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돌아온 오뜨 꾸뛰르, 스키아파렐리
입기 꺼려지는 옷이라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브랜드는 다시 같은 이유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23일 이후 여러 SNS를 도배하는 두 장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분장에 가까운 도자 캣의 올 레드 룩과 사자 얼굴이 거대하게 박힌 드레스를 입은 카일리 제너가 그 주인공이죠. 스키아파렐리의 2023 S/S 오뜨 꾸뛰르 컬렉션에서였습니다. 화려한 분장, 그로테스크한 스타일링,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의상은 패션이 의복을 넘어 우리 삶과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예술이란 점을 일깨우는 듯했습니다.
스키아파렐리는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1927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패션 하우스입니다. 경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등 격변의 시대를 거쳤죠.
스키아파렐리는 꿈, 환상, 초현실주의 이미지를 가득 담은 작품을 선물처럼 내놓았습니다. 심플하지만 우아하게 드러낸 여성의 라인을 바탕으로 곤충, 동물, 신체 부위 등 자연과 일상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형태와 레이온 등의 기발한 소재를 사용한 의상이 넘쳐났습니다. 현대까지도 영감을 주는 디자인이 많죠.
‘독창적’이란 단어로 대변되던 스키아파렐리였으나 1954년 브랜드는 문을 닫게 됩니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한마디로 쉽게 요약하자면 ‘입기엔 까다로운 옷’이라는 설명이 가장 적절하겠군요. 곤충이 목 주위로 기어 다니는 듯한 디자인의 목걸이나 하이힐을 거꾸로 뒤집은 셰이프의 모자를 데일리 룩으로 소화하기엔 무리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패션보다는 예술 작품에 가까운 아이템을 내보이던 스키아파렐리는 실용성을 중시하던 샤넬을 비롯해 디올, 발렌시아가 사이에서 주도력을 상실한 채 스스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브랜드가 끝났다고, 누구도 되살아날 것이라고 생각지 못하던 2007년, 디에고 델라 발레가 인수한 스키아파렐리는 준비 끝에 2012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다니엘 로즈베리가 아트 디렉터로 임명되면서 2019년부터 확실한 부활을 선언했고요. 무려 60여 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로즈베리는 톰 브라운에서 10년 이상 일하며 갈고닦은 자신만의 독창성을 스키아파렐리에 새 숨처럼 불어넣었습니다. 브랜드의 DNA를 착실하게 지켜내면서요.
그리고 로즈베리의 열정과 스키아파렐리 특유의 판타지는 이번 꾸뛰르를 통해 폭발했습니다. 쇼 노트에 따르면, 단테의 <신곡_지옥 편>을 테마로 한 이번 컬렉션은 ‘의심에 대한 경의’를 담았다고 합니다. 모든 예술가가 필연적으로 겪는 (지옥에 가까운) 창작의 고통과 자기 의심에 대한 은유를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어서입니다. 편안하고 익숙한 방식보다는 무섭지만 새로운 것을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단연 주목받은 건 표범, 사자, 늑대의 머리를 3D 모형으로 본뜬 드레스였죠. <신곡>에서 각 동물은 정욕, 자부심, 탐욕을 의미하고요. 그러니 카일리 제너가 사자를 선택한 이유도 아시겠죠? 다만 단테의 정령들은 시선을 붙잡는 데도 한몫했지만, 그만큼 논란도 뜨겁게 이끌어냈죠. 사냥과 박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니까요.
브랜드 측은 컬렉션의 의미와 동물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페이크 퍼와 레진, 울 등의 소재로 철저히 수작업을 했다는 걸 강조했지만 트로피 헌팅과 동물 학대를 조장한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모피 소비에 대한 부조리함을 의도적으로 표현했다고 하지만요. 애초에 로즈베리가 논란을 의도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키아파렐리가 ‘아, 그 사자 머리 드레스?’ 정도로 기억되기엔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그가 얼마나 하우스의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했는지, 그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었거든요.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수트와 드레스, 독특한 소재를 통해 여성들의 환상을 채우는 동시에 독립성을 일깨웠습니다. 신체를 존중할수록 의상은 생명력을 얻는다고 믿었고요. 로즈베리가 선보인 32개 룩에는 그런 그녀의 모토가 성실하고 아름답게 반영되었습니다.
강조된 허리선과 어깨선을 통해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라인을 담아냈고, 과장된 실루엣의 턱시도를 통해 수트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죠. 블랙 앤 화이트와 옐로 골드 컬러의 오버사이즈 주얼리를 섞어낸 모습은 또 어떻고요. 초현실주의적 디테일부터 조개껍데기와 나무, 벨벳, 양철 등 소재에도 힘을 썼습니다.
오늘날은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활동하던 시대만큼 혼란합니다. 한창 진행 중인 이 논란마저도, 현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잘 보여주죠. 입기 꺼려지는 옷이라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브랜드는 다시 같은 이유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벨라 하디드, 레이디 가가, 헤일리 비버 등 트렌드 선두에 선 셀럽들은 너도나도 스키아파렐리의 의상을 입죠. 논란을 떠나 스키아파렐리가 더 환상적이고 뜨거운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혼란한 시대에 필요한 건 판타지”라고 얘기한 로즈베리의 말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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