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바나, 여름, 페스티벌, 젊음, 패션
영원히 젊은 너바나의 사운드, 영원히 젊은 우리들의 여름.
WITH THE LIGHTS OUT, IT’S LESS DANGEROUS. HERE WE ARE NOW, ENTERTAIN US. I FEEL STUPID AND CONTAGIOUS. HERE WE ARE NOW, ENTERTAIN US.
2005년 여름 케이트 모스가 영국 서머싯 카운티의 워시팜에 나타났을 때 현대 패션 역사의 한 순간이 탄생했다. 그 전까지 이 우유 농장은 진흙으로 얼룩지고 땀과 비에 흠뻑 젖어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돌아다니는 록 마니아들의 성지였을 뿐이다. 당시 인기 정점에 달했던 모스는 헝클어진 머리에 금색 미니 드레스와 느슨하게 맨 스터드 벨트, 헌터 부츠 차림으로 손에는 종이컵과 담배를 들고 혼돈의 진흙탕에 등장했다. 시의적절하고도 스타일리시한 차림을 한 170cm의 생명체는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을 순식간에 글래머러스한 곳으로 바꿔놓았고, 당시 남자 친구였던 록 밴드 베이비솀블즈의 리더 피트 도허티는 룩을 완성하는 궁극의 액세서리 역할을 했다.
그 후로도 마이크로 쇼츠와 베스트, 늘어진 티셔츠와 빈티지 모피, 프린지 장식의 모카신 부츠 차림으로 페스티벌에 참석한 모습이 자주 포착되면서 글래스턴베리에 가는 여자들은 전부 그녀의 스타일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특히 모스가 직접 챙겨 간 웰링턴 부츠는 페스티벌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는데, 일기예보에서 비가 오지 않더라도 웰링턴 부츠를 가져가지 않으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미신이 퍼졌을 정도다.
2000년대 중반 케이트 모스와 함께 페스티벌 패션을 정의한 이는 당시 주드 로와 사귀며 ‘잇 걸’로 부상한 배우 시에나 밀러다. 사실 글래스턴베리에 패셔너블한 차림으로 등장한 것은 그녀가 먼저였다. 시에나 밀러는 2004년에 로맨틱한 티어드 미니스커트와 커다란 코인 장식 벨트, 미러 에비에이터 선글라스, 어그 부츠로 보헤미안 록 시크 룩을 연출해 페스티벌을 패션의 무대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뒤이어 알렉사 청이 브레통 셔츠, 슬로건 니트웨어, 블라우스 등 좀 더 산뜻한 버전을 제시하며 페스티벌의 여신으로 떠올랐는데, 헌터 부츠에 이어 바버 왁스 재킷을 페스티벌 패션의 머스트 해브로 만들었다. 바버의 글로벌 마케팅 겸 커머셜 디렉터 폴 윌킨슨(Paul Wilkinson)에 따르면 실제로도 꽤 실용적이다. “방수와 방풍 기능이 있어서 궂은 날씨에 적합하고, 큰 주머니가 많아서 밴드를 보며 춤출 때 물건을 보관하기에도 그만이죠.”
‘페스티벌 패션’이라는 개념은 세 인물과 함께 탄생했다. 뮤직 페스티벌의 기원은 1969년 우드스톡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야 ‘페스티벌 패션’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유는 뭘까?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은 지난 2020년 웹사이트에서 가상 전시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 아카이브>를 진행했다. 이 전시 기획에 참여한 연구원 해리엇 리드(Harriet Reed)는 1997년 BBC가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을 TV로 중계하면서부터 페스티벌 참가자들이 외모에 신경 쓰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 타블로이드 신문이 광적으로 모델과 배우, 연예인의 사생활을 보도하면서 그 자의식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고 설명했다. 소셜 미디어와 인플루언서가 부상하고, 패스트 패션이 셀럽의 스타일을 카피하는 속도는 더 빨라짐에 따라 ‘페스티벌 패션’이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가장 큰 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즌 컬렉션과 함께 패션 캘린더의 정규 스케줄 중 하나가 되었으니까요.” 그 후로 패션 브랜드와 리테일러는 5~8월 동안 페스티벌을 위한 아이템을 디자인하거나 스타일링 섹션을 매년 기획한다. 리드는 이렇게 덧붙였다. “패션 산업은 오디언스들이 음악보다 이벤트를 위해 옷을 차려입는 거대 마켓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페스티벌 패션의 씨가 뿌려지고 꽃봉오리를 틔운 곳이 글래스턴베리라면, 그 꽃이 만개해서 지독할 정도로 향기를 퍼트린 곳은 코첼라다.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 인디오에서 처음 열린 코첼라는 ‘자유로운 영혼의 힙스터 너바나’풍 페스티벌로 알려지며 20대 여배우와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 여성 보컬리스트, 패션 블로거를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사막지대로 불러 모았다. 바네사 허진스는 초기부터 거의 매년 참가해 코첼라의 여왕이라 불리며, 새로운 광맥으로 뛰어든 패션 산업 덕에 매년 점점 더 많은 인플루언서와 셀러브리티들이 코첼라로 모여들었다. 자의든 타의든 혹은 일타쌍피든 말이다. 코첼라가 더 대중화되고 상업화될수록 페스티벌 패션은 전통적인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이국적인 히피 룩을 향했다. 프린지와 태슬, 글래디에이터 샌들, 타이다이, 멕시칸풍 자수, 크로셰, 화관, 카프탄 등. “패션과 향수(노스탤지어)는 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코첼라 패션은 플라워 차일드 룩을 입고, 대초원의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한 경험을 낭만화한 로맨티시즘입니다. 그런지와 믹스된 히피 룩이죠.” 트렌드 정보 기업 WGSN의 시니어 에디터 아누프리트 부이(Anupreet Bhui)는 코첼라 참가자 대부분이 인스타그램과 틱톡 세대라는 점을 언급하며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정신보다는 겉모습에 치중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1969년 8월 뉴욕주 베델의 우유 농장에서 단 한 차례 열렸을 뿐이지만, 3일 동안 이어진 일회성 이벤트는 지금까지 페스티벌에 대한 모든 것을 정의하는 전형으로 남았다. 우드스톡에 참가한 히피족은 물질문명과 국가·사회제도에 반항해 사이키델릭 컬러와 친환경 수공예, 중고 의류를 선호하는 등 안티 패션을 추구했다. 여기에 이국적인 요소를 더한 것은 ‘히피 트레일’인데, 잭 케루악을 비롯한 비트 세대 작가와 비틀스에게 영감을 받은 젊은이들이 낡은 승합차를 타고 유럽에서 중동을 거쳐 아시아로 향하던 여행을 히피 트레일이라고 부르곤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터키, 파키스탄, 네팔, 인도 등지에서 가져온 전통 의복을 섞어 입으면서 독특하고 이국적인 미학이 더해진 것이다.
기원이야 어떻든 간에 페스티벌의 현실 도피적 분위기에 들뜬 참가자들은 좀 더 대담하게 에스닉 디테일을 시도했고, 코첼라는 문화적 전유라는 큰 비난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모델 알레산드라 앰브로시오가 착용한 북미 원주민의 깃털 헤드 드레스, 바네사 허진스가 이마에 붙인 인도의 빈디, 켄달 제너의 코걸이(인도의 전통 혼례에서 신부들이 착용하는 커다란 원형 코걸이)는 온라인과 소셜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결국 2015년 코첼라는 북미 원주민의 헤드 드레스 착용을 금지했다. 토착 문화 패션과 공예, 섬유 예술을 위한 비영리단체 ‘인디지너스 패션 아트(Indigenous Fashion Arts)’의 대표 세이지 폴(Sage Paul)은 강하게 지적했다. “페스티벌은 생생한 경험과 탐험을 위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탐험에 좀 더 창의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것을 훔쳐다가 창의적이라고 하는 건 게으른 짓이죠.”
페스티벌 패션은 진정성에서도 지적을 받아왔다. 셀러브리티에 대한 과도한 포커스, 패션 브랜드와 페스티벌 간의 협업과 계약은 어떤 페스티벌에 가든 모두 똑같이 정형화된 모습으로 돌아다니게 만들었기 때문. 사랑과 평화, 음악이 있는 우드스톡이 열린 지 20~30년 후에 태어난 밀레니얼과 Z세대가 히피 룩을 어떻게 알았을까? 수많은 브랜드와 리테일러가 정신은 삭제한 채 겉모습만 도용해 페스티벌 패션의 전형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패션 저널리스트 린 예거(Lynn Yaeger)는 이렇게 비판한 적 있다. “코첼라 참가자들이 선호하는 조합은 그들의 부모 혹은 조부모 세대가 우드스톡에서 입었던 옷차림을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재해석도 없이 이뤄진 복제를 보며, 이런 의문이 든다. 50여 년 전에 젊고 쿨하다고 여겨지던 옷이 반세기 만에 완전히 똑같은 역할을 하는 사례가 복식사에 있었던가?”
페스티벌 패션의 시조새 격인 알렉사 청은 더 이상 글래스턴베리에 가지 않는다. 원래는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소셜 미디어 때문에 잘 차려입어야 한다는 압박감만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페스티벌은 마음 놓고 친구들과 즐길 수 있는 장소여야 합니다.”
영향력이 극에 달하던 2018~2019년 이후, 코로나로 침체기를 겪은 뮤직 페스티벌은 2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페스티벌 참가자들은 여러 이슈를 목격하면서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고 스스로도 즐길 수 있는 페스티벌 패션을 정립해나가는 중이다. 지난 4월에 열린 코첼라에서 시드니 스위니는 아일릿 점프수트로 사랑스러운 코티지 코어를 연출했고, 오버사이즈 가죽 재킷과 데님 팬츠를 입은 헤일리 비버는 1990년대 래퍼 같은 모습이었다. 빨간색으로 깔 맞춤한 엠마 체임벌린의 크롭트 톱과 밀리터리풍 미니스커트, 찰리 다멜리오의 타이트한 형광색 나비 무늬 미니 드레스는 지극히 Z세대다웠다. 인플루언서 겸 디자이너 애니 빙의 레이스 브라 톱은 뉴욕의 미슐랭 레스토랑이나 사교 모임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지만, 코첼라에서 큰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물론 켄달 제너 덕이다). “클리셰에서 좀 더 쿨하고 차별화된 뭔가로 변화했습니다. 페스티벌 컬렉션은 젊은 세대를 위한 새로운 리조트 컬렉션이 되었죠.”
페스티벌에 가기 위해 짐을 꾸릴 때, 우드스톡의 패션이 아니라 정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정해진 규칙이나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것 말고, 나 자신의 자유에 집중하는 것 말이다. 화보의 모델들처럼 시원한 오렌지색 버킷 햇, 물에 젖어도 괜찮은 수영복과 크록스, 카고 팬츠 같은 실용적인 아이템을 챙기는 건 기본이다. 풍성한 모피 장식 미니 드레스로 파티 기분을 내거나 가죽 바지와 미니스커트를 입고 막 공연을 마친 로커처럼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있을 거다. 한여름 더위를 피하기에 하와이안 셔츠보다 좋은 건 없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여름 패션 이벤트인 페스티벌이 다시 돌아왔다. 가장 좋은 페스티벌 패션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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