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시계에 관한 키워드 10가지
‘워치스 앤 원더스 제네바 2023’에서 발견한 핵심어 10가지.
“시리야, 10분 뒤 알람 맞춰줘.” AI와 대화가 가능한 시대. 우리는 스마트폰보다 빨리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손목시계를 차진 않는다. 그러나 온갖 디지털 기기의 급격한 성장에도 고급 시계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은 꾸준히 늘고, 하이엔드 시장은 몸집을 부풀린다. 당장 나부터도 최신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기계식 시계를 장만할 궁리를 하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1970년대 쿼츠 시계의 등장으로 경영난을 겪은 스위스 시계 업체가 위기를 극복한 비결 역시 장인 정신과 헤리티지였다. “디지털 시계는 머릿속으로 계산하지 않으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한편 아날로그 시계라면 순간적으로 시간을 계산하는 게 가능합니다. 시침과 분침의 움직임을 도형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일주일은 금요일부터 시작하라>의 저자 우스이 유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스위스로 향했다. 올해 ‘워치스 앤 원더스(Watches and Wonders)’ 취재를 위해 도착한 제네바의 밤은 추웠다. 외투를 챙겨와야 했나 싶었던 아쉬움은 이튿날 아침 수많은 방문객의 열기로 가득 찬 팔렉스포(Palexpo)에 도착하자마자 사라졌다. 겉옷을 벗어 팔에 걸친 채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반팔 차림으로 부채질까지 하고 있었다. 입장을 위해 신분 확인 후 패스를 발급받고 보안 검색대까지 통과하고 나니, ‘SIHH’ 시절과는 결이 다른 초대형 시계 박람회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브랜드마다 한껏 단장한 부스를 뽐냈고 새로운 컴플리케이션과 신소재, 화려한 장식 기술로 무장한 신제품은 시계 도시 제네바의 위상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나는 지금 시간의 중심에 있다!
#numbers
‘워치스 앤 원더스 제네바 2023’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숫자를 소개한다. 먼저 총 48개 브랜드가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바젤 월드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이탈한 여러 독립 브랜드가 합류한 덕이다. 방문객 수도 어마어마하다. 3월 27일부터 4월 2일까지 7일 동안 4만3,000명을 기록했다. 중국과 홍콩 등 영향력 있는 다수의 아시아 관계자가 참석하지 못한 지난해(2만2,000명)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125개 국적의 방문자 중 제네바에 체류한 기자는 총 1,400명. 제네바 인근 호텔은 몇 달 전부터 예약이 꽉 차 매일 아침 프랑스에서 국경을 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대중의 대대적인 참여도 컸다. 마지막 이틀인 주말 동안 진행한 퍼블릭 오픈은 시작도 전에 티켓 1만2,000장이 모두 판매되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전통적인 고급 시계 브랜드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 다니엘 파셰(Jean-Daniel Pasche) 스위스시계산업연합회장의 말처럼 티켓 구매자의 평균 나이는 35세로, 그중 25%는 25세 미만이었다. 신제품을 직접 보고 만져볼 수 있는 1,800회의 터치 앤 필(Touch & Feel) 세션에는 총 1만3,000건이 등록됐고, 소매업체 미팅 8,000건, 온라인 참석자도 2,600명에 달했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더 활발했다. 약 180만 개의 #watchesandwonders 포스팅을 공유하며, 무려 6억 명 이상에게 제네바 현지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chronograph
레트로그레이드부터 미닛 리피터, 퍼페추얼 캘린더, 뚜르비옹에 이르기까지. 시계 하우스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기계적 기량을 마음껏 뽐낸 워치스 앤 원더스였지만, 올해를 대표하는 키워드를 꼽으면 단연 크로노그래프다. 크로노그래프는 시간을 기록하는 장치다. 쉽게 설명하자면 스톱워치, 여기에 속도나 거리를 측정하는 기능이 추가되기도 한다. 1821년 프랑스 시계 제작자 니콜라스 매튜 뤼섹(Nicolas Mathieu Rieussec)이 경주마의 시간을 측정하면서 크로노그래프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그리스어로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Kronos)’와 기록한다는 뜻의 ‘그라포(Gráphô)’의 합성어다. 대부분 크라운을 기준으로 위아래에 작동 버튼이 있어, 위쪽 버튼을 눌러 측정을 시작하고 누를 때마다 멈추거나 다시 시작한다. 아래쪽 버튼은 리셋이다. 표시할 것이 많다 보니 다이얼 크기가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크로노그래프가 스틸 시계에 많이 적용됐다는 사실이다. 몇 해 전까지도 귀금속 시계에서만 최고급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파텍 필립이나 오데마 피게에서 오뜨 오롤로지 제품을 스틸로 만들 정도로 스틸 소재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랑에 운트 죄네는 최초의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L156.1 칼리버를 장착한 신제품 ‘오디세우스 크로노그래프’를 스틸로 완성했다. 크라운 포지션으로 크로노그래프와 캘린더 메커니즘을 변환하는 기발하고 생소한 발상은 작센주에 자리한 공방이 더 정밀한 워치메이킹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증명한다. 크로노그래프가 전부는 아니다. 레트로그레이드(바늘이 끝까지 도달했다 부채꼴을 그리며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기능)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바쉐론 콘스탄틴 최초의 스포츠 워치 ‘오버시즈 문 페이즈 레트로그레이드 데이트’, 두 개의 시간대와 30일과 31일이 있는 달을 자동으로 구별하는 사로스(Saros) 연간 캘린더를 갖춘 롤렉스 ‘스카이-드웰러’, 크라운 하나로 모든 월드 타이머 기능을 조정할 수 있는 프레드릭 콘스탄트 ‘하이라이프 월드타이머 매뉴팩처’ 등 비교적 캐주얼한 스틸 시계에서 클래식 컴플리케이션을 발견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salmon
최근 스위스 워치메이커 사이에서 유행인 살몬 컬러 다이얼의 기세가 이어진다. ‘파샤 드 까르띠에’ ‘쇼파드 L.U.C’ ‘튜더 로열’ 등 각 브랜드의 대표 격인 모델 모두 얼굴을 연한 주홍빛으로 물들였기 때문. 지금은 레트로한 요소로 느끼지만, 흰색 에나멜 다이얼과 은백색 메탈 다이얼이 전부였던 1930년대에 등장한 살몬 다이얼은 특별함과 럭셔리를 상징했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트렌드와 무관하게 살몬 컬러 다이얼을 1940년대부터 꾸준히 선보였다. 특히 1990년대 클래식한 크로노그래프 시계 ‘레퍼런스 47101’과 ‘레퍼런스 49005’ 같은 제품이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살몬 컬러와 플래티넘 소재의 조합은 메종의 유산으로 온전히 자리 잡았다. 2023년 이를 이어받은 ‘패트리모니 레트로그레이드 데이-데이트’는 위아래로 나뉜 더블 레트로그레이드 형태로 날짜와 요일을 나란히 표시하는 시그니처 디스플레이를 적용했다.
#iconic
복각은 헤리티지를 소개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과거를 추억할 수도 있고, 올해 60주년을 맞은 롤렉스 데이토나와 태그호이어 까레라처럼 기념일 챙기기에도 효과적이다. 손목이나 겨우 가리는 크기로 표현할 수 있는 외관에도 한계가 있으니 기존 컬렉션의 영향을 받는 건 비용 절약 측면에서도 분명 도움이 된다. 어쨌든 소재나 기능적으로 업그레이드된다면 반길 일이다. 누구나 떠올릴 만한 상징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유서 깊은 메종임을 입증하기도 한다. 예거 르쿨트르는 1931년 리베르소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선보였다. 90년이 넘는 동안 리베르소 케이스는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되었고,이번 워치스 앤 원더스에서도 리베르소 신작 10피스만 선보였다. “완벽한 시계는 유행과 상관없이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리베르소는 그 과정을 겪으며 여러 시대를 살아왔죠.” 예거 르쿨트르 CEO 캐서린 레니에(Catherine Rénier)의 말처럼 리베르소의 ‘황금 비율’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skeleton
내부 뼈대만 남겨 구동장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스켈레톤 시계의 미학은 채워진 공간과 빈 공간에 대한 개념을 토대로 한다. 간결하게 깎아낸 다이얼, 조각적인 프레임 안에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무브먼트가 만들어내는 완벽한 균형미는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몇몇 야심만만한 브랜드는 단순히 압도적인 디자인에 그치지 않고 특별함을 더 얹고 싶어 했다. 시계 구조를 자세히 보여주다 못해 스트랩까지 투명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파이어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위블로와 샤넬의 정교한 브레이슬릿을 보면 까르띠에가 새로 개발한 스켈레톤 칼리버에 비행기를 본뜬 로터를 적용한 건 귀여운 수준이다.
#material
다채로운 소재의 활용은 곧 다양성과 연결된다. 올해는 소재에서 탁월한 진보를 보였다. 가볍고 상처에 강한 티타늄은 여전했지만,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 티타늄만 고집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신소재 연구에 뛰어들었다. 특히 에르메스는 알루미늄으로 코팅한 유리섬유와 슬레이트 분말로 가볍고 튼튼한 복합 물질을 만들어냈고, 로저 드뷔는 세라믹 대비 2.5배, 탄소섬유 대비 13% 더 가벼운 최첨단 소재 미네랄 컴포지트 파이버(MCF)를 독점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름도 생소한 원석이 다이얼로 쓰이기도 했다. 롤렉스는 석영의 일종인 그린 어벤추린과 카넬리안, 터키석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어 자연의 힘을 빌렸다. 실제 돌을 얹은 거라 손목이 묵직할 수밖에 없지만, 이색적인 분위기 연출엔 그만이다. 풍부한 미네랄을 품은 피아제의 흑요석 다이얼, 구찌의 벽돌색 재스퍼와 옥빛 크리소프레이즈 다이얼 역시 마찬가지다. 주얼리 하우스로서 명성을 쌓아온 까르띠에 역시 다채로운 원석을 세팅했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골드에 구리와 팔라듐을 섞는 등 여러 합금 과정을 거쳐 은은한 보랏빛이 감도는 바이올렛 골드를 탄생시켰다. 이쯤 되면 시계 박람회인지 첨단 기술 학회인지 헷갈릴 정도다.
#celestial
다이얼은 시계의 얼굴이자 워치메이커의 모든 상상력이 실현되는 캔버스다. 그리고 손에 닿지 않는 미지의 세계는 늘 영감의 원천이다. 별과 행성으로 가득한 밤하늘엔 오로라가 드리우고, 날짜에 맞춰 커다란 달이 차고 기울며, 은하계에서 가장 밝은 성운은 뚜르비옹이 된다. 고작 지름 몇 센티미터에 불과한 동그라미에 우주를 담는 방식은 이토록 다양하다. 물론 이 모든 결과물은 뛰어난 기술력, 섬세한 디테일, 탁월한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다. 천문학적으로 정확한 달의 주기를 구현하기 위해 더 치밀한 메커니즘을 고안하고, 서로 다른 세라믹을 처음부터 하나인 듯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며, 어벤추린이 반투명해질 때까지 조심스럽게 정제한다. 티끌만 한 오차도 허용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secret
워치스 앤 원더스에서 소개한 주얼리 워치의 공통 주제는 ‘비밀’이었다. 19세기 팔찌나 브로치, 담배 케이스 형태로 유행하던 시크릿 워치가 돌아왔다. 비록 실용성이 뛰어난 디자인은 아니지만, 특유의 신비로움은 워치메이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반클리프 아펠, 피아제, 예거 르쿨트르에서 동시에 선보인 기다란 소투아르(Sautoir) 펜던트 시계의 귀환을 눈여겨보길. 파인 워치메이킹과 주얼리 예술의 진정한 결합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다이얼이 거꾸로 된 것처럼 보이지만, 착용자가 시계를 들어 올리면 시간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소투아르 시계의 핵심이다.
#sustainability
“2023년 말까지 모든 스틸 시계를 루센트 스틸™로 만들 예정입니다.” 쇼파드는 개막 첫날 중대 발표를 했다. 2025년까지 재활용 스틸 사용 범위를 무려 90%까지 높이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덧붙였다. 70%를 재활용 스틸로 만든 쇼파드 루센트 스틸™은 2019년 ‘알파인 이글’ 컬렉션에 처음 도입했다. 기존 스틸보다 부식에 대한 내성이 50% 이상 강하고, 불순물 함량이 훨씬 적어 연마할수록 광채가 난다(그래서 ‘빛’을 뜻하는 이름을 붙였다). 루센트 스틸™의 확대는 쇼파드가 2013년부터 100% 공정 채굴 방식으로 얻은 윤리적 골드를 사용하는 정책과도 상통한다. 메종의 ‘지속 가능한 럭셔리 여정(Journey to Sustainable Luxury)’을 실현하는 과정인 셈. 파네라이는 최대 95% 재활용 스틸로 제작한 e스틸™을 사용한다. 기존 강철과 동일한 특성을 지니면서도 부식에 강한 저자극성 소재로, e스틸™ 제품 생산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인다. 제네바에서 새롭게 선보인 신제품 ‘라디오미르 오또 지오르니’의 PVD 코팅한 e스틸™ 케이스는 빈티지한 느낌까지 연출한다. 보석 쪽에서도 채굴에 의한 천연석이 아닌 실험실에서 만든 인조석 사용이 눈에 띈다. 태그호이어는 다이얼, 인덱스, 크라운에 이어 베젤과 브레이슬릿에도 랩그로운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까레라 플라스마 2’를 소개했다. 탄소 배출을 줄이는 랩 다이아몬드는 채굴 비용이 없기 때문에 천연 다이아몬드보다 최대 70%까지 저렴하다.
#emoji
기계식 시계가 복잡하고 난해하기만 한 건 아니다. 롤렉스는 ‘데이-데이트 36’을 통해 재치 있는 반전을 보여줬다. 까다로운 샹르베 에나멜 기법으로 구현한 알록달록한 퍼즐 다이얼의 12시 방향 요일 창에서는 7가지 긍정의 키워드가, 3시 방향 날짜 창에는 31개 이모티콘 중 하나가 표시된다. 기분을 기록하는 시계다. 물론 외관만 예쁜 건 아니다. “프로파일럿×커밋 에디션은 뛰어난 무브먼트로 동력을 공급하고, 케이스 디자인도 아주 특별합니다. 하지만 이 시계의 주된 기능은 정말로 간단해요. 미소를 선사하는 거죠.” 오리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켄 로랑(Ken Laurent)은 모두가 사랑하는 디즈니 캐릭터 커밋과 팀을 이뤘다. 연두색 문자판으로 장식한 ‘프로파일럿 X 캘리버 400’ 시리즈는 매월 1일 날짜 창에 웃고 있는 커밋의 얼굴을 나타내며 ‘커밋 데이’를 알린다. 하루 정도는 맘껏 즐기며 살자는 의미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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