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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올,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라는 혁명

2022.04.06

디올,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라는 혁명

다른 사람들처럼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Maria Grazia Chiuri)도 줌을 통한 대륙을 넘나드는 소통과 와이어리스 이어폰의 사용 등과 같은 기술적 난관을 그럭저럭 헤쳐나간다. “디지털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요.” 파리 디올 본사와 줌으로 연결했을 때, 그녀가 웃으며 털어놓았다. “딸아이가 도와주었죠.” 24세인 그녀의 딸 라켈레 레지니(Rachele Regini)가 엄마의 모습이 화면에 제대로 나오자 프레임에서 사라졌다. 화면에 나타난 키우리는 실버 블론드 헤어를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었으며, 블랙 점퍼를 착용하고, 콜-림드 아이(Kohl-rimmed Eye, 눈 주변을 따라 어둡게 화장하는 것) 스타일로 눈 화장을 하고 있었다.

키우리는 글로벌 럭셔리 거대 기업인 디올을 6년째 이끌고 있다. 17년간 발렌티노에서 일한 후, 2016년 이 프랑스 패션 하우스의 역대 첫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솔직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며 여기서 활동을 시작했다. ‘영감’이라는 예기치 못한 바람에 끌리는 고독한 선지자 이미지를 키우기보다, 그녀만의 따뜻한 태도와 밝고 리드미컬한 이탈리아식 스타카토를 통해 늘 그런 이미지를 떨쳐냈다.

그녀는 담담하게 그런 성과를 인정했다. 수십억 달러 규모에 이르는 이 브랜드의 여성복 부문은 그녀의 합류 이후 꾸준히 상업적 성공을 이뤘고, 지난해 9월까지 수익은 전년 대비 46%의 성장을 기록했다. 그녀의 2017 S/S 데뷔 컬렉션은 발표와 동시에 소비자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무슈 디올이 1947년 발표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뉴 룩 컬렉션에 처음 등장했던 바 재킷 등 이 브랜드의 아이콘을 새로운 이미지로 재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첫 컬렉션을 통해 바 재킷이 더 실용적이고 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구매하게 됐죠.”

그녀는 자신의 딸이 가장 큰 뮤즈이자 안내자이며 친밀한 조언자임을 감추지 않았다. 레지니가 예술사, 젠더, 미디어, 문화를 공부하고자 런던으로 갔을 때, 키우리는 딸의 독서 목록 전체를 읽었다. 레지니는 자신이 패션 산업, 심지어 엄마의 작품에 비판적임을 인정하고 있으며, 두 사람은 활발한 대화를 이어간다. 그 이해의 수준은 레지니가 2019년 디올의 공식 문화 자문 위원으로 임명되기에 이를 정도다.

키우리는 팬데믹으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젊은이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시인했다. “새로운 세대와 대화하는 데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있어요. 딸뿐 아니라 제 팀과도 대화를 나누죠. 팀원의 친구 그리고 아들딸의 친구와도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녀는 큰아들 니콜로(Niccolò)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키우리의 남편이자 셔츠 메이커 파올로 레지니(Paolo Regini)와 함께 로마에 살고 있다. “이 브랜드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거죠.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대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선은 엄마처럼, 그런 다음엔 디자이너처럼 그들과 이야기하죠.”

2022 S/S 컬렉션은 그녀의 디자이너 커리어에서 중요한 시기에 발표됐다. 팬데믹 록다운 이후 처음으로 관객과 함께하는 패션쇼였기 때문이었다. 1946년에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던 세상에서 브랜드를 설립한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과 묘한 평행 이론을 갖는 키우리는 디올이 직면했을지 모를 큰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첫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 한 명이다. 크리스찬 디올이 전쟁 시대의 소박한 의상과는 정반대인 하이퍼 페미닌 S자 실루엣의 뉴 룩을 탄생시켰을 당시, 그 역시 키우리처럼 엄청난 비극과 혼돈의 시대에 의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도 지금 비슷한 물음을 고민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입고 있는가? 패션의 위치는 어디일까?”

“팬데믹 위기의 시기에 패션 시스템에 대한 많은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그녀가 곰곰이 생각하면서 말했다. “패션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옷은 주로 우리 자신을 묘사하도록 돕죠. 즉 옷을 우리 정체성의 일부라고 느낍니다. 저는 사람들이 유니폼처럼 똑같은 옷을 입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확신해요.” 그녀는 디자이너 마르크 보앙(Marc Bohan)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디올에서 아주 유명해진 디자이너는 아니었지만, 28년이라는 최장 기간 이 브랜드를 이끌었고, 키우리가 이 브랜드에 합류했을 때 굉장히 친숙하게 여기던 작품을 탄생시킨 인물이다. 적절한 시기에 이 브랜드는 대규모 회고전 <크리스찬 디올: 꿈의 디자이너(Christian Dior: Designer of Dreams)>를 준비했고 아카이브를 개방했다. “보앙은 새로운 세대의 여성과 즉각적으로 소통했어요. 그에게도 딸이 하나 있었거든요.”

키우리는 자신의 시그니처 같은, 속이 비치는 우아한 드레스, 나이프 플리츠 스커트 그리고 밀푀유 드레스를 빼고, 1940년대 후반 디올의 화려함을 피했던 보앙의 1961년 슬림 룩 컬렉션에서 영향을 받은 딱 부러지는 그래픽 실루엣을 선보였다. 미니스커트, 박시 재킷, 매력적인 보이시한 변화 그리고 초현대식 스쿠버 패브릭 고고 부츠가 2022년 스타일로 업데이트된 블랙을 바탕으로, 쇼킹 핑크, 클로버색과 오렌지색까지 밝은 블록 컬러로 등장했다. 이것은 모두 196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위적인 젊은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던 그 시대는, 아방가르드 아티스트 안나 파파라티(Anna Paparatti)가 사회 구조와 전통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녀의 보드게임 같은 작품을 구상해내던 때였다. 키우리는 이 작품을 접목해 모델들이 워킹했던 숫자가 적힌 네모판의 세트장을 탄생시켰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사람들은 이런 즐거운 자세로 패션에 접근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패션은 사람들에게 유희적인 뭔가로 기쁨을 주는 것이기도 하죠. 우리는 몸을 가리기 위해서나 날씨가 추워서 옷을 입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의 개성, 이 세상에서 우리의 역할을 가지고 즐기는 방법이죠.”

그녀의 컬렉션은 또한 Z세대만의 캐주얼한 방식으로 믹스된 실크 세퍼레이츠, 코트와 루스한 재킷에 두루 장식된 스포티한 오버사이즈 셰브런(Chevron)을 통해 엄청난 활동성을 담아냈다. “젊은 세대에게는 새로운 감성이 있어요.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사람이 각자의 집을 짓듯 각기 다른 방식으로 스타일을 구성해갑니다.”

1970년대 이탈리아의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한 키우리는 이런 표현의 자유를 경외한다. 그녀는 기성복 시대가 도래하기 전 예술 학도로서 플리 마켓을 돌며 유니크한 작품을 찾아다녔다. “지금은 패션을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제가 어릴 때는 그런 일이 그다지 쉽지 않았죠.”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밀라노에 문을 연 첫 피오루치 매장에 가던 때가 아직도 생각나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1967년 엘리오 피오루치(Elio Fiorucci)가 문을 연 이 매장은 오시 클락, 잔드라 로즈 같은 디자이너의 작품을 판매하고, 나중에는 앤디 워홀과 셰어 등이 들르면서 1960년대의 변화하는 런던으로 이어지는 관문이 됐다. 이번 시즌 디올의 블록 컬러는 선명한 색상으로 가득 찬 피오루치의 초창기 광고에 대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키우리는 디올에서 ‘여성을 위한 디자이너 되기’라는 신조를 따른다. 그녀도 페미니즘과 청년 문화 도래와 함께 성장하지 않았나. 그녀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의 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We Should All Be Feminists)”가 선명히 새겨진 티셔츠를 선보였던 그 유명한 디올 데뷔 컬렉션의 순간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모든 잡지와 모든 저널리스트가 제게 그것에 대해 물었죠. ‘당신은 정치적인 디자이너입니까?’라고 말이죠. 그렇지만 정치적이지 않은 건 뭘까요? 그리고 패션과 관련된 얼마나 많은 것이 정치적인 요소에 영향을 줄까요? 패션에서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일각에서는 그것이 페미니즘에 대한 보여주기 방식이라고 평했다. 그렇지만 키우리는 이런 인식에 도전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아티스트 토마소 빙가(Tomaso Binga),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클레르 퐁텐(Claire Fontaine)부터 작가 로빈 모건(Robin Morgan) 같은 창의적인 여성과 협업할 뿐 아니라 이탈리아 페미니스트 카를라 론치(Carla Lonzi)의 글 ‘가부장제=기후 위기 그리고 우리 모두 여성 생식기를 지닌 여성이다(Patriarchy=Climate Emergency and We Are All Clitoridian Women)’를 차용해 런웨이를 밝히기도 했다. 게다가 여성 사진가와 작업하고, 그 패션 하우스의 스태프와 젊은 멘티를 매칭하는 ‘Women@Dior 멘토십’을 장려한다.

키우리가 로마의 유럽디자인대학(Istituto Europeo di Design)에 재학하던 시절, 조토(Giotto)와 카라바조(Caravaggio)에 대해서는 공부했지만 파파라티 같은 여성 아티스트에 대해서는 공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담 비오네와 코코 샤넬(“패션계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중 한 명이죠.”) 같은 여성을 제외하고는 패션계에서 롤모델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몇 명 있다 해도 남성 디자이너처럼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패션계에 투신하고 싶다고 선언했을 때 그녀의 어머니가 제정신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아무도 저를 격려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1989년 펜디에서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출발해 모계 중심의 프리즘을 통해 패션계를 살짝 경험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일하다니 정말 운이 좋았죠.” 그녀가 펜디 자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현재 상징적으로 자리 잡은 바게트 백 구상에 기여했고, 디올에서 크게 활용하는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그녀는 2018년 디올 새들백을 재출시함으로써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 밖에도 2019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프랑스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을 받으며 그녀는 디올의 첫 매장이자 본사이며 영적 본향인 몽테뉴 30번가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디올은 여성성을 대표하는 패션 하우스입니다. 이런 이유로 제 헌신을 통해 여성이 각자의 잠재력을 깨닫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녀는 설립자의 유산을 되짚어보면서 와스프 웨이스티드(Wasp-waisted, 말벌처럼 허리가 가늘고 엉덩이가 큰) 실루엣이 살짝 틀에 박힌 것이었음을 (다시 한번 솔직하게) 인정했다. 패션계에서 나름의 변혁기에 직면한 그녀는 이번 시즌 각진 형태에 허리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의상을 선보였다. “저는 디올이 여성의 몸을 한 가지 실루엣만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이 부분에서 그녀는 이탈리아어 ‘Destruttuare’, 즉 ‘해체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여성의 몸은 굉장히 다양하죠. 그래서 디올은 각자의 관점으로 각자의 몸을 만들어낼 기회를 만들어내야 했죠. 그 누구나 디올이 되는 거죠.”

그녀는 다시 마르크 보앙과 그의 혁명적인 슬림 라인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는 디올 프레타 포르테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을 찾는 고객의 자녀를 위한 아이디어였죠.” 그녀가 말했다. “새로운 세대 말이에요. 그가 그것 때문에 굉장히 유명해진 건 아니지만요.” 아마 키우리는 스스로 그런 명성을 떨치는 여성이 될 것이다. (VK)

    Alice Birrell
    포토
    COURTES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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