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더버드’ 잘 맞물린 재능의 발견
지금 한국 영화계에는 <썬더버드> 같은 영화가 더 필요하다.
<썬더버드>는 영화에 등장하는, 전당포에 담보로 맡겨진 자동차 앞 유리에 붙어 있는 영문 글자를 한글로 표기한 제목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자동차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박진감 넘치는 카체이싱이나 드리프트 신이 등장하는 액션 영화도 아니다. 그러니까 실상 그 제목은 자동차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비교하자면 <시민 케인>에 등장하는 ‘로즈버드’ 같은 문자의 역할과 유사한 기능을 가진 제목이다. 퇴락한 부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난 언어의 정체를 쫓지만 끝내 그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그것은 실상 맥거핀에 불과한 것 같지만 끝내 그것이 인물의 노스탤지어를 대변하는 단어라는 사실을 읽어낸 이들에게 그것은 영화의 지향점을 함축한 결정 같은 언어로도 기능한다. <썬더버드>의 ‘썬더버드’ 역시 그렇다.
“너 지금 이 차로 누구 돈 갚는지 알지?” 자동차 앞좌석에 자리한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뒷좌석에는 약에 취한 것처럼 비몽사몽 간에 횡설수설하는 태민(이명로)이 길게 누워 있다. 아무래도 빚쟁이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것으로 보이는데 채무 관계도 복잡한지 누구 빚을 갚아야 하는지 스스로도 헷갈리는 것 같다.
그 와중에 지금 타고 가는 자기 차가 보통 차가 아니라고, 최근 큰돈을 땄는데 지금 이 차에 있다고, 알 수 없는 말만 뱉을 뿐이다. 태민은 전당포에 당도한 뒤에도 소파에 드러누워 있더니 자신의 차를 전당포에 넘긴 일행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틀거리며 일어나 뒤늦게 차를 찾아 나선다.
택시 승강장 인근에서 어딘가 전화를 걸던 태균(서현우)은 수신음만 이어지다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는 소리에 낙담한다. 그러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자리를 옮기고 택시에 올라탄다. 모범택시 기사인 그는 승객에게 방향도 묻지 않고 차를 운전해 나간다.
그러자 승객이 “어디 가는 줄 알고 차를 출발시키세요?”라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답한다. “카지노 안 가세요? 여기 그것 말고 별다른 게 있나요?” 태균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있는 강원랜드 인근에 살고 있는 모범택시 기사다. 운전대보다도 전화를 더 오래 붙잡고 있는 모습에서 갑갑한 마음만 읽힌다.
<썬더버드>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을 배경에 둔 영화다. 사북읍에는 강원랜드가 있다. 1998년에 설립된 강원랜드는 현재까지도 유일무이한, 대한민국 국적자에게 합법적인 도박을 허용한 카지노 시설이다. 석탄 개발이 점차 사양산업이 되는 현실에서 폐광 지역이 늘어나는 강원도의 지역 경제를 고려해 ‘폐광 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한 정부는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도박판을 열어줬다.
그 선심 덕분에 해당 지역 형편이 매우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네에 갑자기 차가 늘어난 모양이다. 일확천금을 꿈꾸고 달려온 이들이 탕진하다 못해 자신이 몰고 온 차까지 전당포에 담보로 맡겨 도박 자금을 융통한 덕분에 버려진 빈 차가 길가에도 널려 있다고 한다.
정선군 사북읍에 버려진 차에 관한 기사를 읽은 이재원 감독은 거기에 자신이 찾는 영화가 있을 거라 믿었고, 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분위기는 적막했다. 영화 같은 욕망을 머금은 사건이 도처에 널려 있을 줄 알았는데 한산함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사람을 만났다.
숙식하던 게스트하우스 호스트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서울에서 사북으로 낙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비로소 영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로소 사북의 풍경도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보이고, 공간이 환기되니, 비로소 영화가 그려졌다. 결국 사건을 쫓아왔지만 사람을 만나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썬더버드>가 캐릭터 스터디 같은 영화가 된 것도 그런 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태균과 태민은 친형제지만 돈독한 우애를 자랑하는 사이처럼 보이진 않는다. 사실 형제가 동행하는 건 채무 관계로 얽힌 탓이다. 동생은 형에게 갚을 빚이 있고, 형은 그 빚을 받아 자신의 빚을 갚아야 한다. 동생도 형에게만 빚이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각기 돈독이 올라 보인다는 점에서 형제는 공통적이다. 그래서 형제는 동행한다. 함께 차를 찾고자 한다. 태민이 전당포에 저당잡힌 자신의 차 ‘썬더버드’에 5,000만원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태균 입장에서는 그 차만 찾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하지만 전당포에 저당잡힌 ‘썬더버드’를 찾으려면 당장 500만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태민은 강원랜드 주변에서 ‘콤프깡’을 중매하는 여자 친구 미영(이설)을 찾아간다. 그렇게 돈을 받아야 하는 태균과 돈을 찾아야 하는 태민과 그 두 사람을 지켜보는 미영까지, 세 사람의 동행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달이 나고 그 사달을 수습하거나 지켜보거나 달아나거나, 세 사람이 달리고 헤매는 만 하루의 밤이 어지럽게 엉킨다.
<썬더버드>는 타지에서 몰려드는 욕망으로 유지되는 빈 껍데기 같은 도시의 풍경을 담보로 그려낸 형제의 비정성시다. 태균과 태민과 미영에게는 나름의 전사가 있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태균이 왜 다시 사북으로 오게 됐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는 분명 사북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동창에게 쫓기며 빚 독촉을 받고 험한 꼴을 당하는 태민은 사실 학창 시절에는 ‘레알 악마’ 같은 존재였다. 과거 카지노 딜러였다는 미영이 왜 직장을 그만뒀는지, 카지노 주변을 전전하며 태민 같은 남자를 왜 좋아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에게 사북은 내일이 없고 그저 매일만 있는 도시다. 내일의 희망은 없고, 매일의 욕망만 뜨고 진다.
예측 가능한 것 같다가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국면으로 곧잘 빠져드는 상황은 대체로 태민의 충동적 기질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런 사태를 거듭 수습하는 건 태균의 몫이다. 그가 이 모든 곤혹스러움을 감당하는 건 나름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태민의 ‘썬더버드’는 태균을 위한 성배다. 당도해 찾을 수만 있다면 사북에서 벌인 지난밤의 모든 우여곡절은 깨끗이 청산하고 정리될 일이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고향에 갇힌 삶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그리고 <썬더버드>는 영화가 두른 도시의 풍경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과묵한 분위기 끝에 진면목을 드러내고 완벽하게 예상으로부터 탈출하거나 내려앉는 작품이다. 세 사람의 기이한 여정은 신기루 같은 희망을 좇아오는 이들의 빈 차로 가득한 도시의 사정을 반영하듯 실체 없는 욕망을 좇는 과정 그 자체의 반영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선택한 결말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돈과 빚의 인과 속을 전전하는 두 형제를 따라 그 굴레를 진하게 목도한 미영의 선택을 통해 빈 껍데기처럼 방치된 ‘썬더버드’도 다시 내달리는 기능을 회복한다. <썬더버드>는 헛된 욕망에 탐닉하며 제 기능을 상실하고 멈춰 선 자동차들의 무덤 같은 도시를 탈출하게 된 자동차에 관한 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쉽게 속내를 알 순 없지만 자기 삶을 헛된 욕망으로 몰아가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버티던 미영은 유일하게 선택이 가능한 한 사람이었기에 그 결과가 온당해 보인다. 동시에 태균을 위한 에필로그 같은 결말은 덕지덕지 붙은 타지의 욕망 아래 정말 살아가는 사북의 맨 얼굴을 위한 격려와 위로가 반영된 선택처럼 보인다. 결국 빚도, 돈도 아닌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전언이 결말에서 전해지는 것만 같다.
이렇게 언어로 나열하고 보면 무겁고 우울한 예감을 부르는 영화 같지만 <썬더버드>는 생각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게 추진하는 서사적 흥미를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다. 각기 존재감이 또렷한 세 캐릭터가 얽히고설키는 과정 자체가 준수한 내러티브의 줄기를 형성하며 시종일관 끊이지 않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동시에 그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주변 인물은 세 사람이 처한 현실과 환경을 환기시키면서도 그 사이에 오가는 언어를 통해 그들의 전사를 추측하게 만든다.
대사를 통한 간접 묘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인물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객석으로 흘려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인과를 상상하고 그려보도록 유도한다. 이는 저예산 영화로서도 효율적이며 합리적인 선택이다. 직접 묘사하거나 연출해야 하는 장면을 상상하게 만듦으로써 예산을 절감하면서도 극적인 흥미를 확장하는 영리한 선택이란 점에서도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각본과 연출, 편집을 도맡아 자신의 첫 연출작을 완성한 이재원 감독은 시사적 관심이 반영된 사회적 시선을 바탕으로 생생한 현실성을 구축하면서도 그런 현실성에 압도되는 대신 또렷한 이야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런 야심을 생생하게 구축할 수 있었던 건 액션과 리액션의 합이 잘 구축된 캐릭터 조합과 잘 맞물린 연기 호흡 덕분이다.
즉흥적 판단이 빠르지만 폭투처럼 충동적인 태민을 연기한 이명로가 시종일관 자기 숨을 뱉듯 액션을 펼친다면 시작과 끝이 가장 다른 인상으로 변모하는 태균을 연기한 서현우는 숨을 거듭 들이켜 내러티브를 확장시킬 공간을 확보하듯 리액션을 완수한다. 동시에 관객의 시선을 제삼자의 관점으로 대행하듯 극 안의 관찰자의 위치를 점한 미영을 연기한 이설은 담담한 시선을 견지함으로써 끝내 극적 카타르시스를 끌어올린다. 작가의 비전과 배우의 재능이 잘 어우러진 영화를 발견하는 반가움이 상당하다. 지금 한국 영화계에는 이런 작품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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