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코닉 백] 파리를 가방으로 만든다면, 샤넬의 11.12 백
오픈 런, 재테크, 리셀러… 뉴스를 장식하는 소란스러운 단어를 한 겹 한 겹 벗기다 보면, 그 한가운데에 가방이 있다. 얼마나 심미안이 있고, 얼마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지 드러내는 척도가 된 아이코닉 백. 보그닷컴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가방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더블 C 로고가 눈에 띄는 샤넬 백은 아이코닉 백을 이야기하는 데 가장 걸맞은 출발점이다. 남녀노소, 이 가방의 상징성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클래식 플랩 백이라고도 불리는 이 11.12 백을 이야기하려면, 그 전에 2.55 백을 들여다봐야 한다. 1955년 가브리엘 샤넬이 고안한 2.55 백을, 1980년대에 칼 라거펠트가 재해석한 것이 11.12 백이기 때문.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도 전인 1900년대는 레이스, 코르셋, 속치마 등 여성성을 극대화한 의상이 절대다수를 이루던 시기다. 가브리엘 샤넬은 절제된 디자인으로 새로운 비전을 제안하며 여성복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1955년. 의상에서 그랬듯 자신에게 어울리면서도 필요에 맞는 가방을 원하던 그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직사각 형태는 그가 추구하는 절제된 스타일과 어울렸다. 여기에 당시만 해도 장갑에만 쓰던 부드러운 양가죽 소재로 부드러운 질감을 더했고, 이를 마름모꼴로 꿰맸다. 오늘날 다이아몬드 퀼팅이라 불리는 이 마름모 형태는 가죽 장인들의 재킷과 덮개, 그들이 만들던 말안장 깔개에서 영감을 가져온 것. 셔츠와 팬츠 차림으로 승마를 즐기던 가브리엘 샤넬의 모습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실용성을 우선시한 디자이너의 철학은 11.12 백의 내부에도 드러난다. 립스틱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 카드나 콤팩트를 넣을 수 있는 주머니 두 개 그리고 큰 주머니 두 개 덕분에 가방 안 소지품을 찾기가 쉽다. 나머지 주머니 둘은 재미있는 이름을 가졌다. 메모지 또는 비밀 편지를 접어 넣을 수 있는 ‘비밀’이라는 이름의 지퍼 장식 주머니가 그중 하나. 다른 하나는 장인들이 ‘미소 짓는 주머니’라 부르는 것으로, 가방 뒷면을 장식한다. 네 개의 주머니로 장식한 트위드 재킷이 그렇듯, 기능이 형태가 된 셈이다.
가브리엘 샤넬이 창조한 가방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길게 늘인 메탈 체인 스트랩이다. 그는 이를 두고 말했다. “가방을 손에 쥐고 있는 것도 잃어버리는 것도 지겨워서, 긴 끈을 가방에 연결해 어깨에 걸치고 다녔어요.” 선택권이 많은 지금에야 당연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당대 여성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샤넬이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선택 덕분. 가방을 지니고도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싶어 했던 가브리엘 샤넬 덕에 우아하면서도 자유로운 2.55 백이 태어났다.
이후 1980년대 샤넬의 디자이너였던 칼 라거펠트는 가방 덮개 안쪽에 더블 C 장식을 고정한 백을 런웨이에 선보였다. 1980년대가 로고의 시대였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 하우스를 상징하는 로고가 장식된 11.12 백엔 하이라이트가 쏟아졌다. 오랜 시간을 거치며 그 합리성과 현대성을 검증받아온 샤넬의 가방은 로고와 함께 욕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버지니 비아르가 샤넬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후에도, 11.12 백의 모든 요소는 샤넬 컬렉션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이아몬드 퀼팅과 함께 가브리엘 샤넬이 직접 고안한 브이 모양의 셰브런 퀼팅, 그리고 알갱이 같다 하여 ‘캐비어’라 불리는 소가죽 소재는 양가죽과 함께 의상이나 슈즈 등 액세서리로도 등장해온바.
그러나 명성이나 영향력에 안주하는 법 없이 11.12 백은 저지, 트위드, 벨벳, 데님, 실크, 페이턴트 가죽, 메탈릭 가죽 등 다양한 소재와 색상으로 버지니 비아르가 구상한 샤넬 레디 투 웨어 컬렉션에 등장한다. 끝없는 변신은 매혹의 비결 중 하나다. 11.12 백은 매 시즌 다른 얼굴로 등장한다. 합리성과 현대성이라는 DNA는 변치 않은 채.
아이코닉한 것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가방인 만큼, 이를 즐겨 든 유명인은 손꼽을 수 없을 정도. 브리짓 바르도, 안나 카리나, 잔느 모로, 카트린 드뇌브, 로미 슈나이더 등 시대를 풍미한 프랑스 배우들은 물론, 최근 열린 샤넬 오뜨 꾸뛰르 쇼에서 말을 타고 런웨이 오프닝을 장식한 샬롯 카시라기, 그녀의 엄마인 모나코 공녀 카롤린, 재클린 케네디, 다이애나 비 같은 귀족과 영부인들까지 즐비하다. 과연 이들은 앞서 언급한 이 백의 어떤 면에 매료된 걸까?
”거쳐온 시간을 떠올린다면, 이건 단순한 가방 그 이상이에요. 마치 파리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셈이죠.” 샤넬 ‘아이코닉 백’ 캠페인의 모델로도 선 프랑스 배우 조에 아자니(Zoé Adjani)는 말한다. 우아한 스타일, 자유와 혁신의 기록, 합리적이고 현대적인 태도,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담은 제품. 샤넬 가방은 아이코닉 백의 왕좌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다.
- 프리랜스 에디터
- 이선영
- 포토
- Getty Images, Courtesy of Ch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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