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소연, K-팝 최고의 안티히어로
10월 중순에 공개한 ‘(여자)아이들’ 신곡 ‘누드(Nxde)’가 국내 모든 음원 차트 1위에 올랐다. 뮤직비디오는 2주 만에 조회 수 9,500만 회를 기록했다. 전소연은 ‘(여자)아이들’의 시그니처 안무처럼 마침내 그에게 어울리는 왕관을 차지한 듯 보인다.
전소연은 데뷔 초부터 한국 대중이 좋아하는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낳괴(서바이벌이 낳은 괴물)’라 불릴 정도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전전하던 10대의 전소연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재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한국 사회가 젊은 여성에게 기대하는 어리숙하고 얌전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여성상에서 예외로 치부될 만큼 독특한 외모나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를 천재 아티스트로 포장하거나 처음부터 완성된 스타일링으로 무대에 올려줄 만큼 강력한 소속사의 지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돌이란 타이틀을 달고 랩 배틀 오디션에 출전할 정도 배짱과 나쁘지 않은 실력 때문에 인지도를 쌓긴 했지만 여전히 그에겐 외모라도 걸고넘어져야 속 편한 안티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는 야심만만하고 절실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성공을 위해 기꺼이 전장에 자신을 내던질 준비가 된 치열한 어린 여자였다. 외모니 취향이니 하는 것들은 그런 존재를 향한 부당한 불편감을 방어하기 위한 흔한 알리바이일 뿐이다. 다행히 전소연은 그 따위에 기죽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2018년 직접 작사, 작곡, 편곡한 ’라타타’와 ‘한’을 연속 성공시키며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형 아이돌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 후 그룹 멤버의 학폭 스캔들과 탈퇴로 팀이 휘청거리기도 하고, 자작곡이 기존 국내 히트곡과 일부 멜로디가 유사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서둘러 인정, 사과했다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현대 음악의 표절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이냐는 여전히 논의 중인 이슈지만 그에게는 히트곡마다 연관 검색어로 ‘표절’이 따라붙을 만큼 ‘뭐 하나 걸리라’는 식의 감시의 눈길이 많았다. 그만큼 그가 무너뜨려야 할 벽이 견고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소연은 예능 프로그램 <퀸덤>, <방과후 설렘> 등을 통해 음악뿐 아니라 무대 기획과 제작, 실연에도 탁월한 실력이 있음을 증명하면서 꾸준히 의심을 감탄으로 바꿔왔다. ‘누드’ 가사처럼 그는 ‘셀프 메이드 우먼’이었고, 2022년은 그 결과가 절정에 이른 해였다.
지난 5월 발매한 <톰보이> 앨범에서 (여자)아이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I am> 앨범의 뮤지컬적 이그조틱함이나 ‘덤디덤디’의 밝은 팝 사운드와는 또 다른 놀라운 변신을 시도했다. 록을 기반으로 강력한 훅을 장착한 타이틀곡 ‘톰보이’, 멤버 각각의 이질적인 음색을 활용해 트랩 비트 안에서 다채로운 임팩트를 만들어낸 힙합곡 ‘마이 백’은 K-팝 걸 그룹에 대한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진취적인 시도였다. 그런 트랙의 성공은 전소연이 기획과 실연 능력이 강조된 ‘컨셉 장인’이란 타이틀을 넘어서 당대 K-팝의 가장 중요한 창작자 중 한 명으로, 음악 자체에서 한 단계 더 성장했음을 증명한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마이 백’ 가사가 멤버들 각자를 자랑하는 내용인데) 왜 소연 얘기는 없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멤버들이 “그러면 곡이 안 끝나서”라고 장난스럽게 마무리했는데 사실 그게 틀린 말이 아니다. 국힙 래퍼들의 흔한 레퍼토리인 자기 자랑으로 곡을 채우자면 전소연만큼 할 말이 많은 래퍼도 없을 것이다. ‘톰보이’는 연간 음원 차트에서도 수위권에 남아 있다.
<톰보이> 앨범의 성공이 미친 여파는 오래지 않아 다시 증명되었다. 10월 19일 (여자)아이들이 미니 앨범 <I Love>로 컴백하자 소속사 큐브엔터테인먼트 주가가 15.76% 상승했다. 앨범 선주문은 70만 장에 달했다. 전작 대비 284% 성장한 수치였다. 타이틀곡 ‘누드’는 국내 차트 올 1위뿐 아니라 아이튠즈 40개국 1위를 차지했다. ‘누드’는 오페라 <카르멘>의 ‘하바네라’를 샘플링한 곡인 만큼 단숨에 귀를 잡아끌긴 해도 금세 익숙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곡 자체로는 ‘톰보이’만큼 센세이션하지 않다. 하지만 전소연의 기획력에는 여전히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전소연은 앞서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소속사 직원들 앞에서 앨범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팬들은 그가 ‘누드’라는 키워드에 투사하려던 여성 아티스트로서 고민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우려를 샀는지, 그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가사, 뮤직비디오, 무대로 승화되는지를 지켜보았다. 그는 ‘누드’라는 타이틀로 화제를 일으킨 다음 “야한 작품을 기대하셨다면 oh, I’m sorry 그딴 건 없어요, 환불은 저쪽”, “I’m born nude 변태는 너야”라는 가사로 반전을 시도한다. 여성 무대 예술인들에게 노출을 요구하는 쪽과 노출을 비난하는 쪽,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가사다. 이 영리한 이벤트는 ‘누드’라는 단어의 인터넷 검색 결과를 교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대중의 복잡한 기대를 받는 아이돌 당사자이자 음악 창작자, ‘셀프 메이드 우먼’ 전소연이기에 가능한 통쾌한 전복이다.
안타깝고 미안하지만 K-팝의 승승장구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말할 거리가 있는, 음악이든 가외의 것으로든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할 능력이 있는 아티스트는 많지 않다. 스물넷 전소연의 성공이 짜릿한 것은 그래서다. 그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돌 같은 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디서나 호감을 사는 이미지로 광고 퀸이 되어 일세를 풍미하는 일도 당장은 상상이 어렵다. 대신 여기엔 누가 ‘미친 X이라 말해’봤자 “사정없이 까보라고 you’ll lose to me ya”라고 호기롭게 이죽대는 전소연이 있다. 톰보이? 그걸로 되겠나. 그는 K-팝 최고의 안티히어로다. 호감 대신 복종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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