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원, 가장 뜨거운 현재진행형의 배우
배우 엄지원은 한 번도 자신을 한정 짓지 않았다. <작은 아씨들>까지 모든 작품이 증거다.
영화와 드라마로 써 내려가는 창작자의 고유한 자취, 필모그래피. 배우 엄지원은 자신의 이 궤적을 허투루 그리고 싶지 않다. “필모그래피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걸 보면, 당시 배우가 관심을 가진 이야기가 무엇인지, 작업할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얼마간 짐작해볼 수 있죠. 같이 작업하는 상대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보면서도 그 배우의 생각이나 생각의 연결 지점을 읽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동료를 향한 존경과 사랑도 생기더라고요. 작품을 할 때 나라는 사람이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랄까요. 나 역시 나만의 필모그래피를 만들어가는 중이에요. 잘 만들고 싶어요.” 지금의 그녀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그녀의 관심이 가닿은 세계는 어떤 곳이고 어디쯤일까. 지난 10월 종영한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2022)의 원상아라는 인물을 통해 생각의 지도를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상아는 누구인가. 대한민국의 유력한 집안의 유일한 상속자, 그러나 알고 보면 아버지의 폭력과 학대를 견뎌야 했고 엄마의 고통을 고스란히 지켜보면서도 숨죽여야 했던 가여운 딸, 남편 재상(엄기준)을 최고 권력자로 만들고 싶은 야심가,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큰 그림을 어그러뜨리는 이가 있다면 시험에 빠뜨리다 못해 눈 하나 깜짝 않고 제거해버리는 차가운 피, 사실상의 실세, 어쩌면 이 거대한 드라마의 진짜 설계자. “드라마를 본 많은 분이 상아를 ‘아름다운 사이코패스’ ‘희대의 악역’ ‘빌런’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물론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만, 상아를 연기하는 입장에서, 상아라는 인물로 접근해가는 과정에서는 그녀를 악인이라거나 악역을 연기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나쁜 사람일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최대한 상아의 본능, 상아의 이해관계에 집중하며 그녀의 감정 자체를 최대한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하려 했어요.” 맡은 인물을 두고 ‘이 인물은 어떤 사람일 것’이라고 먼저 규정하기보다는 ‘어째서 그렇게 움직였을까’부터 되물으며 인물을 움직여나간 마음의 작동 방식을 살피려는 태도로 보인다.
그렇다면 상아를 알아가기 위해, 상아의 마음의 동선을 되밟아보기 위해 엄지원이 찾은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대본을 바이블처럼’이라 말할 수 있어요. 배역의 전사(前史)를 상상하며 그걸 써 내려가는 방법도 있다지만, 나는 모든 단서와 실마리가 대본에 있다고 여기는 편이에요. 대본을 여러 번 읽다 보면 어느 순간 확 이해되죠. 작가님이 대사나 인물을 그렇게 쓴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어순을 살피고 어미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인물의 말투나 인물이 쓰는 단어를 유심히 보기도 하죠. 그러다 보면 자연히 그 인물이 보여요. 예를 들어 상아는 화를 내는 순간에도 험한 욕을 하지 않고 존댓말을 쓰는 사람이죠. 나름의 격이 있는 여자랄까요. 글 속에 숨어 있는 인물의 성격을 찾아가는 과정이 저에게는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에요.”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내 눈앞에 주어진 대본에서 길을 찾고, 대사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어보기. 엄지원 연기의 출발과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드라마가 회를 거듭할수록 극심한 감정의 파고를 보여주며 폭주하는 상아. 이 변화무쌍한 인물 내면은 상아의 외적 변신과 드라마의 미술적 장치와도 긴밀히 이어지며 보는 이들을 더 사로잡았다. “대본상 상아는 외적으로 예쁜 사람으로 묘사돼 있어요. ‘예쁘다’는 건 연기로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만큼 외적 부분을 상당히 공들여 준비했습니다. 초반에 인물 세팅을 할 때 미술 팀에서 상아의 핵심 컬러로 초록과 보라를 지정해줬는데 의상을 준비하는 과정과 감정을 그리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았어요. 그 어떤 현장에서도 경험해본 적 없는 (류성희 미술감독의) 아름다운 세트 덕분에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컸죠. 색의 베리에이션을 보이며 지평선을 그린 듯 표현된 ‘닫힌 방’의 벽지 앞에서 상아가 붉은색 의상을 입고 있을 때나 그녀가 미친 듯한 기세로 온 집 안을 돌아다닐 때의 붉은 계열 의상 같은 건 상아의 감정의 강렬함을 배가시켰어요. 로브를 걸치고 저택을 활보하는 상아를 통해서는 ‘아, 이곳이 정말 다른 누구도 아닌 상아만의 공간이구나’ 하는 걸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죠.” 아직 상아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던 극 초반, 그때도 엄지원과 스태프들은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초반에 무채색 계열의 의상을 주로 입던 상아가 인혜(박지후)에게 돈 봉투를 줄 때 레오퍼드 패턴의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지 않나. ‘어머, 이 여자, 이런 옷도 입어? 뭔가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하는 뉘앙스를 주고 싶었어요. 상아의 이중성 같은. 스태프들과 함께 고심해서 그런 장치와 복선을 곳곳에 심어두며 인물의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나간 재미난 현장이었죠.”
인물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표현해보고 싶다는 열의는 처음 대본을 받을 때부터 이미 시작됐다. “아무래도 일로 대본을 읽다 보면 그 세계에 흠뻑 빠지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분석하며 읽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작은 아씨들>은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심지어 읽는 동시에 머릿속에 그림이 바로바로 그려질 정도였죠. 경험상 그런 작품은 대부분 참여하게 돼요. 나도 모르게 이미 그 세계에 빠져들었다는 증거니까요.” 초반 5화 분량의 대본만 받았을 뿐이었고 중·후반 상아의 분량이 얼마나 더 늘어날지 알 수 없는 상태였지만, 받아본 대본만으로도 기대는 상당했다. “정서경 작가님의 모든 작품을 거의 빼놓지 않고 봐온 한 사람으로서 확신이랄까. 드라마의 경우, 극 초반에 비해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빠질 때가 많은데, 그간의 작가님 글을 생각하면 마지막까지도 긴장을 유지하며 쓰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무엇보다 이렇게 잘 쓴 작품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아요. 상아의 분량이 후반으로 가면서 좀 더 많아진다면 그것대로 좋고, 만약 생각보다 역할이 크지 않아도 좋은 대본과 배우들, 스태프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좋죠.”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따라 연기의 행로를 이어온 태도는 엄지원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고스란히 읽힌다. 일찍부터 그녀는 특정 장르를 고집하거나 제한된 이미지로 자신을 한정 짓지 않았고 과감한 선택을 거듭해왔다. 비중에 연연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기존에 했던 것과 ‘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다면 기꺼이 참여했다. 멜로, 코믹, 미스터리, 스릴러, 오컬트를 비롯해 장르 혼종의 영화와 드라마를 오간 작품의 궤적이 명백한 증거다. 그 과정에서 <싸인>(2011), <조작>(2017), <방법>(2020) 등의 드라마를 통해 목표를 향해 야무지게 달려가는 인물로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며 보는 이를 설득했고,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5), <미씽: 사라진 여자>(2016), <산후조리원>(2020) 등을 통해서는 시대와 강도를 달리한 여성 캐릭터로 이야기에 중심을 잡아나가기도 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작품으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그 과정에서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더 뜨겁게 연기할 수 있겠죠. 이를테면 여성 서사라고 할 만한 작품도 꽤 많이 해왔는데 아무래도 여성으로서 잘할 수 있고 또 관심 가는 이야기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나 역시 더 다양한 이야기를 보고 싶고, 해보고 싶어요. 작품에 임할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더 많은 분이 좋아해주고 함께 봐주길 바랍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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