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에서
우리의 치마저고리에는 채송화도 봉선화도 한창입니다. 한복에 얽힌 해사한 추억 한마당.
고름을 묶는 마음
어릴 땐 한복을 입는 게 좋았다. 어른들이 용돈을 주셨기 때문에. 머리를 쓰다듬어주시고 예쁘다, 라고 말해주셔서. 어린이가 할 수 있는 효도 중 하나, 명절 때 한복 입는 거. 하지만 입으라니까 입었고, 아마 다른 집 아이들도 입으니까 내 부모도 입혔을 텐데, 우리 가문이 으리으리한 양반집은 아니어서인지 이 색색 옷에 의미를 두진 않았다. 명절날 일어나면 이불 옆에 엄마가 꺼내놓은 한복이 놓여 있었다. 형과 나는 입을 수 있을 만큼 입었다. 다리 넣고 팔 넣고 허리끈 묶고 버선 신고 형이 하는 거 따라서 버선 윗부분을 끈으로 묶었다.
형이랑 나는 ‘똘망똘망한’ 어린이는 아니었다. 알아서 척척 하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도 형이 나보다는 나았는데, 어른이 되고 형이 말했다. “형이어서, 형처럼 보이려고 어릴 때부터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 한복을 입을 때도, 내가 너보다 잘 입어야 형이니까. 그땐 네이버도 없었고.” 갑자기 왜 한복 얘기를 꺼냈는진 기억 안 난다. 형에겐 한복을 입는 게 어른들께 인정받는 일 중 하나였을까. 장남이니까. 세뱃돈도 더 많이 받는.
입을 수 있을 만큼 입고 나면 저고리 고름 묶는 일이 남았다. 나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묶어본 적이 없다. 이상하게, 안돼. 형이 묶어줬다. 형은 내 앞에 서서 고름의 형태를 보면서 묶으니까 당연히 쉽게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나는 형 것조차 묶어주지 못했고, 이상하게, 형은 형 것도 잘 묶었다. 형이라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동생보다 고름을 잘 묶는 능력을 부여받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한데, 나는 형을 우러러보진 않았다. 묶기는 묶는데, 형도 정말 묶기만 해서. 이상하게.
엄마는 열심히 차례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빠는 음식을 나르고. 할아버지는 TV를 보고. 엄마, 이거 어떻게 묶는 거야, 큰 소리로 물어보면, 엄마가 대답했다. 형한테 묶어달라고 해. 형은, 묶긴 묶었는데 이상해, 라고 말하고, 엄마는, 여보 애들 저거 좀 묶어줘요, 라고 말하고. 커다란 사과가 담긴 제기를 상에 내려놓고 빠른 걸음으로 아빠가 우리에게 왔지만 아빠도 형과 나의 고름을 멋있게 묶지는 못했다. 고름에서 사과 냄새가 났던 게 분명하게 기억나고, TV를 보던 할아버지가 조용히 다가와 형과 나의 고름을 유심히 보던 것도 기억난다. 이전 명절 때 할아버지는 그 고름을 다시 풀고 한참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다가 결국 아무 매듭을 짓지 못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날은 풀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 집안의 문제는 아무도 고름을 멋있게 잘 묶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땐 네이버도 없었고. 있었다고 해도 못 묶었을 것 같지만.
우리에겐 엄마가 있다. 잘못 묶인 것을 풀고 멋지게 다시 묶는 건 언제나 엄마였다. 비단 고름뿐 아니라. 길이를 가늠하고, 줄 하나가 다른 줄과 만나야 하는 적정한 지점을 확보하고, 동그라미를 만들어 줄을 넣으면서도 끝부분의 부드러움을 염두에 두는 테크닉! 엄마는, 그리고 엄마들은 왜 어떻게 이런 걸 할 줄 아는 걸까. 내 인생 최대 미스터리, 엄마.
해마다 우리 가족은 한 살씩 더 먹었다. 도대체 이런 건 누가 정하는 거지. 지구인 모두가 ‘해마다 나이 더하지 않기’를 담합하면 지금 나이로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누구나 그렇듯, 계속 아이인 상태로 있을 순 없었다. 형과 나는 굳이 자랐고, 한복은 작아졌으며, 아무도 큰 한복을 사주지 않았다. 용돈도 안 줬고, 예쁘다, 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한복 입는 건 불편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명절 아침 옷 입는 게 수월해졌다. 잠도 10분 이상 더 잘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침에 형이랑 나란히 앉아 커다란 질감의 형체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애쓸 일이 없어졌다. 35년째 제사와 차례 때만 찾아오시는 할아버지가 손자들의 한복 고름을 보며 생각에 잠기는 표정도 상상할 수 없고, 아빠와 엄마를 부르며 이거 어떻게 묶어, 라고 물어보는 귀엽고 씩씩한 나와 형도 없다. 시간이 흐르면 즐거운 새로운 게 생기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은 소중한 것을 사라지게 만든다.
고름을 잘 묶고 싶다. 뜬금없이 이제 와서. 한복을 입지도 않는데. 쓸데없이 잘 묶어서 뭐 해. 모르겠다. 갑자기 왜 잘 묶고 싶은지. 고름을 묶듯 우리 가족의 시간도 단단히 묶어두고 싶어서? 이제 아무도 떠나지 마, 아무도 아프지 말고, 아무도 외롭지 마. 이런 마음으로 두 번 세 번 묶어두면 좋겠는데, 시간과 기억을 묶는 고름은 아무도 갖고 있지 않다. 그나저나 우리가 한때 한집에 살았다니! 독립할 땐 기분 좋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결혼한 형을 데리고 엄마 아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렇게 딱 한 달만 살면 행복할까.
우리 가족은 2년째 차례를 지내지 않고 있다. 아빠가 쓰러져서. 뇌졸중으로 한쪽 팔을 사용하지 못하고, 다리도 온전치 않아 걸음이 불편하다. 색색 화려한 한복을 사드리고 싶다. 네이버를 보고 열심히 연습해서 고름을 내가 생애 처음으로 잘 매면 좋겠다. 하지만 못 그럴 것이다. 눈물이 날 테니까. 우리 가족이, 그러니까 아빠와 엄마가 젊고 단단하던 시절,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형이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애쓰던 시절이, 지금은 가질 수 없는 시절이 떠오를 테니까. 그나저나 나는 어쩌다 이 글을 쓰게 되어서 한복이 슬퍼져버렸다. 한복이, 슬프다니. 작별의 시간이 남아 있다. 엄마와 아빠에게 한복을 입히고 내가 직접 고름을 매야 하는 순간. 그때 나는 무엇을 묶는 마음일까. 이우성 시인
자유의 미학
지난 4월 남동생의 결혼식이 있었다. 마흔 넘은 남동생의 결혼은 집안에 찾아온 오랜만의 경사였지만, 결혼식 3일 전 저녁 부모님의 코로나 확진이라는 벼락 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갑작스레 혼주석을 나와 남편이 대신해야 했고, 엄마는 내게 한복을 입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주었다. 엄마의 의견을 대다수 흘려들으며 광야의 딸처럼 살아왔기에 지금 어디에서 한복을 구하느냐고 버티었다. 그러나 엄마는 끈질겼다. 문자와 전화로 일정 간격을 두고 “혼주석에 한복을 입고 앉아야 자리가 채워지는 법이야. 그 자리가 비면 좀 초라하지 않겠니?”라며 종용했다. 엄마는 양가 중 한쪽의 부피감이 폭삭 주저앉아 보일까 염려했다. 하나뿐인 아들 결혼식에 못 가는 것도 서러울 텐데, 나는 4n년 차 만에 처음으로 엄마의 뜻을 받들기로 했다. 내일 입을 한복을 오늘 구해야 하는 위급 상황에서 몇 년 전 우리 딸 돌 한복을 맞췄던 ‘고은맘한복’이 떠올랐다. 전통의 틀은 고수하면서 현대적 색감과 선을 더한 고은맘한복은 이름 그대로 ‘고은 색감’이 특기였다. 아이의 돌잔치를 기획하는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기출문제처럼 꼭 살펴봐야 하는 브랜드 고은맘한복! 이성진 고은맘한복 대표에게 오랜만에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바로 “주말에 대여 나가는 한복이 많지만, 남은 것 안에서 해보자”는 긍정적인 대답이 왔다. 한복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찌 이리 마음도 풍성한지. 만들고 매개하는 사람은 꼭 자신이 다루는 재료나 형태와 닮는 법이다. 이성진 대표에게는 늘 명절 같은 넉넉한, 그러니까 잔치를 많이 치른 사람의 베푸는 기운이 있었다. 나는 곧장 일산으로 달려갔다. 막상 여러 한복을 입어보니 결혼식 화동을 할 두 딸도 한복으로 맞춰 입는 게 낫겠다는 욕심이 슬며시 들었다. 원피스나 투피스의 간결하게 재단된 우아함과는 다른 단순하면서 화려한 양면적인 멋이 한복에는 깃들어 있었다. 누가 한복을 생활복의 지위를 잃고 행사용으로 명맥을 유지한다고 타박했던가. 축제를 위한 한국식 미학과 푸짐한 흥이 한복이란 형식에서 정점을 찍었다. 누가 보아도 한복을 입은 사람은 이 축제의 주최 측이었다. 몸매를 드러내지 않고, 별다른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속곳 치마와 속적삼 위로 쌓인 풍성한 레이어는 그 자체로 활짝 핀 꽃처럼 눈길이 머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한복을 입고 살짝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치마는 물결처럼 일렁였다. 여성의 몸을 옥죄어온, 그래서 보폭의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던 다른 나라의 전통 의상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이 자유! 치마 속에서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한다고 해도 알 수가 없는 이 편안함. 그렇게 나는 순식간에 한복 세 상자와 치마를 차 트렁크에 ‘모시고’ 출발했다. 오랜만에 만난 이모들은 콘텐츠 기획 노동자로 늘 종이 더미를 끼고 전전긍긍 사는 내게 “사모님 같다”며 연신 기뻐했다. 한복 효과로 덩달아 내 주름살도 펴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일가친척은 한복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갔다(분명 엄마와 나 사이에 벌어진 한복에 대한 옥신각신을 전해 들은 까닭이다). 한복 입고 혼주로 빙의한 나는 축사를 읽으며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한복을 입은 아이들은 신부 옆에서 화동 역할도 톡톡히 했다. 이런 것이 옷의 힘인가. 우리는 결혼식이라는 가족의 큰 행사를 주인 의식을 가지고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한복은 일상으로부터 분리된 축제의 옷이었다. 집안에 결혼식이 있으면 여성 어른들은 다 같이 한복을 맞췄다. 어린 시절 나는 명절만 되면 한복을 입었다. 한복을 입고 세배를 드리고 윷놀이를 하고 떡국을 먹고 송편을 빚었다. 사촌 언니와 새언니에게 물려받은 한복. 해마다 자매에서 자매로 전달된 한복은 기장은 달라도 신통하게 몸에는 잘 맞았다. 그것이 평면 재단의 힘이라는 것을 훗날 온양민속박물관에 가서 알았다. 전시실에는 저고리가 족자의 그림처럼 벽면에 걸려 있었다. 추상화 같은 선과 색감이 멋있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서양 복식은 입체 재단이고, 한복은 평면 재단이라는 것. 이 차이 하나로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가진 옷이 된다는 것. 저 납작한 2차원 속으로 사람의 몸이 들어가면 3차원 입체가 된다니. 그것은 마치 3D 공간 프로그램인 스케치업에서 평면 도면이 갑자기 입체로 길쭉해지는 것과 같은 놀라움이었다. 공간이 생기는 마법. 마술사가 모자 속에서 비둘기나 빨간 손수건을 끊임없이 꺼내는 것처럼. 저 안에 무언가 있구나 싶은. 혹자는 오버사이즈로 입는 사람의 체형을 그대로 살리는 르메르의 스타일을 두고 한복을 연상하기도 한다. 여러 레이어를 겹쳐 입는 자유롭고 편안한 실루엣, 특히 봉긋한 바짓단을 볼 때면 나도 한복의 선이 떠올랐다. 사라 린 트란은 “르메르의 과장된 옷을 두고 ‘이 정도면 두 사람도 들어가겠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실제로 비가 갑자기 쏟아질 때 코트 한쪽을 열어 친구를 보호하거나 추운 겨울에 긴소매를 늘어트려서 친구의 손을 감싸준 경험이 많다. 나에게 옷은 어떤 의미에서 ‘작은 집’과 같다. 내가 입는 물건이 아닌 내가 사는 공간 같은 것”이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내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넉넉한 품이 느껴지는 한복 속에도 공간이 있다. 아이 두엇은 옹기종기 모여들어 숨을 수 있는 공간. 그렇게 누군가를 안아주기 적당한 한복의 미학이 저 유럽의 패션 브랜드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박물관에 갈 때마다 의식주 전반에 녹아 있는 선조의 모던한 감각에 불현듯 놀란다. 이것이 왜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며 증발해버렸는지 의아할 정도다. 대대로 이어져온 기능주의 속 자유와 편안함은 20세기 들어 조악한 장식과 군더더기에 잠식되었다. 축제 때 원피스 대신 한복을 입으며 다시 한번 한복이란 복식이 가진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축제 때 한복을 고집하는 엄마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일상에서도 한복의 미학이 현대 복식과 만난 한국 패션 브랜드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끼는 옷을 입는 게 불편한 데다 옷 속에 내 몸을 맞추는 게 어색한 나이도 되었고 말이다. 임나리 워드앤뷰 대표
조금 더 가까이
대학에서 패션을 전공한 나는 교수님의 추천으로 어느 한복 숍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패션에 대한 열망과 현실적인 취업 사이에서 고민하던 때라 사실 한복과 미래를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5성급 호텔 아케이드에 자리한 한복 숍은 모던한 인테리어에 전통을 포인트로 둔 매우 멋진 공간이었다. 솔직히 초등학교 입학 전 명절 때나 입던 한복을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에서 접할 줄은 몰랐다. 주요 고객은 부유층으로 가격 또한 매우 비쌌다. 좋은 소재로 잘 지어진 한복은 굉장한 의복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곳이었다. 거기에서 한복을 배우고 관련 일을 할 수 있었다니 정말 좋은 기회였다.
20대 중반쯤 미스 유니버스를 위한 전통 의상을 디자인하는 거창한 의뢰가 들어왔다. 이전 대회 의상을 살펴보니 대례복 혹은 치마저고리를 구성한 의복이 대부분이었기에, 다른 한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삼국 시대 의복의 실루엣과 디테일을 살려 제작했다. 하지만 일본 전통 복식이 아니냐는 논란이 거셌다. 대부분 한복을 삼국 시대, 고려 시대 혹은 그 이전 시대는 생각하지 않고 조선 시대 후기 의복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익숙지 않은 실루엣과 구성이 중국이나 일본 의상과 비슷해 반발이 생긴 것이다. 디자인할 때 사회적 논란이 생길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어렸고 추구한 디자인에만 몰두했다. 대중적인 퍼포먼스나 이벤트에는 반드시 대중의 생각이 어떠한지 고려하고 준비해야 함을 깨달았다. 논란이 지속되자 디자인할 때 모티브로 삼은, 삼국 시대 의상 관련 자료를 만들어 제출했다. 당시 매우 힘들고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요즘 우리는 한복을 입을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한복을 소유한 사람 역시 드물고, 있다 한들 명절에도 굳이 챙겨 입지 않는다. 주로 결혼식의 혼주복과 폐백을 위해 입는데, 요즘엔 결혼식 규모가 줄고 폐백을 하지 않아 한복을 준비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어려워지는 사회 경제 구조에서 출산율과 결혼 비율도 줄고 있다. 대중이 한복을 잘 모를 수밖에 없는 흐름으로 가는 듯하다.
반면에 서울 경복궁, 덕수궁, 전주 한옥마을 등에서 한복을 입고 데이트나 산책을 즐기는 이가 많아졌다. 한복에 대한 관심이 그래도 생긴 것이라 긍정적이다. 하지만 대여로 입는 값싼 한복을 과연 한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한복감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커튼 원단과 구성, 색감으로 중국에서 대량생산된, 전국에 퍼진 대여 한복은 그저 다른 옷으로 보인다. 이런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은 학생이나 아이들은 후에 한복에 대한 경험을 어떻게 회상할지 궁금하다.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한복은 문화 동북 공정의 논란이 되었다. 중국 각 지역의 전통 옷을 입고 나오는 부분에서 조선족의 전통 의복으로 입고 나온 한복이 문제가 된 것이다. 때론 패션지에서 한복이 등장하는 화보를 찍으며 논란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간 화보 중엔 전통 한복의 구성 및 착장 순서대로 촬영한 것도 많고,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또한 요즘은 전통적인 방법보다는 다양한 해석으로 표현해가는 것이 패션에선 트렌드다. 논란 가운데 사람들이 한복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실감 가는 부분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한국의 전통문화와 한복을 잘 알고, 입는 방식을 지켜가고 있을까. 중국에서 대량생산된 질 낮은 대여 한복, 중국의 올림픽 개막식에서 논란이 된 문화 동북 공정, 한복 패션 화보 논란 등 우리가 만약 한복에 대해 평소 관심이 있었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수 있다.
한복을 디자인하고 판매하고 또 그것으로 먹고사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먼저 대중에게 친숙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이 지속적으로 나와야 한다. 지금 한복은 조선 후기에 머물러 있다. 너무 과감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은 한복이라 인정받지 못하고, 너무 전통적인 것은 현대인에게 선택받지 못할 것이다. 어려운 과제다. 그럼에도 대중적으로 좋은 디자인이 지속적으로 나왔더라면 한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 우리 문화 역사에 단절이 없었다면 한복은 과연 지금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도 한다. 소매는 자연스럽게 좁아졌을지, 평면 구성에서 입체 구성으로 변했을지, 서양 복식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유행과 구성이 생기지는 않았을지. 우리 전통문화는 멋지고 훌륭한 요소가 정말 많다. 분명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몰랐던 새롭고 다양한 모습의 전통을 점진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빠르게 변하는 일상과 트렌드에도 지속적인 관심 속에 한복은 분명 성장할 것이다. 최근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등의 무대의상으로 한복은 현대화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대중의 높은 관심과 한복을 입고 지키려는 노력이 이뤄진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후기의 한복에서 다음 시대의 한복으로 충분히 나아가지 않을까. 박경화 박경화한복 대표
21세기 풍속화
스물한 살, 사촌 오빠의 결혼식에 한복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보통 한국에서는 가족 중 기혼자만 한복을 입는다. 이례적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내 엉뚱함을 응원해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집으로 외국인 친구들을 초대하시면, 나는 한복을 입고 전통 부채와 노리개 등을 선물했는데, 그때 들은 ‘이쁘다’는 칭찬이 몸에 배어서 그랬지 싶다. 어쩌면 ‘우아함으로 주목받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을 한복으로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나는 한복을 입은 현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그리는 한국화가가 되었다. 그림 속 여인은 아름다운 한복을 입은 채 피자나 햄버거를 먹고, 오토바이를 타고, 포켓볼을 친다. 현대인의 일상을 한복과 함께 표현한 일련의 작품이 옛 풍속화를 떠올리게 해서인지, ‘21세기의 풍속화가’라 불러주시는 분도 있다. 감사한 일이다.
‘내숭’을 주제로 한 전시회에도 한복이 함께했다. 한복이 주는 고상함과 얌전함에 착안해, 한복을 입고 격식을 차리지 않은 일상을 그림으로써 현대인의 내숭(겉으로는 순해 보이나 속으로는 엉큼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 ‘내숭: 아차’에서 인물이 먹고 있는 라면과 스타벅스 커피, 명품 핸드백은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일상을 대변하는 사물이다. ‘전통과 격식’이라는 한복의 이미지와 ‘현대와 일상’이라는 사물의 이미지를 교차·대비시킴으로써 ‘내숭’의 속성을 환기한 것이다. 시대적으로 교차하지 않는 이미지를 대조적으로 어우러지게 한 것은 ‘이럴 때는 이런 것을 해야 한다’거나 ‘이런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통념에 충격을 주고 싶어서다. 내숭은 드러나기 마련인데, 이는 작품 속 여인이 붓으로 그려진 몸 위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한지를 붙이는 콜라주 기법으로 표현했다.
한복은 나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조형 요소지만, 활동 초기에는 한복을 잘 몰라 곤란을 겪기도 했다. 2013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한 관람객이 질문했다. “작가님, 작품 속 여인이 기생처럼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데요, 어떤 메타포가 있나요?” 질문 의도를 몰라 당황스러웠다. 알고 보니 일각에서는 한복의 치맛자락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려서 왼쪽 자락이 오른쪽 자락을 덮은 채 오른쪽 엉덩이 뒤에서 여며지면 기생의 옷차림으로 여겼다. 다행히 내 그림이 잘못되지 않았고, 관람객도 뭔가 착각했는지 그런 질문을 던진 거였다. 그런데도 부끄러웠다. 내가 그리는 대상을 이렇게 몰라서는 안 된다. 그때부터였다. 한복은 그림 속에서 내 생활로 걸어 들어왔다. 외부 활동을 할 때는 반드시 한복을 입었다. 가까이할수록 한복을 알게 되고 작품에 진정성이 더해질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전시, 강연, 홍보대사 활동 등을 할 때면 한복을 입는다. 기품 있는 한복은 어느 자리에서도 주목받는다. 한복 안에서 ‘내가 보호받고 있구나’라는 안도감도 느낀다. 낯선 사람들로 둘러싸인 모임이더라도 한복을 입고 가면 웃는 얼굴과 호의, 칭찬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복은 나를 빛내고 보호해주는 마법이다.
한국의 유명 한복 디자이너의 작품도 거의 한 번씩 입어봤다. 한복 단벌이었는데 10년 가까이 입다 보니 지금 옷장에는 50여 벌의 한복이 걸려 있다. 세상에 예쁜 한복이 많아서 생긴 결과다. 결코 사치의 결과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싶다.
오래도록 한복을 가까이하면서 그 장점도 기꺼이 즐기고 있다. 한복은 정자세로 오래 버텨야 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스트레스를 덜어준다. 치마를 방패 삼아 책상다리를 하고 부은 다리를 쉬곤 한다. 한복의 넉넉한 치맛자락은 몸에 해방감도 주었다. 한복은 내 삶을 담백하게 만들었다. 나는 한복을 고를 때 계절감과 색감, 활동성만 고려한다. 추우면 두꺼운 한복, 더우면 모시 한복을 꺼내 입는다. 강연을 하러 갈 때면 해당 기관의 BI, CI에 맞춘 색상을 고른다. 기동성 있게 움직이고 싶으면 치마 길이가 발목 위로 올라오는 생활한복을, 특별한 무대에 설 때는 드레스 한복을 입는 정도다. 그간 옷이 많아도 늘 입을 옷이 없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한복을 그릴수록 그 아름다움에 점점 더 빠지는 중이다. 한복은 하나의 패션이면서, 그 자체로 고유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구축한다. 그렇기에 내 그림의 한복은 보는 이의 눈길을 끌면서 작가의 메시지도 전달하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무엇보다 한복은 아름다운 선과 색상, 질감으로 우아하면서도 화려하다. 사실 우아함과 화려함은 공존하기 힘든데, 한복은 이뤄낸다. 한복의 힘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김현정 한국화가
유년의 꿈
나는 한복을 그린다. 전통 채색화 속 주인공은 늘 한복을 입고 있다. 인터뷰 때마다 빠지지 않는 질문은 “언제부터 한복을 좋아했나요?” 그때가 내 기억이 맞다면, 여덟 살. 그때부터인 것 같다. 1988년 당시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 푹 빠져 있었다. 드라마가 시작될 때면 TV 속에 빨려들듯 집중했고, 그런 나를 뒤로 끄집어내는 게 엄마의 일이었다. 엄마는 내게 내용은 알고 보는 거냐며 묻곤 하셨지만 스토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예쁜 한복이 좋았다. 보료에 앉은 중전마마의 자태가 고왔고, 입고 있는 한복의 색, 움직일 때마다 구겨지는 모양과 소리까지 그냥 다 좋았다. 드라마를 따라 이불을 보료처럼 펴놓기도 해보고 거적때기 주워다가 한복처럼 둘러메고 돌아다닌 낯 뜨거운 장면도 떠오른다. 엄마는 그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언니 한복을 한번 입어보라 하셨다. 집에 한복이 있었나?! 처음 듣는 소리였다. 장롱 구석에서 상자를 꺼내시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발을 동동 굴렀다. 드디어 상자가 열리고 한복을 꺼내는 순간 이럴 수가! 나는 실망해버렸다. TV 속 한복과 완전히 다른 한복이었다. 뭐랄까? 딱딱한 원단에 과한 색과 디자인으로 어린 내가 봐도 눈이 피곤했다. 사극 속 한복은 잘 때 입는 하얀 속옷마저도 고급스러워 보였는데 실생활에서의 한복은 촌스러웠다. 나는 울며불며 다른 걸 사달라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엄마는 눈이 퉁퉁 부은 나를 이끌고 한복점으로 향하셨다. 그런데 또 한 번의 충격과 실망이 엄습했다. 시장인지 옷 가게인지 모를 이상한 곳에서 저 멀리 한복 비슷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저긴 아니겠지 하다가 엄마에게 혼만 나고 돌아왔다. 서럽고 답답한 순간이었다. 도대체 TV에 나오는 그런 한복은 어디 있는 건지, 그날 밤 답답한 마음을 그림일기에 남겼다.
어느덧 나는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이 되었다. 동양화에 끌려 수묵과 채색 기법에 몰두하며 어릴 적 좋아하던 한복을 그렸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영화 포스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전도연, 배용준이 주연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란 영화였다. 부드러운 옷감과 우아한 색, 내가 원하던 한복 그 자체였다. 여덟 살로 돌아간 것처럼 설렜다. 한복을 만든 이가 누구일까?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임을 알고 작품 자료를 꾸준히 찾아보았다.
2005년 나는 스토리가 있는 한복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그렸다. 2006년 첫 개인전에 이어 아트 페어에 참여하며 바쁘게 활동하던 2015년, 아모레퍼시픽재단에서 ‘아시아의 美’를 주제로 인문 교양 강좌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담당자가 “봄에는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 선생님께서 강연하셨는데, 가을엔 한복을 그리는 작가님이 하시는군요? 두 분 소개해드리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꿈은 아닐까. 나도 모르게 담당자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꼭 뵙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청담동에 자리한 ‘담연’이라 곳을 찾아갔다. 하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직원분이 포근한 실내화를 꺼내주었다. 넓고 깨끗한 공간에 잘 정돈된 옷감과 장신구, 선생님의 한복이 있었다. 화려한 색이 아닌 무명천으로 만든 한복이었다. 겹겹이 싸여 부풀어 오른 치마가 꽃송이 같았다. 그 앞에서 넋 놓고 있을 때쯤 단아한 한복 차림의 이혜순 선생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나는 너무 긴장되어 두서없는 질문을 해댔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선생님께선 한복에서 묻어나는 우리 민족의 세계관과 한복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시선을 말씀해주셨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겉옷만큼이나 아름다운 속곳, 차례로 중첩되어 드러나는 색과 선, 의미와 실용성을 더해 화려함보다는 귀하게 보이는 옷, 담연의 한복에서 연꽃의 우아함과 장인의 고집스러움이 더 느껴졌다. 선생님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내게 많은 영감을 준다.
나의 그림책 속에도 담연의 한복이 있다.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속곳부터 겉옷까지 촬영한 후 스케치 1년과 채색 1년, 그렇게 2년 공을 들여 완성한 책이 바로 나의 두 번째 그림책 <개미 요정의 선물>이다. 엄마와 나 그리고 아들, 3대의 따뜻한 스토리로 진심을 다해 그리고 쓴 책이다. 선생님께서도 책을 받아 보시고는 “수고 많으셨어요, 작가님. 책이 참 좋아요”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시절 TV 속 한복에 반해 동양화가가 되었고, 담연의 한복을 만나고 운명처럼 그림책을 그리고 썼다. 지난 일이 영화처럼 느껴진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8월의 마지막 밤. 나는 오늘도 한복을 그린다. 신선미 동양화가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법
경복궁이 자리한 서촌 주변을 거닐며 한복 입은 사람들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한복이라면 아주 어렸던, 열 살 무렵 명절 때 입어본 게 마지막이기 때문이었다. 아동용이라 온통 원색으로 꾸며놓은 한복을 입고 친척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며 세뱃돈을 타곤 했다. 명절날 꼬까옷 입는 기분에 신이 나긴 했으나, 막상 한복을 입으면 움직임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우선 제대로 된 옷고름 매는 법부터 치맛단 잡기를 배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어린 나이에 한복을 입다 보니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저고리 자락이 풀리거나 치맛단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사람들이 점점 한복을 입지 않는 이유가 다 있구나, 라는 생각이 어릴 때부터 들었다.
일본과 인도를 여행하면서 놀란 까닭도 저마다의 전통 의상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현대 의복을 입은 사람들 틈에서 전통 의상의 긴 치맛자락을 붙든 채 유유히 걸어가는 여인들 모습이 서촌에서 보던 한복 입은 사람들과는 사뭇 달라서 더 놀라웠다. 그들은 서울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처럼 일회성 체험이나 사진 촬영용으로 전통 의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진짜 자기 나라의 전통 의상을 일상복으로 입고 다녔다. 그 태도와 자태가 굉장히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여 더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본 한복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낯선 이국에 왔으니 그 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해보고 싶은 마음이야 헤아릴 수 있으나, 그들이 입은 한복은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아온 한복 같지 않았다. 과도하게 화려하고 다채로운 디자인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전통적이지 않은 문양과 각양각색의 레이스로 장식한 옷이 어째서 한복인지 알 수 없었다. 한국인 누구도 입고 다니지 않는 옷을 외국인들이 한국의 전통 의상으로 알고 입어보는 게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진짜 도움이 되는지도 의아했다. 입고 벗기에 불편한 치마저고리에 단추와 지퍼를 달아 편리하도록 만든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인도에서 함께 공부했던 미국인 친구가 서울로 놀러 오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이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공항까지 마중 나가고, 숙소도 내가 예약해 여행 기간 내내 함께 다니기로 했다. 한데 서울에서 막상 어디를 가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에게 서울은 여행지가 아니라 거주지였기에 외국인 친구를 안내하려니 막막했다. 다행히 친구는 여행지에서 미리 계획을 짜서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자기가 가보고 싶은 곳을 미리 정리해 왔다. 친구의 계획표에는 남산, 명동, 한강, 홍대, 강남역 그리고… ‘경복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경복궁조차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다. 이참에 나도 한 번쯤 구경해보는 건 좋은데, 불현듯 불안감이 스쳤다. 설마 경복궁에 한복을 입고 가려는 계획은 아니겠지, 라고 친구에게 물으니 이미 한복 대여점까지 알아봐놨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아, 한숨이 튀어나왔다. 친구와 단둘이 여행하면서 친구만 한복을 입고 나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채로 다닐 수 없는 까닭이었다. 서촌에서 본 한복 입은 무리는 하나같이 각양각색의 한복을 맞춰 입고 함께 다녔다. 그들 중 누구도 혼자서 한복을 입고 다니거나, 무리 중 한 사람만 일상복을 입은 경우는 없었다.
결국 서촌에 가서 친구가 예약해둔 한복 대여점으로 향했다. 1층부터 3층까지 건물 한 채를 쓰는 한복 대여점에서도 친구는 프리미엄관을 접수했다. 보통은 일반 대여관으로 접수한 뒤 지하 1층에서 짐을 보관하고 다시 올라와 한복을 골라 갈아입지만, 프리미엄관에서는 짐 보관과 환복까지 한 번에 할 수 있어 편리했다. 친구와 나는 특별한 대우라도 받는 양 프리미엄관으로 들어갔다. 한데 수백여 종의 한복 앞에서 친구와 나는 조금 난감했다. 사이즈부터 색상, 문양, 디자인이 제각각인 한복 중 어떤 것을 입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까닭이었다. 나로서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골라주고 입혀주는 한복만 접했을 뿐, 내가 직접 사이즈와 디자인을 골라서 입어본 적이 없었다. 친구와 내가 당황스러워하자 직원이 다가와 치마 길이는 어깨에서부터 발목까지 오는 것으로 고르면 된다고 가르쳐주었다. 치마를 먼저 고르고, 치마 디자인에 맞는 저고리를 고르는 것이 한복을 고르는 방법이라고도 덧붙였다.
마음에 드는 한복을 고른 뒤 옷을 갈아입을 때도 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직원은 탈의실에서 직접 환복을 도와주었고, 입는 순서까지 세세히 알려주었다. 속바지부터 버선, 노리개, 속치마, 머리 장신구… 친구와 함께 한복으로 완전히 갈아입고 나자 직원이 우리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댕기 머리를 땋아 장신구까지 달아주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사물함에 소지품을 넣어둔 뒤 드디어 밖으로 나갔다. 입는 옷에 따라 사람의 태도가 달라진다더니, 막상 화려한 한복을 입고 거리에 나서자 늘 보아오던 서울의 풍경이 사뭇 달라 보였다. 과거 속 다른 세계에 뚝 떨어진 기분이 들었고, 한복이 날개옷이라도 되는 양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친구와 함께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며 경복궁으로 향하니, 한복 착용자는 무료입장이었다. 성인이 되어 처음 한복을 입고 생애 처음으로 경복궁에 들어서니 나도 덩달아 다른 나라에 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그 나라의 궁전에는 꼭 한 번씩 가보았으면서, 평생 살아온 한국에서는 왜 한 번도 궁에 가볼 생각을 못했을까? 경복궁은 자연환경을 그대로 살린 건축양식이 인상적이었고, 이는 다른 어느 나라의 궁에서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가령 내부 건물과 담의 모퉁이, 정원에 깔아놓은 돌 장식마저도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살려 지어 올린 점이 놀라웠다. 친구와 나는 연신 경복궁의 자연미에 감탄하며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었다. 경복궁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궁에서 나온 뒤에는 인사동 전통찻집으로 가서 시원한 오미자차를 마셨다. 상큼한 오미자 맛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서울로 여행 오길 잘했다, 라고 말하며 활짝 웃는 친구의 얼굴을 보니 코로나 시국에 갑갑하던 마음이 훅 가셨다. 어딘가 멀리 떠나 지친 몸과 마음을 환기하고 돌아올 여유가 허락되질 않는다면, 가을날 하루쯤 서촌에 가보자. 전통문화와 격식을 너무 따지지 않고 편하게 한복을 입어보면, 그동안 보지 못한 서울의 다양한 표정을 마주하며 새로운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혜나 소설가 (VK)
- 피처 에디터
-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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