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을 위한 ‘손톱’을 찾는 일
손가락 끝의 딱딱한 조각.
아이돌에겐 극도의 치장이며 누군가에겐 기분 전환, 정체성 또는 학대의 대상이다.
이토록 다채로운 손톱을 고찰하는 <보그> 유니버스.
힘들면 울리는
손끝에는 뼈가 없다. 열심히 사는 내가 손톱을 세우는 이유다. 거리가 온통 루미나리에로 반짝이던 지난해 12월 마지막 주,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차 안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캐럴이 흐르고 있었다. 복기만으로도 행복한 공감각적 낭만이건만 불행하게도 당시 나는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미팅 시간은 다가오는데 거세지는 눈발에 달리던 차량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고, 대기업의 클라이언트는 1월 2일 미팅에 들고 올 새로운 시안을 요청하며 셔터를 내릴 거라 통보했다. 여기에 내일 촬영 케이터링 팀 전원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는 ‘낭보’까지 더해지자 <트루먼 쇼>가 실재해도 이 설정은 과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때 <보그>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아주 개인적인 뷰티 기사가 필요해요. 주제는 네일입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벗겨지지 않은 젤 네일은 10개 중 단 셋뿐이고, 큐티클과 거스러미가 일어나 장갑을 낄 때마다 따끔하게 불편감을 느끼게 하는, 이 지친 손끝 말인가? 상태가 불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신다면 정말 솔직하게 들려줄 사담이 있긴 하다.
당신은 왜 열심히 일하는가? 돈, 명예, 자아실현? 나를 움직이게 하는 제1의 힘은 ‘욕먹고 싶지 않은 욕망’이다. 우리 일의 대부분은 협업이고 내가 역할을 다하지 않아 뒷말을 듣는 것은 견딜 수 없다. 노동의 이유가 참으로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지만 ‘책잡히지 않는 삶’은 상상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손이 많이 가는지라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20년 넘게 일하다 보니 나만의 허슬 월드가 만들어졌다. ‘칭찬받지 않아도 괜찮아. 진심을 알아주면 더 좋지’ 같은, 3자를 꽤 의식하는 1인칭 시점의 세계관 말이다. 알다시피 모든 세계관에는 시련이 존재하고 구원자와 함께 그것을 극복하며 서사가 완성된다. 내 허슬 유니버스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손톱이다. 수년 전, 며칠 밤을 새워 잡지 특집호 마감을 끝내고 ‘썸남’을 만난 날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지난 한 주의 고단함을 토로하자 그가 말했다. “그래도 손톱은 했네?” 행간을 되물으니 “진짜 바쁘면 네일 아트 받으러 못 가지. 그 시간에 나 만날 수 있었던 거 아니야?” 그의 눈에는 내 투톤 컬러 프렌치 네일이 여유, 딴짓 혹은 응석인 모양이다. 생각이 많아졌다. 점심 식사와 바꾼 손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단장한 풀 메이크업과 얼마나 다른 무게일까? 같은 뷰티 케어임에도 전자는 여유, 후자는 부지런함으로 비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만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여긴다면 나처럼 남을 의식하는 사람들의 뷰티 우선순위에서 손톱은 단연 꼴찌여야 한다. 바쁜 티 내고 싶으면 손톱을 꾸미지 않는 것이 생색내기에 유리하니까. “왜 밥도 안 먹고 손톱을 했어? 예뻐 보이려고?” 이어지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너 아니고 나한테.”
뷰티 산업에서 네일의 위상은 지배적이지 않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 그렇다. 크림처럼 건조함을 해소해 불편함을 덜어주지도 못하고, 파운데이션처럼 결점을 가려 자신감을 올리는 머스트 해브도 아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네일은 ‘뷰티 마이너리그’다. 그걸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내가, 맨 얼굴로 출근해서 점심시간에 네일을 받고 온 건 이율배반이 아니라 자기 위안이었다. 루이스 아마비스카 공저의 <알록달록 내 손톱이 좋아!>라는 동화책이 있다. 젠더에 관한 이해를 매니큐어 칠하기 좋아하는 소년 벤의 스토리로 풀어가며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밝고 예쁜 색깔로 손톱을 칠하면 마음이 더욱 환해진대요. 꼼지락꼼지락 손가락을 움직이면 알록달록한 손톱이 더욱 돋보여서 물건을 집는 게 즐겁대요.” 질주하듯 자판을 내달리며 한시도 쉬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톱은 하루 중 내가 가장 많이 목격하는 ‘나’다. 전투적 마감에 돌입하기 전 네일을 예약하는 것은 거울을 보기 전엔 확인할 수 없는 얼굴에 팩트를 두들기는 것보다 중요하다. 내가 이 동화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소년이 손톱을 칠하는 이유다. “알쏭달쏭할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좋으니까! 마냥 즐거우니까!” 하드한 허슬 컬처에도 일의 기쁨은 필요하고, 남을 의식하며 살수록 나를 지탱하는 행복의 마지노선은 지켜져야 한다. 그게 나에게는 짧은 딥 프렌치 네일이다. 말초의 자존감을 끊임없이 눈으로 확인하며 ‘삶이 충분히 잘 정돈되어 있다’고 느낄 때면 나는 너그러워질 수 있다. 지난 연말 나는 여러모로 많이 바빴고 훼손되어 떠내려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망가진 손톱이 ‘힘들면 울리는’ 10개의 알람처럼 자존감에 경고를 보내기에 휴대폰을 끄고 딱 1시간 네일 숍으로 피신했다. 12월 마지막 날 받은 버건디 프렌치 네일은 그레이 커버의 2023년 다이어리와 너무 잘 어울렸다. 투두 리스트는 길었지만 내년도 꽤 괜찮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가락 끝에는 뼈가 없다. 손끝을 지탱하는 건 얇고 단단한 조각, 손톱이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도 손가락 피부가 밀리지 않는 것은 이 작은 손톱의 고정력 덕분! 어차피 일은 해야 하는 것이고 하면 된다. 사랑은 변하고 남은 남이라, 끝까지 함께할 건 뼈 없는 손끝같이 무른 ‘나’뿐이다. 당신의 말초, 마지노선을 지켜주는 손톱은 무엇인가? 나처럼 구식 허슬 라이프를 살든, 트렌디한 조용한 사직을 하든 알 바 아니지만 꼰대 아닌 선배로서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나만을 위한 손톱을 찾는 일은 중요하다고. 네일 받은 시간은 있는 게 아니라 필요한 거라고. 백지수 <보그> 뷰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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