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나의 유기체적 공간, ROOM이 아닌 LOOM
김영나가 베를린에 마련한 새 공간은 지난 몇 년 납작해지고 창백해진 시간을 색색의 율동감으로 다시 깨운다. 인테리어가 아니라 유기적 공간을 둘러싼 경험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픽 디자이너 김영나가 지난해 베를린에 자리 잡은 건축물 IBeB(Integratives Bauprojekt am ehemaligen Blumengroßmarkt)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번화가인 미테와 이주자들의 터전인 크로이츠베르크 사이, 베를린 장벽 근처에 위치한 건축물은 담장 너머 다윗의 별이 상징하는 유대인 박물관 일부와 마주한다. 유럽 전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건축가 이파우(ifau)와 하이데 & 폰 베커라트(Heide & von Beckerath)가 설계하고, 2019년에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이름을 딴 건축상 후보에도 오른 이 건물은 일반 아파트가 아니다. IBeB를 번역하면 ‘옛 베를린 꽃시장에서의 통합 건설 프로젝트’, 베를린시가 야심 차게 진행한 협력 주택, 즉 커뮤니티 하우징이다. 공간 구조뿐 아니라 성격까지 손수 만들어낸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형성했다. 지금도 이들은 정원을 함께 가꾸고, 세미나실과 목공실을 공유하며, 체계적인 온·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소통한다. 우연한 기회에 어느 화가가 쓰던 공간에 입주한 김영나는 “이 상황이 재미있는 데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담아” 이웃들에게 이사 떡을 돌렸다. 앞으로 김영나라는 작가의 공간에서 벌어질 모든 일은 독일 내에서도 꽤 유명한 이 건물의 고유한 콘텍스트, 그 자장 안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김영나가 계획 중인 모든 일은 애초에 건물의 존재감에 기대지 않은 자립적, 자생적 프로젝트이다. 2020년 봄, 북서울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물체주머니> 때 만난 그녀가 말했다. “무엇을 해도 상관없는 텅 빈 상태이자 유연한 덩어리 같은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빈 전시장을 어슬렁거리고, 누워 있기도 하고, 작품과 대면하면서 오롯한 시간을 보낸 작가가 어떤 ‘공간’에 ‘실재’하는 ‘경험’의 의미와 방식, 가치와 공유에 대해 골몰하며 얻은 단서였던 것이다. 그 후 김영나는 결백한 진공의 어떤 공간에 작업을 두고 불특정 소수를 머물게 한다는 점을 골자로, 미래의 이 공간을 둘러싼 개념을 서서히 성장시켜왔다.
김영나의 공간은 외부 환경을 면한 거대한 유리 벽(창)과 육중한 검은 철문으로 시작된다. 나와 세계를 분리하는 동시에 연결하고, 닫는 동시에 여는 이런 건축적 요소는 건물 본연의 민주적, 외향적 성격을 강조한다. 층고 5m의 수직 박스 안에 두 개의 수평 박스가 들어 있는 형국이니,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평면이 적층된” 공간인 셈이다. 지층은 앞쪽 빈 공간과 커튼으로 개폐 가능한 뒤쪽 공간으로 구성되는데, 앞쪽은 아틀리에, 뒤쪽은 김영나의 또 다른 브랜드인 테이블유니온의 작업 공간이자 개인 작업실 역할을 한다. 복층을 아우르는 거대한 책장과 길고 완만한 계단은 이 공간의 기능성을 도맡을 뿐 아니라 표정까지 좌우할 만큼 인상적이다. 위층에는 김영나 부부의 생활 공간이자 남편인 디자이너 김형근의 홈 오피스가 자리하는데, 칸막이 하나 없다. 유리 프레임 안쪽을 원색으로 장식한 소소하지만 재치 만점의 터치도 발견된다.
“당신이 가진 건 당신의 것일 뿐만 아니라 더 큰 것의 일부라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IBeB의 건축가인 폰 베케라트의 인터뷰 일부가 유독 기억에 남는 건, 공교롭게도 김영나가 예정한 공간의 운영법 혹은 프로젝트 방향과도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기는 김영나의 공간이지만 김영나만의 공간은 아니며, 이는 소유가 아니라 실행과 영역의 개념이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가 무화된 지점에서 생활 공간, 작업 공간 그리고 전시 공간이 유기적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식이다.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를 전개하고, 물리적인 작품 제작 과정을 거치며, 관람객이 작품을 만나는 등 다양한 목적을 수행하면서도 투명하게 열린 공간이다.
이 공간의 가장 강력한 정체성은 유연성이다. 지층은 아틀리에, 갤러리, 쇼룸, 상점 등으로 변모할 수 있으며, 자연히 거대한 유리창 혹은 유리 벽을 쇼윈도로도, 캔버스로도 활용할 수 있다. 어떤 일을 누구와 도모하는가, 무엇을 보여주는가, 누가 찾아오는가에 따라 다른 공간이 된다. 본인 작업으로 채워질 수 있고, 협업 작품을 소개할 수도 있으며, 실제 무언가를 행하는 모습이 퍼포먼스처럼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작업으로 보이길 바라는 사물과 실제 사용하는 사물이 한데 놓여 적절한 긴장감으로 어우러질 것이다. 작가 혹은 미술에 관심 있는 이들과는 작업 이야기를 나누고, 그저 머물 공간이 필요한 이들과는 영상이나 사운드, 요리나 다이닝 등의 활동을 통해 말문을 틀 수도 있다. 말하자면 공간-사람-사물을 꼭짓점으로 삼되 이들의 이합집산 양상에 따라 매우 다른 모양의 삼각형이 되는 셈이다. 삼각형을 고정하지 않고 불협화음을 감수하겠다는 건 작가 스스로 그렇게 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예술적 사건의 중심에 있는 김영나는 이 공간의 아트 디렉터이자 클라이언트, 기획자이자 운영자, 작가이자 관객이다.
“원래부터 공간에 애착도 많았고, 공간 꾸미기도 즐겼어요. 대학 기숙사 벽을 온통 파란색으로 칠한 적 있어요(웃음). 황당하지만, 내가 머물 공간이니까 무조건 벽이 파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김영나는 파란색을 색의 기본으로 여긴다). 그 색으로 가득 찬 공간에 나란 사람을 놓고, 그 안에서 색을 경험하고 싶었거든요. 파랑, 주황의 대형 색지를 붙이고는 그간 모았던(지금도 모으지만) 각종 패키징이나 인쇄물로 벽을 채우기도 했고요, 뚜렷한 목적도 없이. 사업으로 발전시킬 궁리를 한 적도 있어요. 구조가 아니라 평면을 바꾸어, 즉 컬러, 재질, 형태를 재배열해서 새로운 경험을 제안할 수 있지 않을까 한 거죠. 이런 경험이 모두 연결된 게 아닌가 싶어요. 결국 이 공간도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을 실행에 옮기는 캔버스인 셈인데, 그 캔버스가 입체로 둔갑한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여러 입장이 겹쳐지고 포개지는 지점에서 질문이 생겨나리라 생각해요.”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직후인 2012년, 김영나는 문화역서울284의 전시 <인생사용법>에 참가했다. ‘디자이너 자신의 삶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주제 아래 전시장에 아예 작업실을 꾸렸고, 운 좋은 관객은 김영나가 작업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주의 과정에서 느낀 추상적 불확실성, 이에 맞닿은 감정을 작업실로 구현한 작업을 통해 그녀는 관람객이나 CCTV 등의 존재가 작가 본인의 행동, 습성, 사고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양한 불확실성의 경험은 베를린 A—Z 프레즌트의 <일시적인 작업실, 56>전에서 더 구체화됐다. 당시 김영나는 ‘일시적 헬프 데스크’ 식으로 미술 관계자도, 클라이언트도 아닌 생면부지의 관객과 작업 이야기를 주고받는 기회를 마련했다. “일시적 공간의 규칙 안에서 즉흥적으로 생겨난 해프닝, 발견이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나의 시간을 바꿔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이번에는 공적 공간-사적 공간의 관계를 반대로 전복하고, 유연성의 비율을 더 높이는 거죠.”
특히 전시는 늘 예상치 못한 사건을 통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변화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생물’이라는 그때의 믿음은 이번에도 유효하게 작용한다. <보그> 촬영 전날, 김영나는 높은 벽에 커다란 녹색 동그라미를 그렸다. 매일 아침 출근하듯 지층으로 내려올 때 테이블에 놓인 사물에 따라 같은 공간을 달리 느낄 정도로 ‘공간 감수성’이 뛰어난 그녀는, 이 동그라미를 그리고 나니 살아 있는 개체가 공간에 들어온 듯하다고 말한다. 김영나는 늘 과거 작업과 경험을 통해 다음 작업의 단서를 얻거나 발현시키는데, 특히 이 동그라미가 합리적 ‘자기(역사) 참조’의 좋은 예다. 아직은 고요한 공간, 출발점에 서서 빈 벽을 들여다보던 작가는 당연하게도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연작이자 방법론, 작업 도구이자 형식 실험의 재료인 책 ‘SET’의 첫 페이지를 떠올렸다.
‘SET’은 2006년부터 2015년까지의 커미션 프로젝트, 개인 작업, 전시작 등 다양한 시기에 걸쳐 다른 형태와 목적, 사연의 결과물을 모은 책 형태의 아카이브다. 보통의 도록과 다른 점은 디자인을 일임받은 김영나의 대학 동문이자 디자이너인 요리스 크리티스가 이 아카이브를 주관적으로 해체하고 맥락을 삭제해 ‘기계적으로 배열했다’는 점이다. 김영나의 세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해온 디자인 언어를 평면에 보관한 일종의 ‘추상적 샘플 북’이자 ‘친절한 지침서’, 경험과 기억이 담긴 ‘포트레이트’로서의 ‘SET’의 가능성은 다채로운 장소에서 나날이 발화했다. 각각의 페이지는 <물체주머니> 전시 작업, 지산밸리록뮤직앤아트페스티벌의 휴식 공간, 성신여대입구역의 공공 미술, 동료 작가가 기획한 침구 세트 등으로 재탄생하며 구조 및 형식 실험의 소스가 되었다. 이 녹색 동그라미는 몇 년 전 호텔 사월의 방 하나를 획기적인 주사위로 해석하는 데 기여한 바로 그 요소이자, 공교롭게도 ‘SET’의 맨 첫 이미지다.
“그간 의뢰받은 공간에 저의 규칙을 적용해 ‘SET’을 그려왔어요. 하지만 내 공간에, 심지어 5m 높이인 벽에 작업한 적은 없었죠. 이 동그라미를 시작으로 ‘SET’의 매 페이지를 벽화로 옮겨 그려볼까 해요. 고정 공간이라 역동성은 덜하겠지만 유연하게 바꿔볼 수 있고, 자율적인 결정도 내리면서, 형식에 대한 실험을 일상에서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것이 내게는 굉장히 편안한 리추얼이 될 것이고, ‘SET’의 도구 혹은 샘플 북으로서의 가치는 더욱 견고해지겠지요.” 모든 페이지에 과거부터 미래까지, 기억과 망각이, 관계와 대화가 각주처럼 달린 ‘SET’은 이 공간과 녹색 동그라미의 합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공간 역시 김영나의 개념과 철학을 집대성한 플랫폼으로서 자격을 얻게 되었고, 그녀의 디자인은 다음 장으로 진입했다.
IBeB 건물의 성향 덕분인지 미술, 패션, 디자인, 음악 등 문화에 특화된 이웃들이 많다. 3월 중순 김영나는 이들을 포함, 친구들과 동료들을 초대해 오프닝 행사를 가진다. 이를 시작으로 1년에 네 번 정기 행사를 열고, 그 사이 변화할 공간을 기록하는 일도 계획 중이다. 딱히 규정할 수 없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정의되는 독특한 공간을 운영하는 이상하고 흥미로운 이들을 초대하는 것도 예정된 중요 변수다. “벨기에에 15년 전 밴드로 출발한 컬렉티브 그룹이 만든 ‘019 겐트’라는 공간이 있어요. 음악을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이 공간이 구심점인 것 같아요. 더 나아가 버려진 교회를 활용해 만든 ‘쿤스트할 겐트’에서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전시 등을 진행하고 있죠. 한편 오펜바흐에서 ‘크레스만 할레’라는 공간을 운영하는 이들은 거의 건축의 규모로 공간을 바꿔요. 여기서 와인이나 피자를 만드는 등 애매모호하나 특별한 활동, 일상과 접점을 갖는 퍼포먼스가 펼쳐지죠.” 작업, 공간, 사람을 뭉뚱그려 전체를 다루는 이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사는, 인터뷰든 협업이든 또 다른 작업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현지 친구들에게 공간 계획을 털어놓으면서 김영나는 ‘왜’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신선했죠. 내가 좋아하니 당연히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내가 ‘공간을 경험한다’는 말을 계속하더군요. 공간을 나눈다는 건 시간에 대한 이야기 같아요. 누군가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할당하고, 경험하게끔 하는 거죠.” 결국 중요한 건 김영나가 만드는 공간 자체보다 그 공간을 통해 시간을 공유하는 경험이다. “나의 제안을 보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보다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서사와 연결 짓는 것, 이것이 최종 목표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과정에서 오는 어떤 마법적인 즐거움이 있으니까요.” 시공간의 공유는 모든 예술가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의 시간은 창백하고 납작해졌지만, 그녀의 새 공간은 그 시간을 일깨운다. 내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예술의 일상성에 대한 믿음으로.
김영나 디자인의 남다름은 사물이든 공간이든 본래의 생김새, 목적, 기능, 관계 등을 잊고 새롭게 바라보는 전복적인 시선에서 비롯되었다. 전형적인 디자인의 기능에서 벗어나 형식을 탐구했고, 색과 면, 컬러와 도형의 실험이 그 자체로 즐거울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개인의 서사와 기억을 형식과 구조로 구현하는 도전을 했기에, 김영나의 그래픽 작업은 결코 평면에 머문 적 없었다.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세상을 관찰하고자 하는 태도는 공간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으로 확장되고, 이로써 그녀의 삶에 가닿는다.
“앞으로도 작업을 하며 살겠지요. 어디에 휩쓸려 매몰되어 허겁지겁 살기보다는 과거에 했던 작업들을 돌이켜보면서 현재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고, 또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등을 더 살뜰히 관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 공간이 그런 삶을 살 수 있게끔 하는 장치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체적으로 시공간을 대하는 김영나가 고안한 이곳의 이름은 룸(LOOM)이다. 직조하다, 어렴풋이 보이다, 곧 임박하는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떠올리다라는 의미인데, 무엇보다 ‘당신이 창조하는 공간이 가까운 미래에 속한다는 기대감’이라는 작가의 절묘한 정의가 가장 마음에 든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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