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수가 믿는 것
땀과 노력과 근육의 힘을 믿는 박해수가 끈질기게 생각 중이다. 빛이 저물고 어둠이 밀려들 때까지.
영화 <유령>으로 무대 인사를 돌며 출연진이 번갈아가며 울더군요(웃음).
(이)하늬, (박)소담이, 서현우 배우, 설경구 선배님, 이해영 감독님까지, 그만큼 진심을 다해 관객을 만났거든요. 그걸 보면서 저도 울컥했고요. 옆에서 말하는 걸 잠잠히 듣고 있으면 밀려오는 감동이 있었어요. 촬영하고, 편집하고, 후반 작업하는 걸 넘어서 진정성 있게 관객을 만나는 것까지가 영화의 영역이구나, 싶더라고요. 관객에게 더 많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도 배우의 역할인 거죠.
항일 조직 ‘흑색단’의 스파이(유령)를 쫓는 조선총독부 경호대장 다카하라 카이토를 연기하기 위해 2주 만에 일본어 대사를 완벽하게 암기했다는 사실이 화제였어요.
대본이 아주 매력적이었어요. 처음엔 한국어로 된 대본을 읽었는데 카이토 대사는 일본어로 해야 한다는 거예요. 심지어 첫 리딩이 2주 뒤래요. (소속사) 팀장님한테 일단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했죠. 딱 한 줄만 외워보려고요. 그런데 밤새도록 애를 써도 안되더라고요. 결국 설경구 선배님께 전화해서 이건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작품에 폐가 될 것 같다고 말씀드리는데 사실 그때도 마음속으로는 너무 하고 싶었어요. 선배님이 감독님을 만나면 답이 나올 거라고 하셔서 이해영 감독님을 뵀는데 감사하게도 ‘나만 믿고 가자’ 하시더라고요. 바로 ‘알겠습니다’ 했죠.
실은 거절하려고 나간 자리였다면서요. 살면서 마음먹은 것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나요?
주변에 잘 휘둘립니다(웃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믿고요.
왜 그렇게 카이토를 연기하고 싶었나요?
이 사람이 가진 번뇌가 명확하게 보였어요. 좋은 혈통을 갖고 태어나 군인이 되었는데 조선인의 피가 섞인 무라야마 쥰지(설경구)가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을 자각하는 데서 느끼는 시기심과 애증, 온갖 갈등이 생생하게 다가오더라고요. 그걸 표현하는 희열이 짜릿할 것 같았어요.
BBC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 같은 시대극을 좋아한다죠. 아름다운 공간과 의상을 앞세운 <유령> 역시 1933년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서양식 호텔 건물을 구현한 세트장은 현장감이 대단했어요. 소품 하나하나가 정말 리얼했고요. 제 군복은 실제 일본군이 입었던 것보다는 좀 더 묵직하고 색도 더 어둡게 디자인해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독일군 제복 느낌이 났어요. 의상이 일으키는 감응이 확실히 있었죠. 영화를 미학적으로 정교하게 디자인하는 감독님과 제작진을 만난 덕분에 배우 모두 연기에 한층 깊이 몰입했어요.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떤 시대를 살아보고 싶나요?
딱 <유령> 속의 1930년대 경성이요. 모던 보이 시대. 아픔의 시간이긴 했지만 동시에 신문물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화려하게 변모한 시기이기도 해요. 그 시대만의 낭만도 분명 있었을 거예요.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중절모를 쓴 조선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멋지게 뽐내고 다녔는지도 궁금해요. 물론 그 시대에 저는 어디선가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을 것 같지만요(웃음).
이번에는 LG아트센터 서울에서 3월 31일부터 4월 29일까지 열리는 연극 <파우스트>로 관객을 만납니다. 평일에는 하루 10시간씩 연습에 매진한다고요.
연극 무대에 제대로 서는 건 연극 <남자충동> 이후 무려 6년 만이에요. 연습 첫날 ‘맞다, 여기 이렇게 힘든 곳이었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연극 판을 벗어나 있는 동안 저도 모르게 연기할 때 절제하는 부분이 생겼더라고요. 연습할 때 NG를 최대한 많이 내면서 지나치게 매끈해진 부분을 부수고, 벗겨내고 있어요.
연극의 꽃은 고전이라죠. 그중에서도 괴테의 <파우스트>는 난도가 남다른 작품이고요.
살아 있는 현대 연극의 거장 페터 슈타인(Peter Stein)이 연출한 <파우스트>는 1부만 상영 시간이 4시간 40분이에요. 2부는 그보다 길죠. 총 20시간이 넘는 버전도 있어요. (박해수가 출연하는 연극 <파우스트>의 총 상연 시간은 165분이다.) <파우스트>는 정말이지 언어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어요. 원작 소설을 정말 재미없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요즘 단어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죠. 기쁨, 환희, 고통 같은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하나하나 다시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양정웅 연출가님이 하신 말씀인데, 괴테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끝없는 장문으로 이어진 독백으로 진정한 사유를 유도해내기 때문이라고 해요. 사유와 사유, 세계와 세계가 부딪치며 계몽과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경이롭죠. 고전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악마 메피스토로 등장한다고 하니 과거 연극 <프랑켄슈타인>에서 악한 괴물로 변해간 ‘피조물’로 등장하던 때가 떠오르기도 해요.
<파우스트>에서 가장 욕심난 역할이 메피스토예요. 그저 악당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들여다봤을 땐 그렇게 악마로 느껴지지 않아서 놀랐어요. 오히려 지극히 합리적이죠. 파우스트 박사를 꾀어내기 위해 그가 하는 주장에 그렇게 엄청난 속임수와 계략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나가서 사람도 좀 만나고, 사랑도 하고, 세상을 즐겨라’라는 건데, 너무 당연한 말이잖아요. 메피스토를 연기하며 악의 평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당신에게 가장 강력한 ‘악마의 유혹’은 뭔가요?
음식. 맛있는 거 먹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어요. 웬만하면 안 굶고, 먹는 만큼 운동해요. 엄격한 식단 관리가 필요할 땐 냄새나는 건 다 치워버려야 하죠. 유혹에 흔들릴 여지 자체를 없애야 돼요.
파우스트 박사 역할을 맡은 유인촌 배우와는 인연이 있죠. 2011년 <더 코러스 – 오이디푸스>로 그해 ‘동아연극상 유인촌신인연기상’을 받았어요.
그때 선생님과 찍은 시상식 사진을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선생님의 긴 독백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교향곡을 듣는 듯해요. 높낮이와 장단은 완벽하고, 풍부한 스토리까지 느껴지죠. 내뱉는 힘이 대단하시더라고요. 햄릿만 여섯 번을 맡아 연기하실 만해요. 저와 함께 출연하는 박은석, 원진아 배우 등 후배들이 조언을 구할 때마다 많은 말을 하시진 않아도 항상 큰 용기를 주세요. 포기하지 말라고, 마지막 단어까지 긴장감을 갖고 밀고 나가라고요.
항상 선배들에게서 배울 점을 찾는 것 같아요.
저 혼자 답을 찾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주변을 잘 둘러보는 편이에요. 밤늦게까지 혼자 끙끙대봤자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백지상태가 되더라고요. 다른 배우들과 에너지를 교환할 때 훨씬 좋은 게 나와요. 촬영 직전까지 고민이 많았던 <유령> 역시 촬영장에서 설경구 선배님이 내뱉는 대사 한 마디에 갈피가 잡히더라고요. 선배님께서 카이토의 자격지심을 확 끌어올려주셨거든요.
후배에게는 어떤 선배인가요?
편하게 밥 얻어먹을 수 있는 선배? 덕분에 따르는 동생들이 꽤 많아요(웃음). 고민을 털어놓으면 조언해주기보다 함께 고민하는 쪽이죠. 술 한잔하면서 ‘그래, 뭐가 문제인지 한번 보자’ 하면서요.
소설 <파우스트>는 괴테가 23세부터 82세까지, 60년 동안 집필했기에 주인공의 생각과 그를 둘러싼 세계가 계속 변화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연기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는 걸 느끼나요?
당연히 저도 바뀌어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돌아가니까요. 예전에는 훌륭한 영화가 나오면 1년은 회자된 것 같은데, 이제는 6개월도 아닌 것 같더라고요. 요즘은 시청자와 관객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시대의 흐름을 좀 잘 읽고 싶어요. 요즘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기도 하면서요(웃음).
지난해 <SNL 코리아 시즌 3>에 출연한 모습도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무대에서 “2022년에 있었던 일 중 가장 즐거운 추억이 될 것 같다”고 말했어요.
또 다른 틀 하나를 신나게 깼죠. SNL 크루와 연기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뭐든 다 받아주니 신나더라고요. 연기 공부할 때 희극 연기가 제일 어렵다고 배웠는데 맞는 말 같아요. 일단 웃겨야 하고, 공감도 이끌어내야 하고, 시대 풍자도 있어야 하죠. 타고난 호흡도 필요하고요. 연기, MC, 연출까지 여러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쇼를 이끌던 신동엽 선배님도 정말 멋지시더라고요.
<파우스트>에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이 등장합니다. 살면서 가장 방황하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그런 시기가 꾸준히 왔던 것 같아요. 첫 번째 변곡점은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2017~2018)을 만날 때였어요. 연극만 주야장천 하다가 처음으로 방송계로 넘어와서 아는 사람도 없고, 낯선 환경이 좀 무서웠어요. 그때도 주변에 많은 조언을 구했죠. “네가 연극계에 적응하는 데도 3~4년이 걸렸는데 어떻게 벌써 편할 수 있겠니” “지금은 진흙탕에 굴러야 할 때다”라는 지인들의 말이 다 맞는 말이더라고요. 그래서 버텼어요. 두 번째 변곡점은 <오징어 게임>(2021)으로 난생처음 ‘월드 스타’ 소리를 듣게 됐을 때였죠. 미국 에이전시(UTA)와 계약하고 해외에 자주 드나들면서 ‘자격’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예술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고민도 많이 했고요. 행운을 충분히 즐기면서도 예술가로서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복잡한 마음이었어요.
그렇더라도 <오징어 게임> <수리남>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등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필모그래피를 여럿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든든하게 느껴질 때가 훨씬 많을 것 같아요.
당연히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그게 왜 하필 나일까, 하는 궁금증은 드는 거예요. 어쩌다 내가 ‘넷플릭스 전속 배우’ ‘넷플릭스 공무원’ 같은 수식어를 갖게 됐을까, 괜히 궁금한 거죠. 마침 팬데믹 시기와 맞물리면서 OTT 플랫폼이 엄청나게 성장했고, 내가 출연한 작품을 더 많은 사람이 보게 됐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덕분에 이제 내가 출연하는 연극에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만들 수 있게 된 거니까요. 선한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차기작 <대홍수> 역시 넷플릭스 시리즈입니다(웃음). 그렇죠(웃음).
안나(김다미)를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력보안팀 ‘희조’로 등장해요.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이긴 하지만 <슬기로운 감빵생활> 이후 오랜만에 박해수의 로맨스 연기를 기대해봐도 좋을까요?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로맨스는 없습니다. 저도 멜로가 그리워요. 인생 자체는 로맨스인데 말이죠. 심지어 연극에서도 로맨스 운이 유독 없었어요.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에서도 울고불고하다가 자살 직전까지 가는 극단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이었거든요(웃음).
연기에는 자연스럽게 입문한 걸로 알아요. 데뷔 17년 차, 배우가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하나요?
고등학교 때 연극부에 들어가고, 연극영화과에 입학하고, 어느 선배와 교수님 덕분에 연극을 하게 되고, 그걸 본 누군가가 나를 캐스팅하고… 우연한 기회들이 결국 운명처럼 찾아왔던 거겠죠. 지금은 그저 연기가 매우 재미있어요. 예전에는 나 연기 이렇게 하는 사람이라고 뽐내고 싶은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그런 거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동료 배우들, 제작진, 소속사 식구들, 스타일리스트,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까지, 내가 미친 듯이 좋아하는 일에 똑같이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을 만나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런 삶을 살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해요.
예상한 대로 박해수는 땀과 노력, 근육의 힘을 믿는 사람 같아요.
믿어요. 연극 무대에 서면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더 낱낱이 느끼죠. 솔직히 저는 타고난 배우는 아니에요. 하지만 노력하는 건 자신 있어요. 걱정도, 고민도 많지만 그걸 극복하게 하는 건 결국 노력이더라고요. 남보다 대본 한 번 더 읽는 것, 그 성실함이 가져올 결과를 믿어요.
요즘은 뭘 위해 기도해요?
이제 500일 지난 아기가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밥도 얼른 혼자 먹고, 새벽에 안 깼으면 좋겠고(웃음). 배우로서는 세상에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오길 바라죠. 콘텐츠에는 갈등을 봉합하는 놀라운 힘이 있거든요. 마지막으로 스트리밍 사이트도 좋지만 사람들이 극장을 자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휴대폰도 못 보고 캄캄한 곳에서 2시간 동안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게 요즘 세상에서 분명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세계관에 관심 갖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거기서부터 위로와 공감이 시작되니까요.
적당한 나이가 되면, 아들에게 어떤 출연작을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나요?
<슬기로운 감빵생활>이요. 아들이 세상을 따뜻한 곳으로 바라보면 좋겠어요. 지금도 가끔 다시 보는데 볼 때마다 좋더라고요. 신원호 감독님을 비롯해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서 더 소중한 작품인데 앞으로도 그렇게만 일하고 싶어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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