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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연의 역사

2022.05.11

강수연의 역사

그의 영화는 한국 영화의 역사이자, 당대 사회와 여성상의 기록이었다.

‘일세를 풍미하다’라는 표현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인생이 또 있을까. 배우 강수연이 그랬다. 그런 그가 5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영화계에는 추모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단연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이었다. 1980년대 한국은 2020년대 한국과는 다른 나라였다. 관심에 굶주려 있던 한국인들에게 세계 무대에서 한국인의 이름이 불린 건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는 우리 영화계 최초의 ‘월드 스타’였다. 영화 칼럼니스트 홍수경은 그를 추모하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강수연 배우 덕분에 우리는 부모 세대와 다르게 배우를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존경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썼다. 그의 말대로 강수연은 배우의 위상을 바꿔놓았다.

강수연에게 월드 스타라는 수식을 안겨준 <씨받이>.

영화 <씨받이>. 임권택 감독과는 2010년까지도 꾸준히 함께 작업했다.

강수연은 당당한 성품으로도 유명했다. <씨받이>를 본 기자가 어쩜 애 낳는 연기를 그리 잘하느냐는 음흉한 질문을 하자 스물두 살 강수연은 “왜 다른 연기를 하면 경험이 있느냐고 묻지 않으면서 여배우가 섹스나 출산을 연기하면 경험이 있는지 묻느냐”고 받아쳤다. 요즘 관객은 그를 <베테랑>의 명대사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에 영감을 준 인물로 기억할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정치 외압으로 파행을 겪을 때 집행위원장을 맡은 것도 그의 대장부 기질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영화계 내외부에 공히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중재자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강수연은 자기 이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아제 아제 바라아제>.

강수연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의 비구니 역을 위해 삭발을 불사했다.

1966년생, 아역으로 데뷔해 줄곧 영화계를 지켜온 강수연의 필모그래피는 그 자체로 한국 영화의 역사였고, 당대 사회와 여성상의 기록이었다. 그가 데뷔한 1970년대만 해도 전쟁, 재해, 가난, 질병 등으로 가족과 헤어지거나 고생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신파극이 많았다. 이 시기 강수연의 역할도 그랬다. <핏줄>(1976)에서는 전쟁고아가 되고, <어딘가에 엄마가>(1978)에서는 폭우로 저수지가 무너져서 엄마가 실종되고, <슬픔은 이제 그만>(1978)에서는 아빠가 병을 앓고,  <하늘 나라에서 온 편지>(1979)에서는 객지에 일하러 간 아빠가 사고로 죽었다.

10대 후반부터 강수연은 다작을 했다. 순수, 앙큼, 퇴폐를 능란하게 넘나드는 그의 연기는 당시 유행하는 모든 장르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청춘 영화의 톡톡 튀는 아가씨(<고래 사냥 2>(1985),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 향토 사극 속 파국의 운명과 색기를 가진 여인(<씨받이>(1986), <감자>(1987), <됴화>(1987)), 사회성 짙은 드라마에서 남자들의 폭력으로 스러지는 여자까지(<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1987), <그후로도 오랫동안>(1989),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베를린 리포트>(1991)). 어찌 보면 그 시기 전형적인 역할도 강수연을 만나면 달라졌다. 그는 스스로의 강렬한 아우라와 설득력으로 작품성의 하한을 담보해줄 수 있는 희소한 배우였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는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감자>. 에로 사극이 유행하던 시대, 강수연은 그 안에서도 작품성을 추구했다.

1990년대, 한국 영화계에는 새로운 여성상이 등장했다. 경제력 있고 독립적이면서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도시 여자들이다. 지금 봐도 신랄하고 재치 넘치는 대사가 즐비한 <경마장 가는 길>(1991)에서 그는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야망 있는 문학 평론가로 등장한다. 육체를 이용해 남자의 속을 끓이고 그의 재능을 훔치고 뒤통수를 치는 ‘밀당’의 제왕이자 매력적인 ‘썅년’이었다. 강수연 특유의 새침하면서 리듬감 넘치는 옛 서울 말씨, 능청스러운 표정 연기, 스마트한 이미지가 결합된 재미난 연기를 볼 수 있다. 1970~1980년대 영화에서 가정이나 남성에 종속된 채 온갖 수난을 겪던 강수연이 마침내 주체적인 여성을 연기한 데서 시대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홍콩 영화풍 미장센과 세련된 OST로 화제를 모은 <그대 안의 블루>(1992), 도시 싱글 남녀의 원 나잇 스탠드를 그린 <그 여자, 그 남자>(1993), 세 여성의 긴 세월에 걸친 성장과 우정을 다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여자들의 성욕을 솔직하게 그려보겠다는 야심을 담은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등 강수연의 현대 여성 시리즈는 1990년대 내내 이어졌다.

1990년대에는 도시의 삶과 쾌락을 그린 영화가 많았다. 영화 <장미의 나날>.

현대 여성 시리즈의 서막, <경마장 가는 길>.

영화계에서의 커리어가 뜸해지는가 싶던 2001년, 강수연은 드라마 <여인천하>로 다시 한번 화제를 모았다. 20세기 후반까지도 영화계에서 활동하면 ‘영화배우’로, 방송에서 활동하면 ‘탤런트’로, 타이틀을 달리할 만큼 묘하게 차별을 두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니 영화배우 중의 영화배우 강수연의 드라마 출연은 그 자체로 이변이었다. 강수연은 권모술수의 천재 정난정을 연기했다. 앙칼지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라는 찬사를 낳았고,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35%대를 기록했다.

영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강수연은 “언제부터 형사, 검사가 내 아랫도리를 관리한 거야?”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그 후로도 강수연은 계속 일했다. 하지만 아역부터 시작해 20세기를 풍미한 탓에 여전히 젊은 나이와 세련된 연기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구세대 배우라는 느낌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우석 감독(<한반도>(2006)), 임권택 감독(<달빛 길어올리기>(2010)) 등은 여전히 그를 찾았지만 신진 감독과의 작업은 드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산행>(2016), <지옥>(2021)을 성공시키면서 어떤 배우든 캐스팅할 수 있게 된 연상호 감독이 주연으로 강수연을 염두에 두고 SF <정이>를 썼다는 소식은 큰 호기심과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연 감독은 “강수연이 출연을 거부하면 작품을 포기하려 했다”고 밝힐 정도로 그와의 작업을 기뻐했다. <정이>는 현재 촬영을 끝내고 후반 작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달빛 길어올리기> 현장에서 오랜 영화 동지 임권택 감독과 함께.

한국 영화계가 ‘웰메이드’ 장르물에 욕심내던 2003년, 범죄 미스터리 영화 <써클>의 한 장면.

대배우 강수연이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에 백상예술대상이 열렸고, 신진 예술가의 수상 소감이 화제를 모았다. 병영 부조리를 다룬 <D.P.>로 TV 부문 남자조연상을 수상한 조현철이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보낸 메시지다. 그는 산업재해, 사회적 차별, 국가의 방임으로 죽어간 이름들을 거론하고 그들이 아직 여기에 있는 것을 느낀다며 “죽음이란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인 거잖아”라는 말을 남겼다. 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의 사진이 인쇄된 셔츠를 입은 채였다. 어쩌면 그의 의도와는 다른 해석일 수 있겠으나, 강수연의 부고에 ‘죽음이란 존재 양식의 변화일 뿐’이라는 그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위대한 예술가로, 동시대 여성의 대변자로, 많은 변화의 시초로 존재했던 사람. 영화를 사랑하여 언제고 예술가로서 존엄과 품위를 잃지 않았던 사람. 뛰어난 배포와 직업인의 성실함과 높은 동료 의식으로 회고되는 사람. 후대 영화인뿐 아니라 대중 역시 알게 모르게 그의 흔적과 함께 살 것이고, 그럼으로써 강수연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이숙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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