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요한·김성규·김향기의 히어로
우리 역사의 히어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명량>의 헌사는 <한산: 용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그 주역인 변요한, 김성규, 김향기는 자기만의 히어로로 성장하는 중이다.
변동성 없는 고정 금리, 변요한
변요한의 눈빛 연기에 값을 매긴다면, 그건 늘 수익률을 바꾸는 변동성 금리라고 생각했다. <자산어보>에서 유배된 정약전(설경구)의 동료이자 제자가 되어준 ‘창대’의 눈빛을 나는 지난 몇 년간 스크린을 장악한 가장 증폭이 큰 눈빛으로 기억한다. 변요한이라는 걸출한 배우의 폭발력을 단박에 알려준 <소셜포비아>(2014)와 드라마 <미생> 에서의 불안정한 청춘의 시선을 만들어내다가도,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같은 멜로에서 스토리텔링을 전환하는가 하면, 이제는 보이스 피싱으로 와해된 가족을 위해 분투하는 서준의 액션에 절박한 시선을 더해준다. 이 떨리는 시선을 활용한 ‘눈빛 액션’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변요한만 가진 고유의 성질이다.
변요한이라는 창을 통해 매번 다른 작품과 캐릭터를 만나면서도, 그의 캐릭터가 일견 연결되는 지점은 이렇게 마음의 요동을 감추지 못하는, 변화무쌍한 눈빛 연기에 달려 있지 싶었다. 다시 변요한의 신작 <한산: 용의 출현>을 검토해본다면, 어쩌면 이번만큼은 180도 달라진 지점에서 강렬한 그의 시선을 마주할 차례다. 변동성 없는 고정 금리로 전해주는, 변요한이 창출하는 수익성은 어느 정도일까. 1592년 여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 이순신 장군이 진두지휘한 승리의 해전 한산대첩. 변요한이 연기하는 왜군 수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조선 최고의 장수 이순신에 맞서, 승전고를 울리기 위해 단 한 순간도 주저하거나 흔들려서는 안 되는, 직진형 캐릭터다. 한산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이순신의 승전인 3대 대첩의 하나로, 오랜 전쟁으로 수세에 몰린 조선의 운명을 일거에 바꾼, 역사상 기록적인 승리의 서사이자, 후세가 온전히 기록하고 또 조명해도 차고 모자람이 없는 통쾌한 역사다. 한산대첩의 5년 후를 그린 <명량>에서 연륜과 지혜를 가진 장수 이순신(최민식)은 <한산: 용의 출현>에서 박해일의 연기로, 연령대가 어려지고, 패기와 통찰력, 혈기 왕성한 장군의 기세를 선보인다. 변요한이 대적할 적수다. 와키자카는 조선 수군에 밀리던 왜군을 일으킬 카드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급파한 장수였다.
장수와 장수의 대적! 기세와 기세의 격돌! 한창때의 이순신에 맞서자면 역시 상당한 기세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이 ‘쎈’ 힘의 표현이 자칫 평범한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의 빌런으로 소모되지 않도록 변요한은 그간 연기해온 캐릭터의 풍성한 작법을 대입하고, 거기서 출발해 우리가 변요한에게서 보지 못한 낯선 이미지를 감행한다. “단순히 맞서는 적으로서만 대한다면, 이 인물의 보폭이 너무 좁아질 것 같았어요. 캐릭터가 가진 입체적인 지점을 찾아내는 작업에 매달린 거죠.” 변요한은 그 해답을 “와키자카 역시 하나의 인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인물을 연기한다면, 이 역할을 돌아보고 이 사람의 장점을 찾아야 해요. 늘 그 순서를 거치는 거죠.” 서적을 찾고, 검색하고, 실제 인물이 행한 당시의 기록을 그러모았다. 김한민 감독과 상의하고, 박해일 배우와도 합을 맞췄다. 장수로서 전성기, 전투하던 시기의 불같은 뜨거움, 그 ‘욕망’의 심리가 바로 변요한이 당시 실존했던 인물, 와키자카와 접속해 풀어나가야 할 숙제였다. “배우인 저 자신에 와키자카가 가진 욕망의 크기를 대입해봤어요. 신인상을 받다가 이제 막 남우주연상까지 거론될 수 있을 정도로, 역량을 확장하는 시기라고 할까요.” 그렇게 자신감과 열정이 팽배하던 젊은 장수의 마음을 안고 변요한은 매일 촬영 현장이라는 전지로 나섰다.
이순신에게 승전을 가져다준 기록적 시간은 바꾸어 말하면 대적한 상대편에게는 ‘치욕의 날’이다. 학의 모양으로 펼쳐진 조선 수군이 적선 73척 중 59척을 격침하고, 왜군을 수장시킨 그 전투는 이미 사료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한산: 용의 출현>은 시치미 뚝 떼고, 영화의 70% 이상을 망망대해 전투 장면으로 채워, 관객 어느 하나도 단 한 순간도 승리를 섣불리 장담하지 못할 만큼의 긴장을, 스크린 안에 펼쳐질 현재성을 끌어내는 데 몰입한다. 그것이 <명량>에 이은 프리퀄을 준비한 김한민 감독의 진두지휘 아래 펼쳐질, 그리고 와키자카를 연기한 변요한이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연기로 ‘통솔’할 이 영화의 현장이었다. “와키자카의 배에 수십 명의 병사가 함께했죠. 그런데 이 친구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냐면, 촬영이 진행될수록 어느 순간 내가 진짜 이들을 수하에 두고 진두지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힘든 가운데도, 실제를 방불케 하는 에너지로 변요한은 덕분에 매 전투 신을 ‘진짜 전투하는 기분’으로 찍었다고 말한다. “감독님의 준비성이 워낙 철저했어요. 특히 이 영화에 꼭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 VFX(시각 효과) 같은 것들을 우리가 마치 연구자가 된 것처럼 촬영 현장 들어가기 전에 수차례 액티비티 리딩을 했어요. 모든 동선, 시선, 대사를 실전에 앞서 최대한 실전처럼 수차례 맞춰보는 거죠.” 그렇게 <명량>이 무에서 시작해 도달한 성과라면, <명량>의 그 성과는 다시 <한산: 용의 출현>을 더 발전시킬 일종의 시뮬레이션이 되어주었다.
이 심리적 무장에 덧붙이자면, <한산: 용의 출현>은 당연히 몸이 치러내야 할 과제 역시 만만치 않은 현장이었다. 와키자카가 되어 전투 장면을 찍으려면, 25kg에 달하는 갑옷과 투구를 입는 것부터 과제였다. 한여름 촬영 내내, 두통과 싸우며 짓눌리는 투구의 무게를 견뎌야 한단 말이었다. “해외에서 특수 제작한 갑옷이 와서 피팅했는데, 이게 제 몸에 큰 거예요. ‘제가 증명하겠습니다’ 하고 그날부터 벌크업에 총력을 다했어요.” 변요한은 매일 차돌박이와 물만 먹으면서 87kg까지 체중을 증량했다. “살이 찌니 목도 두꺼워져요. 갑옷 안에 땀 흡수를 위해 기능성 레깅스를 입었는데, 이게 틈이 없을 정도로 갑옷하고 붙더라고요.” 변요한은 그렇게 ‘커진 몸’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몸에 근육이 생기면서 마음도 달라지고, 달리기도 빨라지고, 힘도 좋아졌어요. 진짜 장군이 된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죠.”
그 와중에도 와키자카의 일본어 대사를 마스터하는 것 역시 변요한을 한시도 놓아주지 않는 또 하나의 전투, 싸움에서 지지 않을 과제였다. 목표와 전략과 해법이 필요했다. 김한민 감독은 “일본인이 들어도 이물감 없이 들을 수 있는 수준”을 요구했고 변요한은 곧이곧대로 과제를 수행했다. “제가 일본어를 모른다는 게 다행이었어요(웃음).” 말 그대로 무에서 시작해 유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무데뽀로 외웠어요. 아이들이 언어 배울 때 그대로 흡수하고 따라 하는 것처럼.” 쉽게 말하지만, 일본어 선생님을 집에 모셔 숙식을 부탁할 정도로 그는 절박했다. “선생님이 너무 칭찬을 해주시긴 하는데, 과연…”
1,761만 관객이 지켜본, 한국 영화 스펙트럼의 능선을 넘은 전작이 있기에 모인 기대는, 바꾸어 말하면 그 1,761만 관객의 심정적 외면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도 함께 내재하고 있다. 전작의 성취를 불러올 흥미로운 도전이자, 그 프로젝트에 승선한다는 건 배우의 역량을 확인시켜주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껏 변요한이 가진 포부와 자신감, 노하우를 ‘벌크업’한 치열한 지금의 전투에서, 변요한의 연기는 또 한 번 후퇴를 모르고 전진하리라 믿는다.
새로운 K-얼굴, 김성규
K-콘텐츠의 현재를 대표하는 얼굴에서 김성규의 얼굴을 떠올리는 건 쉬운 일이다. <범죄도시>에서 ‘빌런’ 윤계상의 패거리, 흑룡파 막내 ‘양태’로 얼굴을 비친 그는 속편에는 합류하지 않았지만, 기획자 마동석 배우의 말로 이 시리즈가 8편까지 간다면, 그 언젠가 빌런들의 ‘어셈블’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강해상(손석구) 수하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한 상상이다. 좀비물을 한국 콘텐츠가 접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반향을 일으킨 <킹덤> 시리즈에서 김성규는 당연히 ‘양태’와는 180도 달라진, 좀비 잡는 전투력 넘치는 영신으로 달리고 싸웠다.
<악인전>(2019)은 무려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에 초청됐다. 맞다. <부산행>과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올해 <헌트>까지 초청되어, 기립 박수를 받은, 이제는 한국 장르 영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발판이 된, 바로 그 섹션이다. 김성규 생애 첫 칸 진출이다. “어리둥절했다고 할까요. 그런 기회가 올 거라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거든요. 다시 간다면 조금 더 준비를,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야 한다고 해야 할까(웃음).” 글쎄, 김성규에게 레드 카펫을 충분히 준비할 시간이 주어질까? 그러기에는 주목받는 K-콘텐츠가 너무 많고, 하나같이 그들 모두가 앞다투어 ‘지금’ 이 배우를 필요로 한다. 당장 어떤 기회가 주어질지 모를 일이다. 김성규 자신도 지금이 ‘욕심내야 할 때’라는 걸 잘 안다.
많은 배우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된 <한산: 용의 출현>의 캐스팅도 지금 김성규라는 배우를 향한 관심의 척도를 입증해주는 예다. 그럼에도 김성규는 연출자 김한민 감독과 만났을 때, 이 거대한 톱 프로젝트라는 ‘배’에 승선하는 흥미로움보다 중압감이 컸다고 말한다. “정말 하고 싶은 역할이었죠. 감독님이 처음 하신 말씀이 기억이 안 날 정도더라고요. 그만큼 긴장이 심했어요(웃음).” 비단 물량에서 오는 부담만이 아니었다. <한산: 용의 출현>에서 그가 연기하는 항왜 군사 ‘준사’는 그만큼 선뜻 다가가기까지 허들이 높은 복잡한 인물이었다. 준사는 적군인 왜군 병사임에도, 이순신(박해일)의 기개와 충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변화하는 인물이다. 즉 이순신과 와키자카(변요한), 각 나라를 대표하며 대치하는 두 걸출한 장군을 오가다가, 결국 목숨을 걸고 정보와 작전을 빼내는 스파이. 자신의 조국, 왜군 입장에서 볼 때 적군을 위해 일하는 역적이다. “속을 알 수 없는, 내내 고민하고 갈등하는 불안한, 흔들림을 표현해야 하는 인물이었어요. 다른 배우들처럼 어느 한쪽으로 확실히 가면 소속감이 생겼을텐데. 외로웠죠(웃음).”
같은 사극 무대지만, <킹덤>의 영신이 판타지를 바탕으로 장르적 쾌감을 불러오는 역할이었다면, 이번엔 실제 조선의 역사를 바탕으로 실존했던 인물을 연기하기에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죠. 가공해야 하지만, <킹덤>처럼 맘 놓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계산 과정이 필요했어요.”
이것저것 복잡한 생각 대신 김성규는 곧바로 ‘머리를 미는’ 과정을 택했다. 왜군 준사의 외형을 갖추기 위해서다. “빨리 밀고 빨리 놀자 이런 마음이었죠(웃음).” 전체 민머리를 하고, 주변부로 가발을 붙이는 변발 같은 왜군 특유의 스타일을 위해서다. “헤어스타일을 먼저 바꾸고 나니 이후부터 많은 게 풀렸어요. 캐릭터를 내가 조금 더 빨리 입는다고 할까. 의상을 입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불편해도 배우들에겐 이런 외형의 변화가 그 인물에게 근접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돼요.” 최대한 체중을 감량하는 것, 바로 고된 전장을 경험하는 준사의 외형을 만드는 것 역시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김성규 스스로 설정한 과제였다. “제가 요즘 자전거에 빠져 있기도 해서요. 촬영이 있던 부산 현장에 자전거를 갖고 갔어요. 촬영이 없을 때는 정말 매일 탔어요. 원래 그렇게 근육질은 아니지만(웃음), 최대한 빼보자, 감량을 많이 했죠.”
외적 과제가 끝이 아니었다. 이젠 언어 마스터라는 숙제가 기다렸다. 상기시켜드리자면, 그는 어디까지나 일본어를 모국어로 쓰는 ‘왜군’이다. 마음이 바뀔 뿐, 사용하는 언어가 변하지는 않는다. 일본어 대사를 마스터해야 했다. 그것도 감쪽같이 잘. 특히 전작에서 일본 배우 오타니 료헤이가 연기한 만큼 대사의 완성도 수준은 더 높아진다. “일본어를 정말이지 완벽하게 하면서, 한국어는 어눌하게 하는 설정이죠. 그런데 감독님이 그 어눌함이 정확히 뜻은 전달되는 어눌함이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언어 역시 준사의 마음처럼 두 가지 모두를 잡아야 했다. “일본어 선생님이 현장에 상주하셨고, 그분 도움으로 정말 상황에 맞게 대사 하나하나 톤을 잡아나갔어요.” 전편 <명량>보다 해전 표현의 기술력뿐 아니라 이물감 없는 자연스러운 외국어 표현도 관객을 극에 몰입하게 해줄 요소라는 점에서 김성규가 해야 할 몫은 확실했다. “다행히 일본어 선생님은 칭찬을 많이 해주셨는데, 그분이야 제 능력을 끌어내려 그러셨을 수 있고요. 제발 보시는 분들이 거슬리지 않게 잘 전달되기를, 지금은 그걸 빌어보는 수밖에요(웃음).”
한국에서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이 나온다면 이순신은 그 맨 위 단에서 고려될 인물이다. <명량>이 1,761만 명이라는 기록적인 관객으로 그 당위성을 입증했다면, 혈기 왕성한 그의 젊은 시절을 그린 <명량>의 프리퀄, <한산:용의 출현>은 또 다른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줄 콘텐츠로 분명 그 역할을 할 것이다. 그건 어떤 이유로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과 보는 이들의 무의식에 잠재된 욕망이다. 이순신의 성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신념의 변화를 일으키는, 변화하는 왜군 준사의 마음은 그래서, 이 영화의 무수한 캐릭터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플롯을 만들어낼 역할이다. 앞서 작품을 통해 그가 보여준 모든 스킬과 노하우를 더 강하게 밀어붙일 타이밍이다. “촬영이 없을 때 카페에 갔는데, 정자세로 앉아 계신 분이 있는거예요. 뒷모습부터 남달랐어요. 다시 보니 박해일 선배였어요. 저를 보시더니,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힘내, 잘하고 있어’ 하시더라고요. 많은 말도 아니었어요. 그 한마디에 힘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김성규는 연기자로 좀체 경험하기 쉽지 않은, 거대한 프로젝트에서 제대로 하나의 역할을 한다는 부담이 그 순간, 정말이지 많이 해소되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모두에게 전해준 에너지가 그런 형태가 아니었을까요(웃음).”
성장의 완벽한 예, 김향기
“<명량>을 본 게 초등학교 때였어요. 엄마랑 같이 극장에 갔는데, 관객이 꽉 차 있었어요. 그 열기가 아직도 기억나요.” 돌이켜 김향기에게 <명량>은 당시 어렸지만, 이미 배우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현장 경험을 쌓아온 김향기에게조차도 카메라 뒤편의 촬영 과정을 궁금하게 만드는 톱 프로젝트였다.
“전 이미 그때도 촬영 현장을 여러 차례 경험한 배우였으니까요. 저 액션 신에서는 어떻게 카메라가 회전하겠구나, 저 현장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체험을 할까, 그런 게 몸으로 막 궁금해지는 거예요. 한번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역할을 꼭 해야겠다는 것과는 다른 욕심이었죠.” 어린 김향기가 많은 현장을 통과하며 성인이 되는 동안, 8년의 시간이 지났다. <명량>은 그 사이 속편 제작에 착수했고, 김향기에게도 어렴풋이 바라던 그 기회가 주어졌다. “좀 의외였어요. 관객도 의외라고 생각하실 텐데, 저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캐스팅이에요(웃음). 그렇지만 이순신 장군의 젊은 시절 모습으로 가면서 모든 캐릭터의 연령대가 낮아졌으니까, 저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죠.”
김향기는 전설적인 학익진 전투가 하이라이트가 될 액션 장면이 영화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전투를 뒷받침할 ‘드라마’가 전개되는 물길을 터주는 역이다. 특히 극 전체가 남자 배우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유일한 여성 캐릭터의 지분을 차지하는 역할이다. 전편 <명량>에서 정씨 부인을 연기한 배우 이정현이 만들어낸, 전장에 남편을 보내는 애끓는 고통의 감정, 그 전사를 만드는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명량>의 정씨 부인이 왜 목소리를 잃었을까, 처음엔 저도 그걸 많이 고민했어요. 정보름이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정씨 부인이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현재의 정보름에게는 그건 미래의 일이고, <명량>보다 앞선 시기를 그린, 인물들의 젊은 시절인 <한산: 용의 출현>의 시점에서 보자면 알 수 없는 미래잖아요. 그 지점에서 제가 연기해야 할 인물의 톤을 정리했어요.”
김향기는 데뷔작 <마음이>를 시작으로 <신과 함께> 시리즈 같은 블록버스터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그 눈길을 대작에만 쏟지 않았다. <증인> 같은 소수자를 다룬 의미 있는 중급 영화가 만들어지는 한편, <눈길>이나 <영주> 같은 신진 감독들이 연출하는 좋은 독립영화가 한꺼번에 제작되는 한국 영화의 물적·질적 다변화와 함께 자신의 커리어를 개발하고 성장시킨 가장 좋은 예의 배우다. 반대로 김향기가 어린 시절부터 쌓은 연기 노하우와 “어리지만 되레 한 수 배웠다”고 선배들이 말하는 타고난 재능으로 이들 작품의 결과 향상에 힘을 보탠 예이기도 하다. 꾸준하고 다채롭고, 배우의 의지가 보이는 집요한 필모그래피다. 그런 의미에서 누적 관객 5,000만이라는 기록할 만한 스코어를 보유한 이 배우의 다채로운 행보에 나는 언제든 사력을 다해 박수 쳐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나 역시 앞서 김향기가 ‘의외의 캐스팅’이라고 한 말에 의견을 보태본다. 무엇보다 이미지의 변화. 짙은 메이크업과 기녀 복장으로 왜군 와키자카에게 접근해 적의 기밀을 캐내는 ‘첩자 정보름’이 가진 사뭇 저돌적인 에너지는 분명 김향기에게 처음 보게 될 낯선 이미지였다. 강렬한 한편, 결과를 확신하기 힘든 베팅인 것도 사실이다. “전문가들이 제 점을 찾아주셨어요(웃음).” 파격적인 역할에 대한 도전의 부담과 재미에 대한 내 질문의 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김향기가 꺼내놓은 화두는 ‘점’이었다. “여기 제가 점이 있거든요.” 말을 하면서 오른쪽 입 아래를 콕 집어 가리키는데, 거기 정말 조그맣게, 지금까지 그녀를 만나면서 한 번도 인지하지 못한 작은 점이 고개를 내밀었다. “분장하시는 분들이 제 얼굴을 관찰하시더니, 이걸 더 과장되게 끌어주셨어요. 그 전까지 전 항상 점을 가리는 메이크업을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정보름의 캐릭터에 맞게 되레 더 강조한 거예요.”
김향기는 그 점이, 또 그 자신의 ‘점’이 사뭇 흥미로웠다고 한다. ‘“아직은 좀 어리기도 하고, 강렬한 컬러를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울까?’ 부담이 컸는데, 이렇게 새로운 모습을 외부가 아닌 내 안에서 찾아 표현하게 되면서 그때부터 꽤 자신감을 얻었어요. 앞으로 저의 이런 부분을 좀 더 찾아내 활용해볼까 싶어요(웃음).” 그렇게 <한산: 용의 출현>은 관객에 앞서, 김향기 본인에게 또 하나의 발견을 준 도전이다. “돌이켜보면 드라마 <여왕의 교실>(2013)을 하면서 내가 이전에 연기하던 것과는 스스로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유도 모르게 불안하기도 하고,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하게 되고.” 즐거운 마음으로 놀러 가던 현장이 그때부터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때가 김향기 스스로가 ‘심정적으로는’ 자신을 책임질 ‘성인’ 배우의 길로 접어든 때가 아니었을까. “활동을 오래 하는 동안 저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으니, 이미지를 바꿀 강렬한 역할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한동안 했어요.” 김한민 감독과의 만남은 이런 생각을 좀 더 직접적으로 발전시켰다.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대중이 사랑하고 봐오던 제 모습을 조금 달리하면, 새롭게 받아들일 여지가 더 커질 수 있을 거라고.”
그러고 보니 김향기가 이 일에 발을 들인 게 세 살 때다. 벌써 19년 전 잡지 모델로 카메라 앞에 섰고 여섯 살 때 이미 개와 어린이의 우정을 그리며 눈물샘을 터뜨린 <마음이>로 스타덤에 올랐다. 작품 한 편에 당당히 자신의 캐릭터와 영역을 확실히 가져간 경력 20년 차의 배우. 오랫동안 ‘아역’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두기엔 넘치는 재능과 경력으로 지금까지 김향기는 차근차근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왔다. 그렇게 정보름이라는 캐릭터 역시 현재의 자리에서 김향기의 좌표를 확인하는 도전이고, 이제 그 반응을 지켜볼 일만 남았다.
홍보 일정으로 바쁜 가운데 요즘 김향기는 ‘홈트’에 빠졌다. “사실 그동안 연기를 잘하려면 정신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가만히 잘 쉬면 충전되고, 근육이 생길 줄 알았어요(웃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홈트도 하고 강아지와 산책도 하고, 최대한 하루를 균형 있게 보내려 노력한다. 오래 건강하게 연기를 하기 위해서란다. “생각해보니 제가 아직 스물세 살밖에 안 됐더라고요(웃음). 지금까지 정말 많이 했고,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가끔 불안하기도 해서 많은 걸 한꺼번에 바꿔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요즘은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걸 차근차근 하나씩 하자 해요. 전 아주 오래, 길게 연기할 거니까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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