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느냐, 마느냐 #그 옷과 헤어질 결심
*이 기사는 하단 기사의 후속 편입니다.
오토바이의 장점은 날씨를 느낄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오토바이의 단점은 날씨를 느낄 수 있다는 거다. 그날 ‘덤핑 거리’로 향하는 1시간 반 내내 속절없이 당해야 했던 그 칼바람과 추위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2박 3일도 모자란다.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2018년의 세밑 한파는 부산 바다도 얼릴 정도였다. 식사동에 도착했을 때 나는 피부가 아린 것을 넘어서 어디까지가 내 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고, 덜덜 떠는 게 기본 설정값이 되어 나중에는 그 떨림에 맞춰 리듬도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장갑과 반코트 소매 사이에 드러낸 맨 손목은 빨갛다 못해 파랬다. 그러니까, 내렸을 때 나는 내가 아니었고 분노, 억울함, 후회, (복남이를 향한) 폭행 욕구 같은 것으로만 이뤄진 냉동 생명체에 가까웠다. 사건을 설명하기에 앞서 이날 한파로 인해 전원 꺼지듯 제 기능을 상실해버린 요소를 리스트로 꼽아보자면
1) 오토바이
2) 휴대폰
3) 정신머리
4) 방광
정도가 되겠다.
배정남이 몇 년 전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서 빈티지 쇼핑을 한 곳이 바로 여기다. 뒤편에는 옷이 창고 천장까지 산처럼 쌓여 있고, 포클레인으로 옷 무더기를 옮기는 곳. 이상한 건 복남이가 눈이 뒤집힐 만도 한데 차분해도 너무 차분했다는 것이다. 복남이도 나처럼 추워서 쇼핑 욕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짧았다. 복남이가 누군가. 옷에 환장한 남자 아니었나. 복남이이게 ‘덤핑 거리’는 그저 애피타이저에 불과한 곳이었다. 메인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최대한 따뜻한 구석 자리를 찾아 헤매는 내게 다가와 한 말은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 거리는 이미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에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다.”
?
“진짜만 취급하는 곳을 알고 있다.”
??
“오토바이로 10분 거리다.”
?????
복남이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의심했다. 그게 과연 창고 안에서 검은색 콧물을 흘리는 내게 할 수 있는 소리일까? 이 대목에서 친구들은 그냥 택시를 타고 돌아왔으면 될 일 아니냐 했지만 내 몸은 이미 복남이를 향한 분노로 가득 찬 상태였고, 그 분노는 오기로 변해 ‘네가 어디까지 가나 보자’라는 판단을 내리게 했다. ‘감기라도 걸리면 며칠은 이 핑계로 부려먹을 수 있겠지’라는 얄팍한 복수심도 있었다(다 알겠지만 최고의 복수는 복수를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멍청하고 젊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기어코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따라간 곳은 동네 뒷산 중턱에 덩그러니 자리한 한 물류 창고였다. 가는 길은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산길이었다. 하도 험해서 혹시 내가 복남이에게 죽을죄를 진 게 있었나, 아주 잠깐 인생을 되돌아봤다.
그렇게 도착한 물류 창고에서 나는 난생처음 보는 풍경을 마주했다.
드넓은 창고는 진하지만 밝진 않은 노란빛의 공사장 조명이 전부였고, 천장에는 거대한 환풍구 같은 구멍이 띄엄띄엄 나 있었는데 거기서 옷이 눈처럼 떨어졌다. 그 구멍 바로 밑에는 근로자들이 떨어지는 옷을 나름의 기준으로 구분하며 솎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옷 무더기 구간에는 도매상으로 보이는 이들이 거의 기계에 가까운 속도로 옷을 골라 카트에 담고 있었다. 무척 전문적이고 숙련된 손놀림이라 고귀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아, 여기는 빈티지계의 디스토피아이자 모던 타임즈였던 것이다!
복남이는 거의 황홀경에 빠진 상태로 도매상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쇼핑(그것도 쇼핑이라 할 수 있다면)을 시작했고 나는 생존을 위한 사냥을 시작했다. 이제껏 온 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 게다가 이미 오후였기 때문에 가는 길은 더 추울 것이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렇게 고심해서 고른 게 그 네이비 점프수트였고, 난 그 자리에서 점프수트를 껴입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었다. 복남이는 내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는지 커다란 빈 배낭에 쇼핑한 옷을 재빠르게 욱여넣으며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런데 오토바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놀랍지도 않았다. 우리의 오토바이는 명불허전 중고 시티100이니까. 급한 대로 휴대폰을 켜 수리법을 찾아보았으나 한 번 들여다볼 때마다 배터리가 10%씩 줄던 휴대폰은 결국 꺼졌다. 그때 깨달았다. 수리법을 찾을 게 아니라 택시를 잡아야 했다는 것을. 적어도 다시 창고로 들어가 아무나 붙잡고 도움이라도 청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일이 그리 커질지 몰랐고,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복남이는 어차피 가는 길은 내리막길인 데다가 15분이면 대로변에 도착할 테니 그냥 걸어가자고 했다. 사실 그때 복남이도 당황했던 것 같다. 문제는 우리가 온 길이 아닌 그 반대 길로 내려갔다는 거다(참고로 이건 추워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그냥 우리 둘 다 길치여서다).
체감 30분은 넘게 걸은 것 같은데 대로변은 나오지 않았고 주변은 굳게 닫힌 물류 창고와 듬성듬성한 숲이 다였다. 해는 저물어가고 슬슬 무서워졌다. 복남이와 나는 자조 섞인 유머를 주고받으며 애써 이 상황을 가볍게 넘기려 했다. 여기서 내가 혹한에 눈이 멀어 간과한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지랄 발광을 시작한 내 방광이었다. 춥다는 핑계로 편의점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사 먹은 게 화근이었다. ‘아, 화장실을 안 갔네!’ 이 생각을 한 번 하자 머릿속에 전구가 켜진 듯 멈출 수가 없었다. 고통은 날카롭고 잔인했다. 얼마 지나서는 거의 허리를 반쯤 굽히고 걸어야 했다. 힘겹게 걸음을 뗄 때마다 복남이는 “망봐줄 테니까 길에서 싸라고!”를 외쳤고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독기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최악이었다. 이 날씨에 점프수트를 벗고 볼일을 봐야 한다니 끔찍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싸느냐, 마느냐. 그렇게 햄릿에 빙의된 나를 설득하던 복남이는 직설 화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말 같지도 않은 스토리텔링을 하기 시작했는데,
“점프수트는, 그러니까 그중에서도 패딩 점프수트는 원래 ‘점프’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야. 낙하하거나 스키를 타거나 극한의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입었던 것이지. 너는 지금 너의 인생에서 한 단계를 더 ‘점프’하기 위해 이 옷을 선택한 거야. 운명이지. 이 옷의 원래 주인이 이걸 입고 뭘 했을지 생각해봐. 그 사람이 한 일에 비하면 네가 지금 길에서 오줌을 싸는 것은 정말,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의 말에 생전 처음 해보는 욕을 내뱉기 직전 다행히 저 멀리 신축 상가 건물이 보였다. 1층에 편의점 말고는 모두 텅 비어 있는 스산한 건물이었다. 그거야말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편의점에서 대충 아무거나 고른 뒤 키를 받아 화장실로 뛰어갔다. 칸에 들어가 지퍼를 주욱 내리고 조심스럽게 한 팔 한 팔을 뺐다. 화장실의 공기는 냉정했고 그 기운은 금세 몸으로 파고들었다. 엉덩이에 닿았던 차가운 변기는 별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울면서) 볼일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휴대폰이 있었다면 노래 한 곡은 들었을 것이다. 다 본 뒤 바지를 올리며 내 차디찬 손이 잠깐 속살에 닿았던 서늘한 순간을 기억한다. 실수로 나일론 소재의 점프수트 겉면이 허벅지에 닿았는데 그 소름도 여전히 생생하다. 몸이 지독하게 얼어 있어 모든 과정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고, 그건 하나의 의식 같기도 했다. 그때 나는 이 패딩 점프수트를 다시는 입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방광과 눈물샘을 쏙 비운 채로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택시는 바깥의 한파가 무색하게 따뜻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는 점프수트를 벗지도 않은 채로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어쩌다 그 예쁘고 따뜻한 패딩 점프수트가 한국의 식사동 뒷산 중턱에 있는 물류 창고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원래의 옷 주인과는 짜릿한 경험만 함께했을 텐데, 내가 준 추억은 화장실과 한파뿐이라 유감이다. 그다음 주인과는 좀 더 유의미한 경험을 하기를 바라며 이렇게 패딩 점프수트를 보낸다. 아, 그리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기에, 나에게 그런 경험을 선사한 복남이에게 사죄를 요구하며 내 담당이었던 설거지를 맡겼다. 한 3일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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