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장난, 로에베 2023 F/W 컬렉션
트렌드는 매일 새롭게 등장하고 금세 옛것이 됩니다. 런웨이 위 파격적인 퍼포먼스는 기억에 남지만 정작 옷은 기억에 남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요. 독특한 디자인의 아이템은 핫템이라 불리며 SNS를 도배했다 사라지죠. ‘인터넷 세상’의 비중이 커지면서 패션계의 숙명과도 같은 이 현상은 2배속 버튼을 누른 것처럼 더 빠르고 복잡해졌습니다. 시즌마다 반복되는 이 패턴 속에서 “우리는 옷을, 패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죠.
조나단 앤더슨의 로에베 2023 F/W 컬렉션은 이 질문을 좀 더 깊이 고민하게 했습니다. 늘 그래 왔듯 그의 영특한 장난기가 돋보였지만 그 안에 뼈가 있는 듯했거든요.
쇼는 지난 3일, 파리 외곽의 성, 샤토 드 뱅센(Château de Vincennes)에서 열렸습니다. 앤더슨의 짓궂음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쇼장 내부를 모던한 화이트로 꾸몄거든요. 고즈넉한 곳에 위치한 오래된 성에서 열린 쇼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죠. 같은 쇼지만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에 따라 우리가 컬렉션을 감상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쇼장에는 이탈리아 예술가 라라 파바레토(Lara Favaretto)의 설치 작품이 등장했습니다. 화면에서 보면 단단한 큐브 형태의 상자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사실 연약한 색종이를 뭉친 것일 뿐이죠. 일시적으로 탄생했다 사라지는 트렌드를 비롯해 패션계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습니다.
컬렉션 룩 하나하나에도 우리가 패션을 경험하고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앤더슨의 시선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프닝 룩으로 오른 드레스를 먼저 살펴볼까요? 납작한 화면에서 보면 초점이 나간 듯한, 어찌 보면 잘못 프린트된 거 아닌가 싶은 흐릿한 그래픽을 가미한 트롱프뢰유 드레스입니다. 가장자리가 모두 화이트 컬러라 화이트 큐브의 쇼장을 걷는 모델들의 실루엣이 더 헷갈리게 했죠. 간결한 드레스지만 프린트는 하나같이 고풍스러운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그 뒤로 줄지어 오른 이 스타일은 독일 아티스트 게르하르트 리히터에게서 영감받은 것인데요. 사진에 붓질을 가해 대상의 윤곽을 흐릿하게 만듦으로써 대상의 실재성에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이 작품의 특징이죠. 온라인을 통해 사물을 보는 방식, 그 심리에 푹 빠졌다고 한 앤더슨의 말이 퍼즐처럼 들어맞는군요.
표현 방식은 다양했습니다. 평범한 청바지와 티셔츠 같지만 자세히 보면 깃털로 뒤덮인 룩, 모델과 옷을 포토샵으로 어색하게 합성한 듯한 벨벳 소재의 칵테일 드레스, 정면에서 마주하면 숄더백을 메고 있는 모양새인 체인 디테일의 레더 드레스, 세련된 카디건 같지만 접착 종이에 카디건 이미지를 인쇄해서 붙인 것뿐인 스티커 등 2차원 화면에서 마주했을 때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룩이 대부분이었죠.
화룡점정은 지난 2023 S/S 컬렉션과 2023 F/W 맨스웨어 컬렉션에 이어 온라인 게임 속 아바타의 옷을 3D 프린트해 입은 듯한 옷이었습니다. 앤더슨은 이를 ‘플레이 모빌’ 같다고 표현했죠. 앤더슨의 예리함은 여기서 빛이 납니다. 온라인 세상을 뜨겁게 달굴 만한 독특한 옷의 향연이었지만 ‘감상’만으로는 알 수 없는 쿠튀르적 요소를 가미했거든요. 깃털 옷은 파리의 수공예 장인들이 깃털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붙여 만들었고, ‘플레이 모빌’ 옷은 레더 소재로 고급 자동차 커버와 같은 방식으로 정교하게 진공 제작되었죠.
그 외의 아이템 역시 로에베의 공예 정신을 충실하게 담아낸 기법으로 만들었습니다. 크리스털로 장식한 코트부터 올 레더 룩, 아이가 담요로 몸을 감싸듯 원단을 두른 모델의 포즈, 문고리로 옷감을 가슴에 박은 듯한 드레스까지! 모두 뭉툭한 실루엣이지만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니 되레 소재와 디테일적 요소가 더 콤팩트하고 날카롭게 와닿았습니다. 옷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들었고요.
통통 튀는 위트로 포장한 모던한 디자인에 쿠튀르라는 ‘전통적인’ 요소를 접목한 조나단 앤더슨. 진짜와 가짜, 환상과 실재를 질문하게 하는 멋진 쇼였습니다. 앤더슨은 “저는 로에베에서 10년간 일했습니다. 이제 다음 챕터에 대해 고려할 때죠”라며 이전에는 브랜드의 유산, 뿌리와도 같았던 고급 가죽이나 스웨이드 소재에서 멀어져 있었다면, 지금은 이를 다시 제대로 구현해내는 데 집중할 거라고 말했는데요. 다가올 컬렉션에서는 그가 어떤 걸 덜어내고 다듬으며 로에베만의 패션을 정의해나갈지, 얼른 그다음 챕터를 열어보고픈 마음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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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urtesy Photos, Instagram,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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