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블란쳇의 기묘한 승리
케이트 블란쳇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신작 <나이트메어 앨리>에서 ‘팜므 파탈 캐릭터’를 완벽하게 새로 쓴다. ‘릴리스’ 역을 맡은 그녀는 원하는 운명을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떠돌이 기회주의자 ‘스탠턴(브래들리 쿠퍼 분)’이 만나는 세 여성 중 한 명이다. 만만치 않은 포스를 지닌 스탠턴이지만 상류사회의 거물들을 상대하는 심리 치료사 릴리스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반지의 제왕>, <토르: 라그나로크>처럼 스케일이 큰 영화뿐 아니라 테렌스 맬릭, 토드 헤인즈,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저예산 독립 영화에도 출연해온 그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캐릭터에 스스로를 기꺼이 내던진다. 비밀에 싸인 팜므 파탈 ‘릴리스’에 대해 케이트 블란쳇이 입을 열었다.
<나이트메어 앨리>에 끌린 이유는 무엇인가?
원작 소설은 모르고 있었지만 타이론 파워, 조안 블론델 주연의 오리지널 영화는 본 적 있다. 평소 서커스 배경의 이야기나 서사, 이미지를 좋아한다. 아웃사이더 미학이나 아웃사이더 스토리에 끌리는 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다. 어떤 배역을 제안했건, 영화가 무슨 내용이건 상관없이 무조건 오케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에 가득한 어둠에도 끌렸다. 이야기의 중심에 반영웅 캐릭터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규칙을 어기고 빠져나가는 사람, 당당하지 못한 성공을 성공한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선언으로 바꾸는 그런 사람. 스탠턴은 스스로 정당화한 목적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릴리스는 그것을 지적하는 캐릭터다. 릴리스는 스탠턴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한다. 나는 그것이 큰 위기 요소라고 생각했다. 표면의 화려한 미학으로 포장된 일종의 그리스 비극. 상당히 명백했다.
스탠턴은 릴리스를 만나기 전에 달콤한 승리의 순간을 맞이한다. 유랑 극단을 떠나는 것이 그의 행복한 결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보통 영화에서 다루는 결점 있는 캐릭터는 선했지만 악하게 변한 사람 혹은 악했지만 선하게 변한 사람이다. 이렇게 스탠턴처럼 공허한 인간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스탠턴에게는 절대적인 도덕적 공백이 자리하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떤 성공으로도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공은 또 다른 시련으로 이어질 뿐이다. 그게 브래들리 쿠퍼가 맡은 캐릭터의 무서운 점인 것 같다. 공허한 인간을 연기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스탠턴은 “나는 거짓말을 한다. 당신도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거짓말한다는 걸 당신이 안다는 걸 알지만 전혀 상관없다”는 식이다. 정말 비호감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에즈라 그린들이 스스로를 드러낼 때다. 리처드 젠킨스의 연기가 정말이지 놀라웠다. 우리는 갈 데까지 가는 스탠턴을 보면서 당연히 그가 이 영화에서 가장 어두운 캐릭터라고 생각하지만, 에즈라의 속내가 드러나고 그가 어둠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각본이 그 점을 명시하지 않고 암시하기 때문에 더더욱 무섭다.
당신이 파악한 릴리스는 어떤 캐릭터인가?
릴리스는 전형적인 팜므 파탈과 매우 비슷하다. 알 수 없고 모호하고 어두운 비밀이 많지만, 내 생각에 팜므 파탈이라는 수식어는 그냥 특별한 이유 없이 한 남자를 파멸로 이끌려는 사이렌 비슷한 인물을 꾸미는 표현인 것 같다. 기예르모 델 토로와 킴 모건의 각본에는 시대적 반전이 들어 있는데, 릴리스가 상처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스탠턴이 자기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똑바로 마주 보게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녀는 단순히 스탠턴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들어가 지배하려는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 즉 릴리스의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 이유 없는,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다. 그녀는 위선과 숨겨진 어둠을 밖으로 끌어내거나 최소한 불꽃을 향해 이끌기를 원한다.
릴리스가 단순한 팜므 파탈이 아닌 이유는 스탠턴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올바른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만으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인데, 릴리스의 행동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나?
그녀의 승리는 정말 기묘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정말로 배후를 조종하는 사람들은 절대 타도당하지 않으니까. 그 시스템에는 여전히 건재하며 승리할 준비가 된 또 다른 에즈라 그린들이 항상 있을 것이다. 릴리스는 그 시스템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스탠턴은 시스템의 힘을 과소평가한다. 그는 한두 가지 규칙을 어기면서 빠져나가는 식이지만 똑똑한 그녀는 시스템을 절대 부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게 그녀를 냉소주의자 혹은 현실주의자로 만들까? 모르겠다. 어쨌든 릴리스는 스탠턴과 달리 시스템을 다루는 법을 알지만 그 점이 그렇게 카타르시스를 주진 않았다. 솔직히 강한 밀실 공포증이 느껴졌다. 3차원 로르샤흐 검사처럼 느껴지는 릴리스의 사무실 세트에서만 촬영했으니까. 거기서 촬영한 몇 주 동안 일종의 심리적 범죄 같은 것에 빠진 느낌이었다. 전부 아르데코 스타일이라 벽 속에 시체가 묻혀 있는 것 같았다. 반면 브래들리 쿠퍼와 같이 연기하는 건 정말 좋았다. 내 촬영 분량은 전부 그와 같이 나오는데, 이번에 처음 작품을 같이 했다. 릴리스는 이 이야기에서 어둠을 차지하는 캐릭터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릴리스 캐릭터를 무척 아껴서 작업하는 내내 분위기가 유쾌하고 좋았다. 델 토로 감독이 그냥 방향만 던지고 촬영이 자유롭게 흘러가는 느낌이어서 꼭 무성영화를 찍는 것 같기도 했다. 릴리스의 사무실 세트는 답답하고 숨 막히는 느낌 그 자체지만 촬영장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정말 아주 즐겁게 촬영했다.
영화에서 릴리스가 가슴의 흉터를 보여주는데 어떻게 생긴 건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혹시 궁금하진 않았나?
델 토로 감독은 배경 이야기를 좋아한다. 캐릭터의 비밀이 암시되긴 하지만 다른 캐릭터들은 미처 모를 수도 있는 그런 것을 좋아한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분명하게 명시되지는 않은 것 말이다. 그는 캐릭터들과 직접적이고 매우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모든 캐릭터,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에게도 개별적인 관심을 쏟는다. 당신이 언급한 그 장면의 대화는 참 독특하다. 영화는 어떤 캐릭터의 시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는 델 토로 감독과 릴리스의 배경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각본을 보고 그녀가 흉터를 드러내는 장면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나는 ‘좋긴 한데 과연 저러는 이유가 뭘까?’라고 생각했다. 심리적인 무언가를 드러내는 행동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슴을 보여주는 행위가 상대를 자극하는 것 말고 대체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기인’의 개념에 대해, 릴리스의 흉터가 에즈라 그린들이 속한 세계의 어둠을 암시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델 토로 감독은 릴리스에게 그런 흉터가 있고 그것이 그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상당히 열성적이었다. 이 모든 게 델 토로 감독과 나눈 대화에서 나왔다. 그는 영화의 모든 요소를 전부 다 꼼꼼하게 고려한다.
이 영화는 코로나로 전 세계가 봉쇄되기 전에 촬영이 끝났다. 거의 18개월 후에 마침내 영화를 본 기분이 남달랐을 듯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지난 18개월을 생각하면 마치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은 것처럼 일분일초가 생생하다. 그래도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도 많다. 어쨌든 영화 촬영을 마친 후 개봉까지 이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매우 이상한 경험이었지만 바로 어제 일처럼 모든 게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촬영이 끝나고 개봉을 기다리는 동안 델 토로 감독과 <피노키오> 작업을 조금씩 하느라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 <나이트메어 앨리> 후반 작업은 전부 원격으로 진행해야 했기에 당연히 무척 복잡했다. 뉴욕 시사회에 가지 못해 아쉬웠지만 베를린에서 토드 필드 감독의 작품을 촬영하던 중 그곳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절대 노트북으로 보지 말고 반드시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영화다. 카니발을 포함해 내 촬영 분량만이 아니라 놓쳤던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물론 델 토로 감독이 전부터 이런저런 짧은 영상을 보여줬고 프리프로덕션 단계에 VR로 서커스의 모습을 체험하긴 했지만, 편집이 끝난 최종 버전을 스크린에서 보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스탠턴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서 무서우면서도 환상적이었다. 딱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영화의 느낌이랄까(웃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함께 한 작업은 어땠나.
델 토로 감독은 정말 명료하고 솔직하고 서프라이즈를 좋아한다. 그리고 굉장히 실용주의자다. 매우 개방적이지만 핵심이 매우 분명하기도 하다. 그는 누군가의 제안과 아이디어가 아무리 터무니없이 들려도 전부 귀담아들어주고 “아주 좋아요” 혹은 “그건 안 될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거절할 때는 안 되는 이유를 정확하게 말해주면서 모든 사람의 아이디어와 모든 공헌을 최대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립 서비스 같은 건 절대 하지 않는다. 모든 제안에 활짝 열려 있어서 굉장히 탄력적이고 광범위한 도전을 해나가는 것 같다. 델 토로 감독은 촬영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놀랍게도 의외의 곳에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끌어낸다. 그리고 뛰어난 안목과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어서 언제 놓아야 하고 또 언제 밀고 나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정말 보기 드문 감독이다. 마음도 넓고 친절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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