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장 주목해야 할 배우, 제시 버클리의 이상한 여자 컬렉션
이제는 이름을 기억할 때도 됐다. <멘>과 <로스트 도터>의 제시 버클리는 최근 5년간 영화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커리어를 쌓은 배우다.
작은 수입 영화의 설 자리가 적은 한국에서 그는 아직 낯선 배우다. 하지만 한번 보면 그 남다른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제시 버클리의 대표작은 판타지, 여성주의, 그로테스크함으로 요약된다. 지적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신선한 작품이지만 대본으로 봤을 때는 애매했을 영화가 대부분이다. 이런 영화에 연달아 출연한 건 안목과 모험심이 맞물린 결과일 것이다.
제시 버클리에겐 유독 기묘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강한 자아를 가진 캐릭터가 자주 주어진다. 그 스스로도 “말하자면 벌레를 먹은 것 같은 여자들을 연기하는 게 재미있어요”라고 한다. 그의 자연스러운 외모, 똑똑하고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분위기, 은은하게 몸에 밴 냉소는 이런 캐릭터에 놀라운 실재감을 부여한다. 이 때문에 몇몇 작품에서는 1980~1990년대 코엔 형제 영화의 프랜시스 맥도먼드나 홀리 헌터가 연상되기도 한다.
제시 버클리는 1989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노래, 하프, 피아노를 배웠다. 한 인터뷰에서 “아무도 내 연주를 못 듣기를 바랐죠. 그래서 새벽 6시에 일어나 피아노 연습을 했어요. 그러다가 학교에서 열리는 큰 공연에 참가했는데 모두가 저를 쳐다보더라고요. (생각보다) 괜찮았어요”라고 밝힌 적 있다. 성인이 된 그는 드라마 스쿨에서 정식으로 연기를 배우기 위해 런던으로 갔지만 두 군데서 합격을 거부당했다. 그러다 2008년 BBC One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I’d Do Anything>에 출연했다. 뮤지컬 오디션인 만큼 참가자들의 절실함을 끌어내는 연출이 많았고, 그는 진한 무대 화장을 해서 개성을 엿보기 어려웠다. 그 대회에서 제시 버클리는 우승은 차지하지 못하고 최종 2위에 그쳤다. 다만 웨스트엔드의 거물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그의 깊고 다채로운 감정을 알아보고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지금 돌아보면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안목이 대단하다 싶다. 방송 출연 후에도 제시 버클리는 2년 동안 일이 없어서 재즈 클럽에서 연주를 하고, 시장에서 시리얼을 팔고, 옷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배우로서 첫 메이저 작품은 BBC 미니 시리즈 <전쟁과 평화>(2016)였다. 주인공은 폴 다노, 제임스 노턴, 릴리 제임스였고, 제시 버클리는 수수한 외모에 막강한 재력을 가진 공작 가문의 딸 마리아 볼콘스카야를 연기했다. 2019년에는 걸작 미드 <체르노빌>에 출연했다. 두 작품 다 스케일과 작품성으로 주목받았지만 제시 버클리의 배역은 크지 않았다. 그가 여성주의 판타지 스릴러의 아이콘으로 등극한 것은 영화 <비스트>(2017)부터다. 이 작품으로 제시 버클리는 영국 독립영화상 신인상, 런던 비평가협회 올해의 영국/아일랜드 배우상을 탔다. 그리고 이 환상적인 필모그래피가 시작되었다.
비스트 | 2017 | 몰 역
몰은 어릴 때 자기를 왕따시키는 동급생의 얼굴을 가위로 찌르고 퇴학당한 전력이 있다. 현재 몰과 어머니의 관계는 사람을 물어서 우리에 갇힌 짐승과 엄한 조련사 같다. 어머니의 억압, 이웃들의 은근한 질시 속에 위축된 채 살아가던 몰은 어느 날 데이트 폭력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때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남자 파스칼(자니 플린)이 사냥총을 들고 나타나 몰을 구해준다. 그 무렵 마을에서는 강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파스칼이 범인으로 의심받는다. 몰은 파스칼의 알리바이까지 만들어주며 그의 편을 들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몰은 단지 사랑을 원했을 뿐인데 어디서도 그것을 구하지 못하고, 영화는 압도적 파국으로 치닫는다. 제목이 말하는 ‘괴물’은 누구인가, 그것은 처음부터 거기 존재했는가, 타인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생각해보는 재미가 있다. 제시 버클리의 연기가 서늘한 여운을 남긴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 | 2020 | 젊은 여자 역
여자는 새로 사귄 남자 친구에게 확신을 갖지 못한 채 그의 가족이 사는 외딴 농장으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의 부모는 어딘가 기이하다. 초반부터 소품의 불연속, 부조리한 대화 등으로 평범한 드라마가 아닐 거라는 걸 예고하던 영화는 여자가 남자의 어린 시절 물건들을 발견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꿈을 꾸는 듯한 혼란에 빠져든다. 커플은 농장을 나가 도시로 돌아가려 하지만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이야기가 미로를 헤맨다. 찰리 카우프만 감독의 이 몽환적이고 쓸쓸하고 시적인 영화를, 많은 이들이 노인이 된 남자의 상상으로 해석한다. 상상이기 때문에 배경의 디테일이 부재하고, 그것을 폭설로 표현한 것이다. 어찌 보면 뻔한 상상이고 해석인데 제시 버클리의 캐릭터가 여기 특별함을 더한다. 똑똑하고 자기주장 강하고 까칠한 그는 영화나 드라마가 그리는 흔한 여자 친구의 상이 아니다. 어째서 이런 인물이 남자의 상상에 존재하는가. ‘나는 자기 세계가 뚜렷하고 지적이면서 전형적으로 예쁘지는 않은 여자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와 교감하고 그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특별한 남자’이며 ‘그 여자와의 사랑(사실은 그녀의 내조와 희생)에 힘입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인물’이라는, 흔해빠진 예술가나 학자 지망생 남성들의 착각을 애잔하게 묘사한 것이다. 한심한 남주에게는 짜증 나고, 그런 지질한 남자를 제대로 묘사한 영화에는 통쾌감을 느낀다.
로스트 도터 | 2021 | 젊은 시절 레다 역
젊은 레다는 문학 연구와 두 아이 육아를 병행한다. 남편과는 대체로 사이가 좋지만 육아는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집에서 ‘제발 몇 시간만 집중하게 해달라’고 애들을 어르고 달래며 논문을 쓰는 레다와 다른 도시 발령에도 주저하지 않는 남편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사회적 차별이 만들어낸 차이다. 레다는 점점 히스테릭해진다. 아이들이 인형을 갖고 싸우면 빼앗아서 창밖으로 집어던져버리는 식이다. 가정에 구속되어 일도 자아도 놓아버릴 지경이 된 레다는 우연히 만난 여행자들로부터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을 받자 자기 연구를 취미 활동처럼 낮춰 말한다. 그 여행자들이 아이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에 레다는 충격을 받는다. 그러다 학계에서 인정받고 모처럼의 사회 활동 중 여자로서도 관심을 받게 되자 레다는 평생 회한으로 남을 모진 결심을 한다. 남편은 울고 매달리면서도 아이들을 인질로 이용하고 “네가 떠나면 아이들을 너희 엄마한테 보내버리겠다”며 양육 책임을 회피한다. 그런 남편에게 제시 버클리가 지어 보이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 공감을 자아낸다.
멘 | 2022 | 하퍼 역
<유전>, <미드소마>를 제작한 A24의 최신판 여성주의 공포 걸작이다. 주인공 하퍼는 남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가 폭행을 당한다. 집에서 쫓겨난 남편은 창문으로 침입하려다 떨어져서 비참한 꼴로 죽는다. 하퍼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골 저택으로 요양을 간다. 그런데 집주인이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다. 집 구경을 핑계로 불필요한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그를 간신히 내보냈지만 불편한 남자들은 계속 나타난다. 몇몇 남자는 죽은 남편이 그랬듯 하퍼의 공간을 침범하려 든다. 하퍼는 계속 그들을 경계 밖으로 몰아내려 애쓰지만 다른 남자들은 그런 노력을 비웃거나 포기시키려 든다. 직역하면 ‘남자들’이라는 제목부터 배우 한 명이 마을 남자 역할 다수를 소화한 것, 그리고 공포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마지막 장면까지, 이 영화는 남성성의 한계, 폭력성, 범람을 대놓고 비판한다. ‘아이고, 남자들 다 똑같다’고 역정을 낸다는 편이 정확하겠다. 영화의 백미인 ‘그 장면’은 비주얼로는 <말리그넌트>의 각기 호러 대난장 신에 필적할 충격인데 그와는 달리 재치 있고 통쾌한 은유가 담겨 있다. 그 남자들이 원한 것, 그걸 들은 제시 버클리의 반응도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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