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반열에 오른 김프(Gimp) 스타일
지난달 뉴욕 증권거래소(NYSE)에서 열린 발렌시아가의 2023 스프링 컬렉션. <보그 코리아>도 직접 현장을 방문해 취재했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 뱅크 오브 아메리카, 월트 디즈니, 모건 스탠리, 트위터 주식의 모니터를 배경으로 얼굴에 라텍스 마스크를 뒤집어쓴 모델들이 걸어 나왔습니다. 마스크의 눈과 코, 입에는 정말 ‘숨만’ 쉴 수 있는 미세한 구멍이 뚫려 있어 모델들의 얼굴을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은 기본, 여기에 선글라스까지 더했죠.
이 특징적인 라텍스 마스크는 ‘김프(Gimp)’라고도 불립니다. 역사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펄프 픽션>(1994)에 나온 캐릭터 ‘The Gimp’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배우 스티븐 히버트가 연기한 이 캐릭터는 브루스 윌리스와 빙 라메스가 납치되었을 때 등장한 성 노예입니다. 전신엔 가죽옷, 입에 달린 지퍼, 주요 부위를 튼튼한 메탈 스트랩과 벨트로 무장한 이 캐릭터는 이후 BDSM 스타일의 패션을 설명하는 데 종종 쓰이곤 했죠.
사실 발렌시아가가 전신 마스크를 패션에 차용한 건 이번 런웨이가 처음이 아닙니다. 킴 카다시안이 지난해 전남편 카니예 웨스트의 <Donda> 콘서트에서 입어 화제가 된 올 블랙 타이츠 룩 또한 발렌시아가의 솜씨였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인 킴 카다시안에게 익명성이라는 개념을 내포하는 전신 타이츠를 입혀서 세간의 이목을 끌다니. 발렌시아가의 수장 뎀나 바잘리아의 탁월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가 돋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발렌시아가 말고도 이 BDSM 패션을 선보인 디자이너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전방위 아티스트이자 런던 클럽 신을 이끌던 퍼포머, 디자이너 리 보워리(Leigh Bowery)입니다. 영국의 유명 화가 루시안 프로이트의 모델로도 이름을 알린 리 보워리는 김프 마스크와 치켜올린 포니테일, 플랫폼 힐을 직접 신고 대중 앞에 나섰습니다.
영국의 신예 리차드 퀸 또한 초창기 모델들에게 마스크를 씌워 주목받았죠. 같은 영국 출신이라 리 보워리에게 영감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은 그는 아티스트 폴 해리스(Paul Harris)에게서 영감을 가져왔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나이지리아 출신 디자이너 모왈롤라 오군레시(Mowalola Ogunlesi)가 얼마 전 파리에서 선보인 런웨이 쇼에서도 이런 마스크가 등장했습니다. 세인트 센트럴 마틴 출신으로 카니예 웨스트가 참여한 이지 갭(Yeezy Gap)의 디자인 디렉터로도 활동한 그녀의 쇼는 단연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김프 마스크는 물론 남녀 모델의 니플을 그대로 노출하며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시선과 편견을 정면으로 드러냈죠. 스타일리스트는 로타 볼코바, 메이크업은 잉에 그로나드(Inge Grognard)가 맡았습니다.
다시 2022년 김프 패션을 선보인 발렌시아가로 돌아갑니다. 뎀나 바잘리아는 패션을 점차 메시지를 전달하는 급진적인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며(전 시즌 눈보라를 뚫고 우크라이나 난민에 대한 강력한 연대의 목소리를 낸 쇼가 예), 그 접근은 현시대의 문법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2023 스프링 컬렉션을 통해 전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뉴욕 증권거래소, 양복을 입은 최상위 엘리트층이 점거한 공간에서 고고한 꾸뛰르 쇼가 아니라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스타일을 보란 듯이 선보인 거죠.
그것도 최대 규모의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와 협업 컬렉션을 처음 발표하는 자리에서 그 누가 모델 63명이 라텍스 보디수트를 입고 나올 거라고 예상했을까요. “우리는 무섭고 위협적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패션은 이를 반영한다고 생각하죠.” 뎀나의 파트너이자 뮤지션 로익 고메즈(BFRND)가 담당한 테크노풍 쇼 음악은 마치 자본주의의 아포칼립스를 연상케 했습니다.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쇼를 연 때를 기점으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경기가 침체되고 주식은 ‘녹아버렸으니(Melt-down)’, 뎀나를 이 시대의 진정한 예언자라고 봐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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