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가족’ 버전의 간첩들
내실 있는 5인의 배우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영화 <간첩>이야말로 추석에 받는 종합선물세트다. 불멸의 영웅 김명민과 외모만 팜므파탈 염정아, 고요한 폭탄 유해진과 바로크적 노인 변희봉, 왠지 정이 가는 정겨운이 <보그>를 위해 ‘조용한 가족’을 연기했다.
불멸의 연기 장인, 김명민
김명민, 그는 우리로 하여금 더 멀리 꿈 꾸게 하는 배우다. 그가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누가 훈수를 둘 수 있을까. 행인지 불행인지 배우 김명민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인간 김명민뿐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전형적인 메소드 연기자. 죽어야 사는 남자다. 신체 에너지를 죽음에 가까울 정도로 떨어뜨린 ‘루게릭 환자’였을 때도(영화 <내 사랑내 곁에>), 시청자들의 식은 가슴에 야망의 불꽃을 일으키던 ‘명의’(드라마 <하얀 거탑>)였을 때도, 히스테릭한 천재 지휘자(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나 딸을 유괴 당한 목사였을 때(영화 <파괴된 사나이〉)도 그는 매번 고통을 관통한 ‘위대한’ 인생을 살아냈다. 때론 불길하게 삐걱거리는 흔들의자 처럼, 폭풍의 언덕에서 맞는 광포한 바람처럼 공명하는 목소리로 공간을 육박하며. <불멸의 이순신>의 이순신 이후로 그의 영혼의 DNA엔 ‘영웅적 트라우마’라는 낙인이라도 찍혀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한 사람의 일생이 어떻게 매번 기록을 경신하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같을 수 있나.
“<페이스메이커>와 <연가시>와 <간첩>이 연이어서 붙었어요. 보시는 분들은 제가 육체를 너무 혹사시키는 게 아닌가 걱정하시는데, 사실 전 힘들지 않거든요. 매일 뛰고 땀 흘리고, 저한텐 그게 자고 먹는 것처럼 일상적이에요. 오히려 가볍게 하는 연기가 더 쉽지 않죠.” 이제 스크린이란 영토에 그가 남긴 바퀴 자국은 아주 깊어 사람들이 노면에 부딪힐 만큼이다. 명품 배우라는 말이 김명민이라는 세 음절을 수식하기 위해 득세하기도 하는. 그러나 그의 크레딧은 모든 사람들이 오르고 싶어 하는 그런 종류의 스타덤은 아닐지 모른다. 불굴의 스포츠맨처럼 ‘육체파’ 배우의 삶을 천형처럼 이어가는 김명민. 항상 팽팽하게 당겨진 기타 줄처럼 전투 태세를 유지하는 이 남자를 볼 때마다, 그래도 안심이 되는 건 특유의 넉살 때문이다.
“나에게만 엄격하고 타인에겐 한없이 너그럽고 싶어요.” 나는 그가 새 작품에 돌입할 때마다 피로와 두려움으로 미쳐버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그는 비누 냄새를 풍기며 막 샤워를 마친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넘치는 스태미너를 자랑하듯 항상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서는. <보그> 인터뷰 화보를 촬영할 때 나는 매번 그에게 난처한 상황에 몰입하는 컬트적인 연기를 요구했다. 침침한 지하실의 철제 침대 세트에서 여자 모델을 내려다보며 가위를 들고 있게 하거나(<리턴> 이 끝난 후), 비좁고 초현실적인 마그리트 세트에서 시체 연기를 시키거나 (<내 사랑 내 곁에>가 끝난 후), 먹물이 흩뿌려진 미래적인 공간에서 방진복을 입고 스노클링 모자를 써달라고 부탁할 때도(<파괴된 사나이>가 끝난 후), 그는 1초의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그 일이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듯. 그렇게 안이한 스틸 연기에 저항하는 감수성, 영웅적 야망과 가족을 지키려는 사명을 동일시하는 육중한 주제의식, 그리고 앞을바라보지만 더 멀리 다른 걸 보는 듯한 검은 눈동자… 김명민은 가히 영화라는 세상 속의 신탁이었다.
“전 사실 새털처럼 가벼워 보이고 싶습니다. 열심히 한 ‘티’가 난다는 게 제 약점이에요. 그렇다고 2시간 러닝타임을 소시민 연기나 다큐멘터리 연기로 채우는 것도 직무유기라고 생각해요. 요즘엔 우아하고 럭셔리한 연기에 대한 욕심이 생겨요. 밑바닥 인생의 퇴폐적이고 거친 연기보다 <귀여운 여인>의 리차드 기어처럼 세련되고 현대적인 애티튜드를 보여주고 싶달까요.” 곧 복귀할 TV 드라마에서 야망의 엔터테인먼트 제작자로 변신할 그다.
몇 년 전 폭설이 내리던 <하얀 거탑>의 교외 세트장에서 멋진 블랙 수트를 입은 그와 함께 줄을 서서 식판의 밥을 나눠 먹던 때가 기억난다. 김명민은 자신이 대학 시절 이태원의 스키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당시 삐끼를 단속하는 경찰서장까지 그에게 탄복해 단골이 될 만큼 탁월한 영업 능력이 있었다고 자랑했다. 뼛속까지 밴 청교도적인 직업관. 그리고 우리 시대 관객들은 이제 그가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신뢰할 수 있다. 연가시의 재난에서 가족을 구한 아빠의 사명처럼, 비아그라를 판매하는 처절한 가장이다가 별안간 잊었던 간첩의 특명을 수행하는 신작 <간첩>의 행동대장으로 김명민만한 적임자는 없다.
고요한 폭탄, 유해진
유해진, 그는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정교한 시뮬레이션을 보여주는 배우다. 변화무쌍한 롤을 통해 존재감 없는 이웃들에 관한 오해를 능란하게 교정해 가며. 한때 차승원의 베스트 프렌드였고, 김혜수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은 유해진의 주가가 아니라 그와 그녀의 주가를 상승시켰다. 그는 유해진이다. 자신의 독창적인 예술성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수줍게 재능의 보물지도를 열어 보이는. 하지만그들이 흥미를 다해 떠나간다 해도 허탈해 하지 않을 그다. 애초에 누군가의 옆자리에 앉아 존재의 빚을 지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함께 있으면서도 홀로 있을 줄 아는 충만한 단독자.
<왕의 남자>에서 장렬하게 화살을 맞는 광대였을 때나, 권력자의 어릿광대 같은 하수인이었던 <이끼>에서나, 속사포 같은 수다로 조승우를 끌고 갔던 <타짜>에서나,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숨이 찬 작품 속 유해진의 전압은 무한대건만, 정작 스튜디오에서는 공기 인형처럼 걸어 다녔다. 섬세하다고 해야 하나, 내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캐릭터를 사는 사람과 롤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후자 쪽이다. “저는 남자 앙상블 영화를 많이 했어요. 사람들이 보기엔 튀는 역할을 많이 해서 튀는 사람이라고들 생각하시는데, 사실 전 튀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연극할 때는 배우들과 한솥밥의 개념으로 살았어요. 영화는 매번 새로운 사람 만나고 함께생활하는 기간도 짧고, 그래서 모나지 않게 조용히 생활하는 편이에요.”
어쨌든 코미디와 정극 사이에서 유해진이라는 개인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주연과 조연의 자존감을 동반 상승시키는, 그 공존의 진실이 앙상블의 힘이라는 듯. “최동훈, 류승완, 강우석 같은 감독들의 남자 영화를 많이 했죠. 최근엔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가 좋았어요. 양복 입어도 나쁘지 않네. 진지한 역할도 잘 어울리네…, <간첩>도 그래서 할 수 있게 된 거고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충청도 사람이라고, 유유하고 온순하게 말장단을 맞추며 ‘그랬슈~’ ‘저랬슈~’ 하다가 결정적인 타이밍에 눈 뒤집고 폭발할 때, 인간 본성의 광기에 숨이 멎는다. 분명 미소가 머물러 있는데도, 미간에 시한폭탄을 심은 사람처럼 그에겐 ‘선과 악’이나 ‘적과 동지’의 구분을 와해시키는 전조가 있다. 그가 불후의 ‘팜므파탈’인 김혜수의 엑스보이프렌드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요 속에 내재된 에너지 파장 때문에 다가가기 조심스러워지는데.
“하하. 전 언뜻언뜻 비치는 제 얼굴이 좋아요. 나쁘게 늙지 않은 것 같달까…, 제 장점은 술 마시러 가면 사람들이 연예인이 아니라 이웃처럼 대하는 거…, 그런 친근감이죠. 줄리아 로버츠가 그랬나? 배우는 평범한 사람의 특별한 직업이라고.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잖아요. 배우는 특별히 더 맑아서 남을 비출 줄 알뿐.” 잃을 게 없다는 초연함이나 잃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보다 더 우선한, 배우로서 혹독한 자신과의 언약을 늘 기억하는 그다. “연극까지 더하면 25년 정도 배우를 했어요. 그런데도 유해진 앞에 배우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창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미술 작품 만들고…, 그런 예술 활동이 제게는 힐링이에요.”
남한 사회에 물처럼 스며든 고정 간첩들에게 나타나 긴장을 유발시키는 이번 영화 <간첩>은 그에게 쉬어가는 영화다. “지령을 내리러 온 전형적인 간첩이에요. 추석 때 가족들이 함께 보면 좋을, 웃음도 있고 감동도 있고 액션도 있고.” 연기하지 않을 땐 멀리 떠나야 하는 파탈과 대화 도중에도 자기 안으로 가라앉는 눈동자까지…, 유해진이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은 기다림과 그리움 중 하나일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유해진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방가르드와 바로크 사이, 변희봉
드라마 연기와 영화 연기는 다르다. 안방의 사이즈와 극장의 사이즈가 다르듯이. 그게 평면적이고 입체적인 플롯의 차이인지, 배우가 분출하는 에너지의 차이인지 정확히 계측할 수 없지만. 그런데 변희봉은 드라마에서 볼 법한 연기를 극장에서 한다. 그런데 그 연기가 조금도 심심하지 않은 건 왜일까. 광대뼈가 두드러진 외모나 가래 낀 발성이 일일 드라마보다는 특집극이나 사극에 더 어울려서? 그렇다고 해도 화면에 물풀처럼 달라붙는 그 천진난만한 장악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글도 모르는 무식쟁이였다가 촌지를 건네는 귀여운 할아버지(<선생 김봉두>)에서부터, 괴물과 대결하는 부성애 강한 아버지까지(<괴물>), 변희봉의 얼굴은 황혼 녘의 등대 같은데…, 가슴속 침전물을 가만히 닦아주는 노인의 목소리는 고도로 정련된 단순함으로 읽혔다.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듯한 연기가 좋은 연기죠. 멍석 깔면 굳어지는 게 사람 특성이지만, 배우는 멍석을 빨리 걷어야 해요. 평생 이걸로 사니까 기술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죽을 때까지 훌륭한 감독 만나 변화하고 싶은 꿈을 꾸는 게 배우예요.”
영화는 기적 같은 걸까? 누가 그걸 만들었지, 하는? 관객은 놀라움을 느끼고 싶어 영화를 보는 걸지도 모른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같은 영화들을 보면 변희봉은 검버섯 핀 어르신이 아니라 어떤 ‘희망’의 증거로, 봉준호의 페르소나로 이미 영화를 마중 나가 있다. <살인의 추억>에서 논두렁을 13번 구르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괴물>에서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괴물과 대적할 때, 그는 이미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처럼 마스크에 영화적 깊이를 새겨버렸다. 이번 영화 <간첩>에서 그는 독거 노인이 되어 북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노간첩이다.
“<간첩>하면 으스스하고 다른 인종 같은데, 그런 느낌은 없을 거예요. 메시지가 무거우면 힘들어요. 사는 것도 힘든데 극장에서 모쪼록 웃고 즐겨야지. 그러면서도 실제로 남북이 갈라져 있으니까 뭔가 조심스러운 건 어쩔 수 없어. 글쎄 모르겠어요. 내 존재가 어떻게 표현됐을지. 공산주의자들한테도 그렇고, 나이 먹은 사람들이 불편해지는 건 참 슬픈 일이죠. 스‘ 스로 없어지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순간…, 난 영화 현장에서도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해요.”
스튜디오에서 잠깐의 소란이 있었다. 스타일리스트가 준비해온 의상이 작았고, 잠기지 않는 재킷에 변희봉은 오래도록 맘 상해 했다. “영화 의상팀에 전화를 해봤어야지, 배우 몸에 맞는 옷을 준비하는 건 기본 중 기본인데….” 그가 노여움을 삭이는 동안 촬영팀은 새 옷을 준비하며 시든 이파리처럼 소리를 죽였다. 늙으면 육체도 정신도 흐릿해진다지만, 배우 변희봉은 일상에서도 현장에서도 서릿발 같은 ‘완벽주의’로 주위를 다잡았다. 배우들이 함께 모인 단체 신을 찍을 때 알았다. ‘아! 이분이 가장 젊은 배우구나!’ 뜨거운 감자 하나가 디지털 화면 위에 홀연히 구르는 느낌. 표정을 풍부하게 하려고 지금도 하루에 눈동자 운동을 200~300번 한다는 그가,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얼굴에서 인자하고 편안한 얼굴로 순식간에 안색을 바꾸는 그가, 아방가르드와 바로크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그가, 아직도 주연을 꿈꾸는 그가! 아, 이분이 나이 들어 스크린에서 젊은 감독들과 호흡해온 게 괜한 공력이 아니구나. 변희봉은 칼칼하지만 그 울림 좋은 목소리로, 진중한 시선을 하고선 말한다.
“배우라면 너나 없이 잘하고 싶어 해요. 욕심 없는 배우가 어디 있겠어요? 나이 먹은 사람이라고 해도 잘하고 싶은 맘은 변함없거든.” 그렇게 데뷔 초기 <수사반장>의 잡범이나 <113 수사본부>의 간첩을 주로 맡았던, 70대의 변희봉이 오늘의 관객들에게 오늘의 화술로 이야기를 건넨다. “나는 감독들이 우리 정서를 많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장규성이나 봉준호 감독 영화를 많이 했는데, 그분들 영화엔 다 독특한 우리 정서가 있어요. 아무 부담 없이 만든 영화 <간첩>도 우리 얘기니까, 더 다가오는 거 아니겠어요.” 삶이, 반대 방향으로 쓰러지는 도미노 게임 같은, 날짜가 가는 동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나이에도, 노배우의 에너지는 끓는다. “지금도 극장에 작품이 올라갈 때는 정말 가슴이 뛰어요. 내가 주인공도 아니고, 그게 감독이 만든 건데도… 흥행이 안 된다 그러면 죄짓는 기분이고, 왜 이러고 사나 싶다가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게 마냥 좋은 거라….”
외모만 팜므파탈, 염정아
염정아, 그녀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생기를 깨닫게 하는 배우다. 고양이과 동물 같은 그녀의 비현실적인 외모와 달리 염정아의 눈동자는 유치원 아이를 둔 학부모처럼 현실적인 자긍심으로 충만하다. “저만큼 <간첩>에 어울리는 사람 있나요?”라고 염정아가 소프라노 톤으로 웃는다. “너무 나랑 비슷하니까 거절할 수가 없죠. 남한테 민폐 안 끼치고 애랑 잘 살아가는 보통 아줌마. 복비 10만원에 목숨 거는 생활력 강한 아줌마 간첩이잖아요.” 분장실에서 사자 갈기처럼 부푼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염정아가 주저 없이 말했다. 애초에 신비한 이미지나 부러 감출 만한 패를 쥐어본 적이 없는 염정아. 염정아는 한 번도 스스로의 인생에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후회 섞인 가정법이 없는 여자가 그러하듯 내숭 없고 화끈하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0년 전 영화
혼자 있을 때 더 도드라지는 김혜수의 관능이나, 둘이 있을 때만 존재 가치를 찾는 김남주의 애교와는 다른 염정아만의 무엇. 다른 여자의 미모를 인정함으로써 안정감을 찾으려는 여배우들의 관습과는 달리(이미연을 보고 넋을 잃었다는 고현정이나 고현정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는 김민희처럼), 염정아는 대학 시절 동기였던 고소영에 대해서도 ‘나와는 다른 예쁨이었다’라고 가식 없이 말했다. 그래서 자기 검증의 불안감이 1%도 없는 그녀를 만날 때면, 괜스레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질투와 교만을 깔지 않고도 순식간에 에스트로겐 수치를 극한으로 높일 수 있는 염정아만의 나이스한 승부 근성에 박수를 치며.
드라마 <로열 패밀리>를 할 때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 밤샘 촬영 후에도 집으로 달려가 아이를 품었다던, 그녀가 <간첩> 개봉 즈음에 주말 드라마 <내 사랑 나비부인>에서 새로운 롤을 맡았다. “안하무인 톱스타예요. 여배우인데 연기를 너무 못해서 그녀의 발연기 10종 세트가 회자될 정도죠. 롤모델이 될 만한 사람을 찾고 있어요. 난 아니야. 호호. 그런데 나 아는 언니가 너 어릴 때처럼 하면 된다고. 하하. 성질 못된 그 애가 패셔니스타로 잘나가다 음주 운전 걸려서 은퇴를 하고 결혼도 해요. 철부지가 사람 되는 얘기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왜 그녀가 조잘거리면 모두 그녀에게 벌어진 실제 이야기 같아지는 걸까. 타당성 있는 악역에 안성맞춤인 여배우. 동시에 삶에서 극적인 퇴장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통 여자로서 누리고 지켜야 할 중산층의 행복에도 즐겁게 집착하는 여자. 그것과 동일한 에너지로 북한에서나 남한에서나 살려고 발버둥치는 ‘생활형’ 간첩을 연기해낸, 생명력 하나는 끝내주는 마흔 두 살의 염정아. 함께 촬영한 김명민은 나중에 그녀와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같은 액션 영화를 함께하고 싶다지만, ‘꺽기도’의 달인이기도 한 그녀의 한마디. “왜이래? 나, 디스크 환자야!”
왠지 정이 가는, 정겨운
선이 굵고 선해 보이는 90년대 교포풍의 외모. 정겨운은 모델이었다가 배우가 됐다. 빛이 넘실대는 마이너의 모델 세계. 방송계로 가는 임시 정거장 같은 그곳에서 그는 김민준이나 강동원처럼 화려한 얼굴로 시선을 휘어잡으며, 일찌감치 매니지먼트의 눈에 들어왔던 스타 모델도 아니었다. 하긴, 그의 얼굴에서 거친 마초나 미소년의 특질을 발견할 수 없으니. 애초에 그가 승부를 볼 쪽은 <리플리>의 주드 로보다는 맷 데이먼. 태양 앞에서 얼굴을 찌푸리는 선장보다 고독과 맞서 싸우는 근육질의 선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없이 많은 오디션에서 ‘다음 기회에’라는 다정한 거절을 당한 후, 그가 처음으로 맡은 배역이 창작 뮤지컬 <밑바닥에서>였다.
“저한텐 정말 제목이 크게 다가왔어요. ‘밑바닥에서’라니. 바로 제 얘기였죠.” 베스트극장 <그 남자의 질투>에서 고등학생 역할을 맡은 후 연기 인생의 실타래가 풀렸다. 영화 <간첩>은 정겨운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저는 영화는 한 1년 찍는 줄 알았는데, 3~4개월 만에 끝나서 아쉬웠어요.” 농촌에서 소를 키우며 컴퓨터 해킹을 전문으로 하는 간첩 역할은 이 ‘정겨운’ 젊은이의 우직함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우민호 감독님은 제게 늘 ‘우직하게 하라’고, 근데 그게 저를 빌어 감독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영화는 그에게 등반 가치가 충분한 암벽이었다. 모든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것만 취하진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가장 행복했던 건 존경했던 배우들과 호형호제하며 하며 지내던 일. 김명민을 통해 연기력과 인격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배우고, 유해진의 어깨 너머로 남성적인 매너를 곁눈질 하고, 염정아에게 큰누나 같은 보살핌을 받고, 변희봉으로부터 배우에게 나이란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교훈을 흡수하며. 소를 닮은 그의 착한 눈동자에 기쁜 소란이 읽힌다.
“저는 중학교 시절에 <터미네이터 2>를 보고 큰 영향을 받았어요. 아놀드슈왈 제네거도 액체 인간도 너무 완벽하게 캐릭터를 소화하는 거예요. 와~! 정말 최고였어요. 그때부터 저는 언젠가는 액션 히어로가 되리라 결심했어요.” 서른한 살 청년의 동화 같은 꿈이 나는 왜 자꾸만 믿어지는 걸까. 어느 날 홀연히 날아온 외계인 같은 거물 스타가 아니라, 하루 하루 벽돌 한 장을 쌓아 집을 짓는 ‘어린 왕자’처럼, 왠지 정이 가는 이 청년 배우의 미래가 기대된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김지수
- 포토그래퍼
- HYEA W. KANG
- 스탭
- 스타일리스트 / 김하늘, 헤어/ 김환, 메이크업 / 이화, 세트 스타일리스트 / 다락(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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