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얼굴
별은 많다. 매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스타와 배우들이 뜨고 지는 게 TV와 스크린이다.
하지만 그중에도 유독 빛나는, 짙은 잔향을 남기는 배우는 있다. 올해 <보그>가 보고 마음 설레던 순간들,
그 애틋한 감정을 선사한 젊은 배우들을 만났다. 분명 쉬이 사라지지 않을 빛이다.
출중한 배우, 천우희
천우희와의 만남은 섬뜩했다. 영화 <한공주>에서 그녀는 독한 아픔을 품고 공중을 배회하듯 다가왔다. 한 소녀의 아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피지 못한 공주였다. 또래 남학생들에 둘러싸여, 가장 아름다워야 할 순간을 치욕 속에 빼앗겨버린 그녀는 회색 도시 안에 갇혀 맴돌았다. 한공주는 좀처럼 웃음을 보이지 않았고, 결코 아물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신음만 내뱉었다. 2014년 놀라운 데뷔작으로 꼽히는 이 영화는 배우 천우희를 발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스물일곱 나이에 다시 교복을 입고 여고생이 된 그녀는 너무 아파, 맨 정신으론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을 온몸으로 토해냈다. 웃음기를 감춘 표정은 섬뜩했고, 무겁게 떨구는 눈빛은 고독했으며, 한 발짝, 한 발짝 힘겹게 옮기는 발걸음은 애처로웠다. “영화 내용이 무거워서 소속사에선 우려의 의견도 있었어요. 근데 시나리오를 본 순간 ‘제 거’라는 느낌이 들었고, 꼭 해야겠단 생각이 강했어요.” 그렇게 한공주가 된 천우희는 이 영화로 많은 상을 가져갔다. 국내외 영화상의 거의 모든 신인여우상을 휩쓸었고, 지난 11월 13일 열린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선 여우주연상도 탔다. “얼떨떨해요. 운동을 하다가 그 기사를 봤는데, 남우주연상 수상자 최민식 선배님과 제 사진이 나란히 올라 있는 걸 보고 소름이 돋았어요. 운동하다 울 뻔했죠.” 그렇게 천우희는 우리에게 왔다.
그리고 6개월. 천우희에겐 새로 물어야 할 작품이 다섯이나 더 생겼다. <한공주>를 마치고 그녀는 염정아, 문정희, 김영애 등 여자 선배들과 함께 마트 노동자의 애환을 다룬 영화 <카트>를 찍었고, 이후엔 류승룡, 이성민과 함께 스릴러물 <손님>의 촬영을 끝냈다. 그리고 지금은 <황해>를 만든 나홍진의 차기작 <곡성>의 여주인공이 되어 땅끝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사이엔 영화 <뷰티 인사이드>와 웹 드라마 <출중한 여자>도 있다. 한공주가 이뤄낸 성과다. “<한공주> 덕을 많이 보고 있죠. 좋은 작품을 만났고, 그 덕에 이렇게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감당해야 할 부담은 더 크다. 온전히 연기로 주목받은 배우에게 다음 선택은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담은 있어요. 저에 대한 기대치가 확 높아져서 다음에 잘하더라도 평타라고 할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그래서 <손님>, <곡성>을 하면서는 고민도 많이 했어요. 근데 이렇게 남의 평가를 신경 쓰는 게 맞는 것 같진 않다, 나중에 어떤 소리를 듣든 마음 편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걸 잘하자고 정리했죠.” 천우희는 스스로 어깨에 힘을 빼는 시간을 가졌고, 본인의 이름으로 출연한 로맨틱 드라마 <출중한 여자>에선 ‘리프레시하는 경험’도 했다. “이전에 한 작품과 달리 캐릭터 맛을 살린, 톤을 좀 달리한 연기였어요.” 그녀는 올 9월부터 시작한 <곡성>의 긴 여정이 끝나는 1월에는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천우희는 아픈 여자다. 스크린에 강한 인상을 새긴 <한공주>의 한공주부터 취업난을 뚫지 못하고 마지못해 마트의 캐셔가 된 <카트>의 미진, 그리고 천우희가 배우로서 맨 처음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영화 <써니>의 ‘본드 걸’ 등 그녀가 맡은 역할은 대부분 마음 한쪽에 상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들이 그저 아프다고 끙끙대기만 한 건 아니다. 천우희는 어떤 영화에서든 싸웠다. 표현 방식이야 매번 달랐지만 그녀는 분투했고, 나름의 결실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손님>, <곡성>도 그러고 보니 좀 분투하네요.(웃음)” <한공주>, <손님>, <곡성>. 그녀의 최근 출연작을 놓고 보면 거의 하드보일드의 필모그래피다. 하지만 그럼에도 천우희는 캐릭터의 그늘에서 깊은 우물만 파진 않는다. “시나리오는 매우 파고들어요. 그리고 괴롭지 않으면 제대로 연기를 안 한 느낌이라 스스로를 좀 괴롭히죠. 이게 뭐라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나 싶을 정도죠. 근데 영화와 일상은 좀 구분하려는 편이에요.” 그녀는 아플 땐 아파하더라도, 일어나 싸울 땐 싸우고, 또 웃고 즐겨야 할 땐 마음껏 소리쳐 웃는다. 영화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어하지만은 않는다. “메모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사람은 자기가 하는 말, 생각따라 사는 게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올해의 목표 같은 것도 적고, 연기, 일상에 대한 다짐 같은 것도 메모해요. 항상 긍정적으로 보려는 편이죠.” 그래서 천우희를 보고 있으면 그녀가 연기한 여자들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건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크린 속에서는 보고 있기 딱할 정도로 가엾고 안쓰럽지만 그 밖을 벗어나면 금세 일어나 두 발로 튼튼히 걸을 것 같다. “스스로 자정작용을 한달까요?(웃음) 마음이 힘들 땐 고향 이천에 다녀오기도 하고요.” 우리에게 이렇게 큰 아픔과 위로, 그리고 건강한 에너지를 동시에 준 배우는 거의 없었다.
거인이 된 소년, 최우식
올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선 이 남자가 뜨거웠다. 근래 부산국제영화제는 <파수꾼>, <무산일기>, <한공주> 등 걸출한 독립 영화를 발굴해내곤 했는데 올해는 그게 <거인>이고, 그 남자 주인공 최우식이 만만치 않은 배우란 얘기였다. 그리고 실제로 최우식은 영화제 마지막 날 열린 시상식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 유지태는 직접 상을 건네며 “앞으로 더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딱 5초 정도였을까요? 유지태 선배님이 상을 주면서 얘기하는데 정말 떨렸어요. 영광이었고, 뿌듯했죠.” 하지만 사실 최우식의 이번 수상은 좀 놀라웠다. 그는 아직 드라마나 영화에서 감초처럼 등장했다 퇴장하는 배우의 느낌이 컸기 때문이다. 김수현의 뒤통수를 때리며 “우리 누나 건들지 말라”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고교생, 드라마의 웃음과 코미디를 담당한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이용, 그리고 처세술과 잔머리에 능한 신하로 출연한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같은 작품 말이다. 그는 지금까지 이야기의 깊이보단 장식을 위한 양념이었고, 주연의 대사와 몸짓에 색을 더하는 조연이었다. 하지만 영화 <거인>에서 그는 마침내 거인이 된다. 영화를 연출한 김태용 감독은 최우식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그의 연기는 기적과도 같았다”고 했다.
<거인>은 좀 애달픈 영화다. 집을 나간 어머니와 무책임한 아버지를 피해 보호시설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주인공 영재는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하는 소년이다. 이제 시설을 졸업해야 할 나이가 됐음에도 갈 곳이 없는 그는 어떻게든 그룹홈에 붙어 있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신부가 되겠다 공언하고, 매 주말 성당에 나가 기도를 올리며, 집에 와선 청소와 설거지 등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일면 성실하게만 보이기도 하는데 짊어진 짐의 무게만큼 어둠도 숨기고 있다. 영재는 보호시설에 후원 물품으로 들어온 운동화를 빼돌려 친구들에게 판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친구를 배신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당장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면 거짓말도 한다. 혹독한 현실을 살기 위한 처세술이다. 그리고 이 애달픈 소년을 최우식은 덤덤하게 연기한다. “사실 처음 대본을 봤을 때는 걱정이 많았어요. 영재랑 달리 저는 되게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아빠한테 욕하고 이런 것도 많이 와 닿지는 않았고요. 근데 영재라는 캐릭터가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정말 많은 면을 보여줘요. 연기하는 입장에서 그게 탐이 났어요.” 최우식은 감초와 양념을 맴도는 행보에서 잠시 벗어나고도 싶었다. “배우로서 사춘기랄까요? 분명 밝고 방방 뛰는 역할이 좋고 재미있기도 한데 계속 제자리를 걷는 듯한 느낌도 있었어요.” 그는 <거인>에서 거의 웃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결의 감정을 드러낸다. 가혹한 현실을 버티기 위해 있는 힘껏 외치고, 발버둥 친다. 우리가 모르던 최우식이고, 비릿하지만 잊기 힘든 청춘의 얼굴이다.
최우식은 10대를 캐나다 밴쿠버에서 보냈다. 부모님과 함께 이민 가 학창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해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연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연출이 꿈이었는데 연출을 하기 전 연기를 좀 같이 해보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어요. 근데 완전 빠져들었죠.” 하지만 그 단호한 결정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그가 한국에 들어와 3년간 준비한 드라마는 프로젝트 자체가 엎어졌고, 최우식은 갈곳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지금 생각하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스무 살이었으니까, 진짜 어린 마음에 겁 없이 뛰어들었던 거죠. 정말 내일이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최우식은 꼼꼼한 남자다. 좋은 일이 있어도 마음껏 기뻐하느니 다음을 준비하는 그는 <거인>의 영재 못지않게 힘들었을 그 시간을 용케 버텨왔다. 드라마 <별순검>의 13초짜리 단역으로 TV에 데뷔했고, 드라마 <짝패>의 이상윤 아역을 따내며 연기 생활을 근근이 이어갔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있었어요. 뭐가 돼도 되겠지?(웃음) 어떻게든 단역 하나는 하겠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게 최우식은 올해 두 편의 영화와 한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거인>, 신하균, 이정재와 합을 맞춘 <빅 매치>, 그리고 이제 막 방영을 시작한 <오만과 편견> 등. 베테랑 남자 배우들 사이에서 꽤 긴장도 했을 것 같은데 그는 신하균과의 연기에 대해 “대학교 4년 다니는 거보다 신하균 선배님이랑 1시간 연기하는 게 얻는 게 훨씬 많은 것 같았다”고 자랑한다. “물론 긴장이야 하죠. 근데 그러느라 제 역할 못하면 감독님께 혼나니까 그냥 일단은 할 건 다 하려고 해요.” 아픔으로 단련한 어린 배우는 때로는 배짱이 좋은 방법이란 걸 깨달았다. 영재의 독한 성장통과 함께, 그렇게 최우식은 한 걸음 크게 성장했다. 올해 스물다섯 소년의 조금은 늦은, 하지만 인상적인 성인식이다.
치명적인 여자, 이솜
솜털이 가시를 돋운다. 순진한 눈망울로 시골 유원지의 매표소를 지키던 여자는 한 남자의 이기적인 욕망 앞에서 복수의 팜므파탈이 된다. 낮은 단화는 높은 힐로 갈아 신었고, 편하게 펄럭이던 스커트는 긴장감 뽐내는 타이트한 원피스로 바꿔 입었다. “교수님이 좋으면 다 좋아요”라던 대사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란 협박으로, 순하고 여리기만 하던 얼굴은 빨간 립스틱의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갑작스러운, 그래서 더 무서운 변신이다. 고전소설 <심청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영화 <마담 뺑덕>의 여주인공 덕이는 올해 스크린에서 가장 치명적인 여자 중 한 명일 것이다. 남자 주인공 학규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귀머거리 엄마를 봉양하는 마음씨 좋은 시골 처자였지만, 학규와의 열애, 그리고 그의 배신 이후엔 독하게 날이 선 여자가 된다. 멜로에서 치정 스릴러로의 전환이다. 보는 입장에서야 드라마틱하지만 연기하는 당사자는 아마도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을 거다. 실제로 <마담 뺑덕>에서 덕이를 연기한 이솜은 이 영화를 찍고 꽤 앓았다. 마지막 촬영 날에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 갔으며, 관객 무대 인사 마지막 날엔 거의 오열하듯 울어버렸다. 그리고 영화가 스크린에서 내려간 지금 역시 그녀는 덕이를 놓지 못하고 있다. “그냥 이게 다 끝났다는 생각에 눈물이 막 나왔어요. 정말 이 악물고 한 영화고, 느껴보지 않은 감정, 경험하지 않은 인물의 변화를 연기했기 때문인지 후유증이 오래갔어요.” 그만큼 이솜은 완벽하게 덕이의 시간을 살았다.
본래 이솜의 무대는 런웨이였다. 2008년 열아홉의 나이로 데뷔한 그녀는 모델로 쟁쟁한 브랜드들의 쇼를 장식하는 간판이었다. 볼록 솟은 광대와 둥그스름한 얼굴선은 트레이드마크였고, 아련하면서도 세련된 여성미를 연출해내는 능력은 그녀의 자산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는 점점 더 스크린에 오래 머물렀다. 2010년 스폰지하우스 조성규 대표의 연출 데뷔작 <맛있는 인생>을 시작으로 매해 한두 편씩 영화를 찍었고, 그 사이사이 브라운관도 두드렸다. 그리고 지난해엔 무려 세 편의 영화를 찍었다. 조성규 감독의 멜로 <산타바바라>와 차승원과 함께한 스릴러 <하이힐>, 그리고 정우성을 옭아매는 여자로 변신한 <마담 뺑덕> 등. 여배우로서 명확한 전환의 해였다. “처음에는 모델 일과 연기를 병행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모델 일을 하면서부터 연기에 대한 마음이 있었거든요. 근데 어느 순간 이게 병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거란 생각이 강해졌어요. 그래서 이젠 연기를 더 잘, 많이 해보고 싶어요.” <마담 뺑덕>에서 이솜은 거의 1인 3역을 한 거나 다름없다. 유원지 매표원으로 일하던 시절 덕이는 사랑의 상처를 겪은 뒤 8년 후 세정이란 이름으로 나타나고, 다시 시간이 흐른 뒤엔 복수도, 증오도, 사랑도 관조하게 된 여자가 되기 때문이다. “덕이가 그냥 참 순수한 여자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감정적으로 너무 힘든 작품이었고, 주위에서 걱정도 많이 했는데 저 스스로의 만족은 있어요. 연기가 재미있고, 계속해보고 싶다는 느낌이 있어요.” 이렇게 이솜은 한 여자의 질곡을 통해 배우란 늪 속에 깊숙이 들어섰다.
노출, 19금으로 화제가 된 영화지만 <마담 뺑덕>은 사실 배우 이솜의 속살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에서 이솜은 예쁘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사랑과 증오, 복수와 욕망이 들끓는 전장의 드라마에서 그녀는 그냥 스스로를 놓아버렸다. “겁은 나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을 보여주게 되니까요. 콤플렉스도 있고요. 근데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았어요.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 용기의 선택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수화를 하며 훌라후프를 돌리고, 남자의 배신을 직감한 뒤 거리에서 만두를 꾸역꾸역 먹는 대목은 계산하지 않아서, 날것 같아 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극 중에서 소설을 쓰는 학규는 이런 구절의 글을 쓴다. “바삭바삭한 햇살이 폭죽처럼 부서져 그녀의 머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녀는 번데기 속의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있었다”로 이어진다. 덕이의 순수함, 그리고 그녀의 욕망을 묘사하는 이 글귀는 분명 배우 이솜에 대한 이야기로도 적절할 것이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런웨이를 걸었던 이솜은 이제 번데기를 하나 벗어젖혔다. 그리고 그 위로 지금 바삭바삭한 햇살이 폭죽처럼 부서져 내리쬐고 있다. 이제 나비의 비행이 시작될 시간이다.
뚝심의 연기왕, 안재홍
이 남자 소박하다. 볼품없는 체육복 한 벌로 운동장을 누빈다. 이렇다 할 응원단도, 든든한 지원군도 없다. 하지만 움츠러드는 법은 없다. 한눈에 반한 팔등신 미녀 앞에서도 솔직하고, 벤츠 몰고 나타난 라이벌 남자와도 당당하게 맞선다. 올여름 개봉한 영화 <족구왕>은 좀 우화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제대 후 5일 만에 복학한 한 남학생이 친구들을 모아 족구 축제를 벌인다는 내용의 이 순진한 영화는 웬만한 희망으로 만들 수 있는 판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만섭은 뚝심과 우직함만으로 취업난에 허덕이는 캠퍼스에 일대 반란을 일으키고, 회색빛이었던 고된 캠퍼스는 잠시나마 젊음의 활기를 찾는다. 영화에는 문병란의 시 ‘젊음’이 내레이션으로 삽입되는데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듯한, 밝고 활기차기만 한 구절이 짠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그 순수한 낙관의 판타지를 안재홍이 호쾌하게 연기한다. “저희 영화가 열린 결말이잖아요. 만섭이 극 중 연극을 통해 얘기하듯 그는 미래에서 온 친구인가 싶은 구석도 있고요. 세상엔 없을 것 같은 캐릭터기도 한데, 그 우직함이 좋았어요.” 그리고 그 우직함에 반한 건 안재홍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며 화제를 모은 독립 저예산 영화 <족구왕>은 올 8월 개봉해 5만 관객을 동원했다. 스크린 100개 이하에서 상영된 다양성 영화 중 최고의 성적이었고, 상반기 <한공주>에 필적하는 화제작이었다. 안재홍은 이 영화로 11월 21일 열리는 대종상 신인남우상 후보에도 올랐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별에서 도착한 청춘, 혹은 젊음의 한 방이었다.
사실 안재홍은 독립영화 쪽에선 꽤 유명한 남자다. 그는 2012년 김태곤 감독의 장편 <1999, 면회>에서 이미 깊은 인상의 연기를 보여준 바 있다. 스물 언저리의 세 남자를 그린 작품이었는데 투박하고 어리숙하지만 진심이 진하게 배어나는 연기였다. 그리고 그는 여섯 편이나 되는 단편의 감독이기도 하다. 건국대학교 영화과 시절 워크숍 작품으로 만들기 시작한 단편을 꾸준히 이어가 올해는 여섯 번째 단편 <열아홉, 연주>를 대단한 단편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했다. “연출을 하다 보면 연기할 땐 모르는 앵글 같은 게 보여 도움이 되고요. 또 연출자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 표현하고 싶은 부분은 분명 다른 것도 같아 계속 만들고 있어요.” 좀 실례되는 말이지만 외모 역시 그는 요즘 젊은 남자 배우들과는 사뭇 다르다. 얼굴도 꽤 크고, 몸도 오동통하기 때문이다. 굳이 나누자면 연출부나 제작부 스태프에 가깝다. 실제로 그는 학교에서 사제 사이로 만난 인연으로 홍상수 감독 영화의 스태프로 참여하기도 했다. <북촌방향>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선 스태프와 단역, 투잡을 뛰었고, <자유의 언덕>에선 제작부로 일했다. “<1999, 면회> 찍으면서 불린 살을 아직 안 빼고 있어요. 근데 이제 좀 빼보려고요.” 하지만 이 무던한 외모의 안재홍이 만들어내는 리듬은 묘하게 매력적이다. 영화 <족구왕>에서 그가 몸을 풀기 위해 취했던 동작들은 코믹 짤로 만들어져 SNS를 도배했고, <1999, 면회>에서 무심하게 내뱉는 대사 톤은 의외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우직함은 세상의 어떤 고난과 상처도 극복해낼 것 같다. “만섭이만큼 성실하진 못해요. 근데 저도 착하고,(웃음) 사람들이 저에게 그런 면을 원하는 것 같아요.”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그래서 솔직함, 진심같이 다소 철 지난 단어들이 떠오른다.
안재홍은 <족구왕> 외에도 올해 <레드카펫>과 <타짜-신의 손>에 출연했다. 그리고 웹 드라마 <출중한 여자>에선 출중한 여자 주인공의 만만한 오랜 친구를, 또 다른 웹 드라마 <썸남썸녀>에선 데이팅 합숙 장소에서 모든 여자가 원치 않는 남자 2호를 연기했다. 어쩐지 호구 역할이 많다. 그리고 지금은 이종필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 <도리화가>에서 판소리에 매진하는 청년을 맡아 연기하고 있다. 호구는 아니지만 역시나 약삭빠른 캐릭터는 아니다. “<도리화가>는 신재효라는 실존하던 판소리 명창이 처음으로 여자 제자를 길러낸 이야기예요. 저는 신재효의 제자 중 한 명으로 나오고요. 재능은 별로 없지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감동을 주는 캐릭터죠. 시나리오가 진짜 좋은 작품인데, 다음엔 좀 똑똑한 남자를 해보고도 싶어요.(웃음)” 하지만 안재홍의 이 바람과는 달리 당분간 우리는 그를 호구로 기억할 것이다. 호구의 우직함, 뚝심의 에너지를 잊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족구왕>에서 만섭이 날리던 옆 짚고 차기, 그 호쾌한 슛을 또 어디서 기대한단 말인가. 스크린 속 안재홍은 조금씩 더 똑똑해지기도 하겠지만 그의 올곧은 에너지는 변하지 않을 거다. 무더운 한여름 유쾌한 반란을 꿈꾸게 한 <족구왕>의 젊음, 청춘의 기운을 그는 물론 우리도 마음 한쪽에 영원히 간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정재혁(JUNG, JAE HYUK)
- 포토그래퍼
- Ahn Joo Young, CHA HYE KYUNG
- 플로리스트
- 하수민
추천기사
-
뷰티 트렌드
할리우드의 3D 네일 전문가, K-뷰티 비주얼 아티스트 SOJIN OH
2024.11.07by VOGUE
-
셀러브리티 스타일
추억의 핑크 라이더 재킷을 꺼내 입은 지드래곤
2024.11.15by 오기쁨
-
패션 아이템
자상한 남자 친구는 어글리 스웨터를 입는다?! 올겨울 어글리 스웨터 10
2024.11.18by 장성실
-
뷰티 트렌드
다시 돌아올까요? 1980년대 무지갯빛 컬러
2024.11.12by 김초롱
-
패션 아이템
장갑, 모자, 목도리! 보그 에디터 3인이 고른 겨울 액세서리 19
2024.11.20by 황혜원
-
패션 뉴스
네 번째 보그 월드의 행선지가 정해졌다
2024.11.20by 안건호, Cydney Gasthalter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