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소년
윤계상은 광선검 하나 없이도 상대의 마음을 무장해제시켜버리는 포스의 비법을 터득했다. 배우로서 그의 무기는 작렬하는 카리스마나 신들린 듯한 연기가 아니라 순수함이다. 이건 세기말의 암울한 분위기를 타고 ‘god’라는 엄청난 이름으로 등장했던 20세기 소년의 현재 이야기다.
희대의 악당 ‘다쓰 베어’를 애완 곰으로 길들인 제다이 기사가 커다란 담요를 망토처럼 두르고 늠름하게 섰다. 마초맨의 필수품인 파이프와 ‘ 맨 인 블랙’ 의 상징 블랙 선글라스도 잊지 않았다. ‘스카이 액터’윤계상이다. 귀염성 있는 동그란 몸매와 투명한 구슬 눈으로 소녀깨나 울렸다는 바람둥이 외계 곰도 그 앞에선 한 마리 뚱보 곰일 뿐. 지금 무대 위에서 천연덕스러운 액션으로 얄밉도록 사랑스러운 남자를 보여주는 그는 광선검하나 없이도 상대의 마음을 무장해제시켜버리는 포스의 비법을 터득했다.윤계상의 무기는 순수함이다. 서툰 발레리나의 아라베스크 동작처럼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한 발로 선 〈발레 교습소〉의 현태가 그랬다. 세상의 쓴맛 단맛 아는 스물일곱 살 남자가, 그것도 ‘ god’라는 국민그룹의 멤버였던 스타가 소년의 불안함과 외로움을 고스란히 표현해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살인자(<사랑에 미치다>)나 밑바닥 인생을 사는 호스트(<비스트보이즈>)를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줄만 알았던 182cm의 커다란 어른의 마음속엔 여전히 상처입은 어린 소년이 살고 있었다. 작렬하는 카리스마나 신들린 듯한 연기가 뜨거운 불길이라면, 이건 따뜻한 물이다. 말하자면 푸른색 광선검.
가장 먼저 그 능력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변영주 감독은 ‘오비완 요다’ 되겠다. “〈발레 교습소〉 때, 처음으로 뭔가를 평생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아요, 지금도.” 연예계에 데뷔한 지11년, 연기를 한 시간은 딱 그 절반쯤 되었다. 언젠가 <서세원 쇼>에 나와주성치를 좋아하고 그런 코믹 영화를 해보고 싶다던 가수는 진짜 배우가 되어버린것이다. “god는 분명 영광스러운 나날이었고 좋은 기억이지만, 그 시절엔 성취감이란 걸 별로 못 느꼈어요. 내가 음악적 재능이 있던 놈도 아니고가수를 꿈꾸면서 몇 년 동안 준비했던 것도 아니니까. 열등감에 많이 시달렸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절대 그런 거 없어요. 오히려 신나죠.” 아무런 꿈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신나게 노는 재미로 살던 학창 시절엔 지금처럼 이토록 뭔가에 열정을 갖게 되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패싸움도 해보고 여자도 꽤 만나봤다. 우연찮게 그룹의 멤버가 되면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생겼지만, 그때도 가수로서 성공해보리란 욕심조차 없었다. 일 년 반 동안 숙소에 방치되었던 데뷔 초엔 다만 스무 살이 넘어 겨우 찾은 일을 포기하는 게 창피해서 도망칠 수가 없었고, 인기를 얻고 난 후엔 경제적 풍요로움과 안락한 생활이 너무나 달콤했다. 인간 윤계상은 사라지고 상품화된 껍데기만 남았지만,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그런데 연기를 만난 거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해,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남자 신인상까지 수상했다.이등벽 딱지가 붙은 얼룩무늬 군복이 그의 레드 카펫 의상이었다.“
입대 2주 전에 영장을 받았다고 들었어요.”〈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 상대역을 제의 받고 〈커피프린스 1호점〉의 남자 주인공으로도 캐스팅된 후였다. “네. 처음엔 군대가 내 인생에 왜 이렇게 태클을 심하게 거나, 세상도 탓하고 그랬죠. 군대에 있을 동안 힘들었어요. 6년 동안 만났던 사랑하는 여자친구와도 헤어졌고, 집안에는 안 좋은 일이 생겼고.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아닐까 싶어요. 군대를 갔기 때문이 아니라 갇혀 있는 상황에서 속수무책으로 자꾸 일들이 터지니까. 와, 이건 정말 미치는 거죠.”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군생활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힘들수록 사념은 줄어들었으니까. 총도 꽤 잘 쐈다. 생각을 멈춘 대신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 연기 연습을 했다. 거울을 수백 번도 더 봤다. 자신의 얼굴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궁금했다. “전 제 얼굴을 너무 싫어했거든요. 〈발레 교습소〉 보면서도 ‘뭐야, 쟤. 못생겼어.’ 할 정도로 민숭민숭하게 생긴 게 싫고, 깊이 없이 가벼운 느낌이 싫었어요.” 군복을 입은 다 큰 남자가 거울 앞에서 울고 웃고 찡그렸다. 어쩌다 발견하는 괜찮은 느낌과 표정은 기억해 두고, 아이돌 특유의 정형화된 포즈와 웃음은 지워버렸다. 사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가장 적절한 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윤정 감독은 2년을 기다려 다시 윤계상을 캐스팅했다. 마침 그는 고향 타투인 행성에서 휴식기를 갖던 중이었다. 지구인들은 한동안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10개월 정도 쉬었죠. 제대 후, 빨리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싶은 욕심이 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작품을 했잖아요. 연기라는 게 ‘잘 해야지, 열심히 해야지.’ 노력만 한다고 다 잘 되는 게 아니라 모든 상황이 제대로 맞아떨어졌을 때 작품이 빛나고 배우가 빛나는 건데, 뜻대로 안 되니 상처도 받고 좀 힘들었죠.” 세 편의 작품 중 하나는 성공했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못했다. 또 다른 드라마는 시청률 면에서 참패했고, 혼신의 힘을 쏟은 영화는 상당 부분이 편집되어 스스로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계상이 열심히 했구나’ 할 수도 있지만 전 그 이상을 원했어요. 제잘못이기도 하지만, 이러다간 연기가 싫어질까 두렵더군요. 왜 너무 좋아했던 게 싫어지면 아예 안 보게 되잖아요. 다시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이번엔 이윤정 감독이 제다이 마스터다. 광고 7년차의 카피라이터 장현태는 사람과의 관계나 사랑, 또일에 있어 이성적으로 계산하기 보단 마음의 선택을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다. 친구의 아내(이하나)를 사랑할 수 있을 만큼 감정에 솔직하기도 하다. 물론 드라마니까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감정 자체가 어떤 불순한 의도나 끈적거림도 찾아볼 수 없이 투명하다. “흔히 드라마에서 이런 삼각관계라면 괜히막 흔들리고 힘들어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게 없어요. ‘나 얘 좋아해. 내 마음이 그런데 어쩌겠어.’ 그리고 그 안의 감정들이 굉장히 예쁘고 섬세하게 드러나죠. 이윤정 감독의 강점이죠. 마치 이런 영혼들만 산다면 세상이 참 행복해질 것만 같은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
<트리플>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연애담과 사랑관으로 넘어갔다.그는 현태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고 했다. “나이가 드니까 ‘사랑을 한다는 것자체가 진짜 어렵다’는 걸 느껴요.” 글래머러스하고 아리따운 처자와의 소개팅을 요구하며 근작의 외로움을 호소하던 그가 담배를 피워 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예전엔 사랑에 빠질 때면 상대에 대한 기대심리가 극대화되어 상대의 단점까지 좋아 보였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다 좋은데 이거 하나가 단점이네. 이게 나중엔 커져서 문제를 만들 거야.’ 이런 식이죠. 다 경험의 산물이겠지만, 그게 참 슬퍼요. 지금은 진짜 마음 자체가 동하지 않으니까.” 사실이 그렇다. 나이를 먹고 그래서 심장에도 커다란 현실의 눈이 달리고 나면 끝장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원래 사랑이란 장님이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드라마를 본다. 잃어버린 두근거림을 기억하고 윤색된 추억으로부터 위로 받기 위해. 그는 사랑이 새로운 목표라고 했다. “몇 년 동안은 연기에 미쳐서 나를 보살피지 않았던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무 지친 것 같아요. 일적으로 힘들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 공허해졌어요. 이 마음이 채워졌으면 좋겠는데, 그 방법은 사랑밖에 없는 것 같아요.그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에요.” 그는 제작진이 생각한 바처럼‘헐렁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속이 깊은’ 현태를 닮았다. 알고 보면 대단한 노력가에 콤플렉스 투성이인 것도 그렇고, 의리도 있다. 헤어 디자이너는 god2집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고, 지금은 이사가 된 매니저 역시 마찬가지며 대부분의 스태프가 3년 이상 함께 일해 온 사람들이다.
전사 제다이의 엄격한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충성심, 공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희생정신과 진지한 마음 자세,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 높은 훈련과 고문에 가까울 정도로 엄격한 자기 관리. 천하무적의 배우가 되기 위한 조건도 비슷하다. 다만 그 대상이 나라가 아닌 연기일 뿐이다. 축구 게임 ‘위닝 일레븐’과 프라모델, 판타지 영화들이 인간 윤계상을 이해하는 몇 가지 키워드라면, ‘스카이 액터’ 윤계상의 키워드는 오로지 영화&드라마의 제작시스템이나 촬영 현장, 감독과 배우, 그리고 연기다. 패션이나 멋진 자동차는 물론 특별히 물질적인 것에도 관심이 없다. 단, 사랑만 빼고. 우리는 얼마전 크랭크업한 그의 영화 〈집행자들〉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서 그는 교도소의 사형 집행관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약간 심오한 이야기예요. 제 취향의 영화죠, 뭐. 또 성장 드라마. 흐흐.” 진정성의 끝장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성장을 해야 직성이 풀리겠어요?” “사람은 궁지에 몰렸을 때 진짜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죠. 그리고 그걸 성장통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궁지엔 물리면 전 공격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았죠. 이제 저의 진짜 밑바닥을 드러낼 겁니다. 그래야 진정성 있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이건 세기말의 암울한 분위기를 타고 god라는 엄청난 이름으로 등장했던 20세기 소년의 현재 이야기다. 윤계상은 그냥 배우도, 보통 배우도 아닌, 진짜 배우가 되려고 한다. 별들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당신에게 포스가 함께하기를(May the force be with you)!
- 에디터
- 이미혜
- 포토그래퍼
- 박지혁
- 스탭
- 스타일리스트/한연구, 헤어/현진, 메이크업/현진(라떼뜨)
- 브랜드
- 란스미어, 메르시보꾸, 랑방, 마코스아다마스, 갭, 구찌, 뉴발란스, 슬로우 앤 스테디 윈스 더 레이스, 지방시, 케네스 제이 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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