다면 강력 추천한다. 해변을 걷다 코스의 종착점인 꽃지해변에서 노을을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서해랑길은 기존의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해파랑길, 남해안의 남파랑길과 이어진다. 2010년 해파랑길이 가장 먼저 생겼는데, 자전거와 도보 이용자가 늘면서 연타로 개발됐다. 2023년에 강화에서 고성까지 가는 DMZ 평화의 길까지 개통하면, 남한의 외곽을 잇는 트레일이 완성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를 ‘코리아 둘레길’이라 부르며 홍보 중이다. 총 4,544km, 285개 코스다. 실화 기반 영화 <와일드>에서 리즈 위더스푼이 발톱이 빠지며 횡단한 미국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4,286km)보다 길다.
문화체육관광부 같은 정부 기관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민간단체 등도 열심히 길을 낸다. 2,000개가 넘을 수밖에. 힐링, 치유, 건강, 여행 트렌드 때문에 늘어난 트레킹 인구를 자기 지역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새로 준비 중인 길만 해도 총 860km의 경기둘레길, 김해 봉하마을에서 낙동강을 거쳐 시가지 외곽을 도는 가야왕도 순례길, 청주 우암산 둘레길, 홍천군 생곡저수지 둘레길, 김천 부항댐 둘레길, 전남 해남군 금강산 둘레길 등이다. 1월에 영주의 소수서원에 갔는데, 본디 있던 자리에 소수서원 둘레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문화재청이 9개 서원에 둘레길 조성 사업을 벌인 것으로, 안동의 병산서원 둘레길도 3월까지 조성한다.
가장 기대되는 길은 운탄고도1330이다. 초기 지리산둘레길이 수행의 의미였듯, 이 길도 선의가 있다. 강원도 폐광 지역인 영월, 정선, 태백, 삼척을 잇는 173km 트레일이다. 다 걸으려면 8~10일 걸린다. 운탄은 ‘석탄을 나르던 옛길(運炭古道)’이란 뜻과 함께 ‘구름이 양탄자처럼 펼쳐진 고원의 길(雲坦高道)’도 의미한다. 1330은 운탄고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만항재의 해발고도다. 현재 일부만 완성됐고 내년 9월에 하나로 이어진다. 특히 3코스는 옥동광업소 등 탄광의 흔적을 따라가는 ‘광부의 길’이다. 이미 개방된 자리는 백패커들의 야영지로 유명하며, 겨울엔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코스도 있다.
사라지는 길도 많다. 이전에 분명 있었는데 요즘 두루누비에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다. 예산 문제로 지자체 관리가 소홀하고, 이정표나 휴게 시설이 미흡해 오는 이가 줄면서 버려진다. 트레킹뿐 아니라 주변과 연계해 놀 거리를 찾는 가족 여행객을 잡아끌지 못해도 사장되기 쉽다. 원주 섬강 자작나무숲 둘레길이 근처의 치악산 둘레길(지난해 11코스로 열었다)과 소금산 그랜드밸리를 연결해 열심히 홍보하는 이유다. 그러나 레저가 아니라 트레킹만으로 충분한 이들도 늘고 있다. 결국 길 자체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관건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도장 깨기를 하듯 트레킹을 한 적 있다. 한 번 간 길은 가지 않았다. 그런 내게 제주에서 만난 올레꾼이 틱낫한 스님의 책을 선물했다. 지난 1월 22일 열반에 든 틱낫한 스님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 유골을 전 세계 플럼 빌리지(Plum Village) 수도원으로 가져와서 당신의 걷기 명상 길에 흩뿌려달라. 그렇게 하면 내가 매일 당신과 함께 걷기 명상을 할 수 있다.” 플럼 빌리지는 틱낫한이 프랑스 보르도에 세운 명상 공동체로 걷기 명상 길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그는 걷기를 예찬해왔다. 그의 걷기는 단순하지만 어렵다. 지금 여기, 걷는 그 자체에 집중한다. “걱정과 불안, 망상에 한 눈팔지 말고 마음을 호흡과 발밑에 집중하라.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 우리는 걸을 때 어딘가를 향해 걷는다. 집으로, 지하철로, 친구가 기다리는 카페로. 이때 걸음은 목적지를 위한 수단이다. 트레킹에선 ‘한 걸음 다음 한 걸음’으로 충분하다. (VK)
- 일러스트레이터
- 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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